여전히 좀 미진한 진보의 프레임

리얼 진보 Real Progressive8점
강수돌.구갑우.김상봉 외 지음/레디앙

이 책의 기획은 아무래도 노무현의 『진보의 미래』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 나오는 장석준의 말도,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장석준의 말도 노무현의 『진보의 미래』과 물려있다. 이른바 ‘진보정권’이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 찾아온 이명박 정권을 마주할 때 다시금 소환되는 ‘의고주의’와 ‘반MB민주대연합’의 이야기들. 한명숙에 대한 공판 결과가 무죄로 나타나자 한 편에서 진보진영이 ‘정치 검찰’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다른 한 축에서 끙끙 앓고 있는 이유, 그 개운치 않음에 노무현과 김대중의 시대로 대표되는 ‘민주정권 10년’이 있다.

안타깝게도 진보정당은 2004년의 ‘기적같은’ 10석의 국회의원 획득 이후에 헤매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죽을 쑤고 한미FTA 체결, 대연정, 양극화 심화라는 ‘진보 정당’에 있어서 최고의 호재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했던 순간. ‘진보의 재구성’을 말했었지만 ‘진보’라는 말은 어정쩡한 자유주의 우파들에게 다 빼앗기고, 당내에서는 ‘코리아 연방공화국’이나 외치는 주사파들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 순간의 좌파들 그리고 ‘리얼 진보들’.

사실 구별되어야 할 것은 구별되지 않고 있고,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포스트모던’하게 경계가 불분명한지 오래다. ‘진보’와 ‘좌파’와 ‘민주’와 ‘반독재’가 마구 섞여있다. 말의 정치적 쓰임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 말들에 대한 프레임을 선점당한 탓도 있다. 노무현이 ‘진보’라는 말을 마구 갖다 써도 별 힘을 쓰지 못햿음이 이를 반증한다.

어쨌거나 노무현이 말하는 ‘진보’ 바깥의 ‘리얼 진보’는 어떤 것일까. 18명과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쓴 『리얼진보』는 기존 담론의 프레임 안에서의 ‘비판’이 아닌 자신들의 목소리를 통해 ‘진보’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보’를 말한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 경험은 좋은 반면교사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이 이를 절감해서인지 유고의 결론 부분에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힘이 ‘무엇에 맞선’ 것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넘어서지 못한 한계다. 우리는 그에게 그 답을 말해 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본의 거대 권력에
맞설’ 깨어 있는 조직된 힘이라고
“(p.361).

책의 내용은 균질하지 않다.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하재근의 대학에 대한 이야기는 틈새가 여기저기 뚫어져 있고, 오건호의 ‘사회임금제’와 김정진의 ‘증세론’은 종종 배치하기도 하며. 김정진이 이해하는 ‘치료중심적’인 의료복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 윤태호는 비판하는 입장이다(물론 지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배치가 유기적이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박노자의 글은 맥이 풀려 있다(한국이라는 현장의 부재를 자꾸만 느끼게 만든다).

가장 책의 주제와 좀 안 맞을 것 같은 글은 정태인의 글이다. 난데없이 등장한 정치경제학 논문인데다가(각주와 참고문헌을 보라), 더 좀 짜증이 나는 것은 ‘사회경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동원하는 ‘모델’은 흡사 노무현 정부시절 ‘아일랜드 모델’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모델’의 이식 혹은 차용을 통해 경제 모델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자체가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각론들은 정말 ‘각자’ 놀 뿐, 그것들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서로 ‘모여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히려 내가 이 책에 괜찮게 읽었던 내용들은 장석준의 글, 그리고 노회찬의 글이었다. 장석준이 ‘지금 현재 진보’라는 관점에 가장 충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분석들이 딱 와닿기도 했다. “진보 좌파의 국지전은 하나둘 패배해 갔다. 어제는 영국 노동당이 후퇴하고, 오늘은
프랑스 사회당이 항복을 선언하는 식이었다. 반면 자본의 전면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공중 폭격은 매번 승리를 구가했다. 자국의 산업
쇠퇴를 금융화를 통해 만회하려던 미국이 이 공중전을 진두지휘했다. 자본의 승리가 굳어질수록 새로운 시대의 방향도 분명해졌다.
금융화, 지구화가 대세가 되어 갔다. 세계는 100년 만에 다시 30여 년간의 지구화 시대, 즉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를
통과해야만 했다
“(장석준, p.31). “‘약탈 · 투기 연합’에 맞서 싸우자면, 이들의 가치와 지향, 프로그램과 겨루는 대안적인 가치와 지향,
프로그램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들의 정치와는 그 생리를 철저히 달리하는 대안의 정치로 승부해야 한다. 한마디로 ‘대안 연대’가
필요하다
“(노회찬, p.379). “생활 진보를 실현하려면, 새로운 진보 주체 스스로의 환골탈태도 중요하다. 즉 과거 운동권의 엄숙주의와 도덕절 우월주의, 결벽주의와
문화적 보수주의의 낡은 틀을 깨고 비상해야 한다. 의무감과 사명감을 훌쩍 뛰어넘어, 즐거움과 재미를 공유하는 새로운 활동 양식과
소통의 대안 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사회국가’를 향한 진보적 실천과 활동의 공간이 단지 운동’권’만의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나눔의 열린 공동체로서, 더불어 함께하는 즐거운 놀이터로, 삶이 고단한 보통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터로, 열정과
희망이 살아 숨 쉬는 행복의 광장으로, 자아의 발견과 개인의 발전이 가능한 공간이 되도록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노회찬, p.389).

이 책을 다 읽는데에는 일주일이 필요했다. 일단 버스에서 가볍게 읽으려고 했던 초창기의 읽기 전략의 실패도 있었지만, 좀 모아지지 않고 이미 익히 알려진 저자들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단점’이었다. 모든 저자의 단행본을 거의 한 권씩은 본 것 같아서이다. 그래서 지루했다. 각자의 탄탄한 한 권의 저서를 읽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고 상상연구소나 레디앙은 그것들을 계속 지원했으면 한다. 감질맛이 났달까. 그리고 저자들의 ‘논쟁’들이 여러 지면을 통해서 벌어지고 서로 상충되는 바에 대한 ‘대안’들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한 편에서 불편했던 점을 이야기하자면 이를테면 여전히 ‘노동’이라는 말을 ‘지배담론’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쓴다는 것이다. “비로소 한국 사회
노동’계급’의 실체를 등장시켜야 한다. 이런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다른 국지적 시도들만으로는 결코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것이다
“(p.361). ‘노동 계급’이 되지 않는 바깥의 존재들에 대해서 “우리도 고려하고 있다”식의 태도만 있을 뿐 그(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노동’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 책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비정규직이, 여성 노동자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시도들의 결핍은 ‘지배적 서사’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또한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들도 별로 없고 노회찬의 ‘생활정치’에 대한 언급 정도인 것 같다. 그 부분에 대해 대답하지 못함이 혹 ‘중앙집중형 좌파’라는 오명을 만들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름의 대답들은 준비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리얼진보』는 좀 다른 방식으로 쓰였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좀 더 구체적이거나 아니면 좀 더 유기적이거나. 한 번 모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미 ‘좌파’ 혹은 ‘진보’ 지식인들이 함께 엮어낸 책들이 한 두 권인가. 그게 부족한 게 문제였을까. 여전히 미진한 진보의 프레임을 봤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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