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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무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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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504" target=_blank>2010/01/27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에세이] – 88만원세대 단결은 없거든? – 단편선, 전아름, 박연, 요새 젊은 것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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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각하가 TV에 나와서 요즘 청년들이 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법을 모른다며 한탄하신다. 자신은 건설현장 십장부터 시작해서 ‘박박기며’(생각해보니 노무현도 잘 쓰던 말이다) 올라왔는데 요즘 청년들은 너무 좋은 자리만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반박은 『20대 전반전』에서 최은정이 적절하게 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20대가 하는 아르바이트가 어떤 일들인지, 그들을 둘러싼 근로 환경이 어떠한지는 보지 않고 그저 젊은이들의 고생을 찬양한다면 그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을까. (……) 게다가 이게 젊은 시절 잠깐 겪을 고생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예고편 같아서 자꾸만 ‘미래야 오지마라’ 외치게 된다“(p.71). 이게 끝이 아니다. 시작이다. ‘유연 근로’라는 시간제 비정규직 파견제 노동이 늘어나면서 너무 당연하게 미래까지 저당잡힌 이들에 대해서 할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과학적’ 인식만으로 20대들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에 대해 다 말할 수 있을까? 올 겨울에 읽었던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에 나왔던 ‘풀’과 ‘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시를 쓰는 ‘나’와 그림을 그리는 ‘풀’. 알바를 한다. 또 알바를 한다. 집에 온다. 섹스를 한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술을 먹는다. 알바에 쫓겨 하고 싶은 ‘예술’을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알바’를 하는 와중에 예술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바로 이런거다. 『20대 전반전』의 저자 홍지선이 택한 방법이다. “묘하게도, 방의 조건이 비슷할 경우 녹두거리와 역세권의 방세를 비교해보면 10만원의 차이가 난다. 덜 일하고 한 달에 스무 시간을 마을버스에서 보내거나, 지하철역 가까이에서 사는 대신 한 달에 10만원을 더 벌거나, 나는 시간을 포기하고 노닥거림을 선택했다“(p.43). 이걸 죽어도 기성세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를 20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문진영의 『담배 한 개비의 시간』에 등장하는 20대들의 세계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소설은 늘 각색된 ‘허구’의 세계이건만 이 ‘허구’에 끄떡끄떡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그게 가능한 것은 내가 20살에 이미 ‘입신영달’의 길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품’ 바깥의 세계에 살면 이렇게 된다. 아니 엄마의 품 바깥을 ‘상상’할 때 그려질 수 있는 일들이라고 할까.
“그건 바로 물가가 올랐다는 거지. 그리고 네가 좀더 나이를 먹었다는 거고. 봐봐, 다른 일 해서 한 시간에 오백원 더 벌면 뭐 많이 모으게 될 것 같지? 근데 너한테 오백원이 더 있으면, 너는 그 오백원만큼 돈 쓸 일이 더 생기는 거야. 한마디로 피곤한 거지.”
모든 것을 달관한 사람처럼 물고기는 말했다.
“하지만 너도 세계일주하려면 제법 돈이 필요하잖아?”
“그래. 하지만 난 오백원짜리 왕꿈틀이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사먹을 거야. 나는 악착같이는 못 살아, 절대. 그냥 적당히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떠나는 거지, 반드시 얼마를 모아야만 떠나는 건 아냐.”(p.92)
스물한살이 된 ‘나’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쐐’한 느낌이 좋아 담배를 피는 파리한 J. 늘 내게 어떤 영감을 주고 종종 너무 좋아 보고 싶지만 연락하기는 힘든 대학선배 M. J가 좋아하는, 그리고 J를 좋아하는 옆 까페 알바생 ‘물고기’. 또 킬힐을 신고 오전에는 학원 강사, 오후에는 편의점 알바를 하는 H.
그들은 특별히 열심히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의 거리는 늘 있어야 한다. 주인공 ‘내’가 J에게 관심이 있지만 J가 물고리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일 정도의 거리감은 존재한다. ‘쿨’한 거라고? 전혀 쿨하지 않다. 오히려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들이 있다. 불안함이 있다.
“내가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그것은 ‘나는 내가 어디로 가길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혹은 내가 정말 어딘가로 가길 원하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캠퍼스를 분주히 걷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질문조차 가져본 적이 없는 것처럼 깨끗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동기들이나 선후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그들은 그들의 궤도로 바쁘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속에 끼어들기가 두려웠다“(p.22).
‘나’ 뿐만 아니라 M, J 모두 불안하다.
M : ““근데 나는 남들 하는 만큼 하기도 버거워. 나는 여태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하면서 살아왔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닌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어. 어릴 적부터 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고, 학급임원도 도맡아하고, 이런저런 대회에서 상도 꽤 여러번 탔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했어. 잘난 척이 아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어. 단 한번도, 그 이상을 원해본 적 없어.”(p.103)
J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않았다. 치명적인 시력 때문에 군대도 가지 않았다. 공익근무를 할 때도 여전히 야간에는 편의점에서 일했다. 말하자면 거의 칠년째 쉬지 않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무감이나 성실함과는 전혀 관계없었다. 그는 단지 이 일을 좋아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pp.30-31).
소설 안의 모든 인물들은 흔들린다. ‘나’는 버스만 타면 땀이 흥건할 정도로 꽉잡아야 할 정도로 흔들리고, M은 계속 자신의 자아와 이루지 못함 때문에 흔들리고, J는 아예 온전하게 서 있기를 포기했다. ‘물고기’는 서 있는 세상을 비웃는다.
하지만 소설 속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동정하길 바라지 않는다. 거기에서 낙관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늘 균형을 잡지 못했던 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고. 그저 가끔씩,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이 흔들려야만 하는 그런 시기가 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일정한 주기를 타고, 리듬을 타고 반복되는 걸지도 모른다고“(p.167). “나는 줄곧 아무것도 하지 않아왔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살고 있다거나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부끄럽다“(p.44). 그나마 ‘구루’처럼 달관하듯 말해주는 사장이 이 소설의 가장 ‘꼰대’이지만 그는 오히려 소설속 청춘들에게 개입하지 않기에 ‘친구’가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물고기와 J가 모처럼만에 떠났을 때 사고가 나는 일은, 지배적인 시선으로 ‘세태에 대한 풍자’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빈곤으로 인한 사망’으로 느껴지고 비극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읽을 때 J의 죽음과 물고기의 죽음은 너무나 전형적인 것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난 거기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난 외려 그 일상들, 늘어진 히키코모리 같은 삶이 그네들에게 안정감을 그나마 주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 ‘잔인한’ 세상이 보여주는 공격이라는 생각이다. 자본주의가 ‘자기계발하는 신체’를 만들거나 ‘돈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주는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J와 물고기의 ‘여행 시도-탈주’는 분명 그네들이 꿈꾸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는 뭔가 그들에게 섣불리 ‘햇볕’을 비추는 행위가 얼마나 가당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20대의 무기력에 대해 단순히 ‘고용 문제’를 해결하면 될 거라고 믿는 순박함이 그렇다. 그들의 ‘감수성’이 버거워하고 있는 지점과 달리 ‘위안받고 있는 지점’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론이 계속 책에서 ‘감수성’의 문제, ‘비관주의’의 문제를 걷어낼 수 없었던 이유,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우석훈이 ‘파토스’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20대 전반전』의 저자들이 ’88만원 세대’론을 공박하는 이유. 이것들이 첨예하게 맞물리는 지점이다. 뭐 ‘알아달라’라고 이야기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시선은 어처구니가 없다.
게다가 20대를 하나의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는 편견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소설은 잘 말 한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고 어느 밴드는 노래했지만, 습관의 종류는 인간의 염색체 배열만큼이나 복잡다양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좀더 무서워지기도 한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서만도 하루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습관대로 담배를 사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소프트팩을 사고 누군가는 하드팩을 산다. 누군가는 올 때마다 라이터를 새로 사고, 누군가는 갈 때마다 거스름돈을 두고 간다“(p.71). 세상에 개기지 않고 ‘레종’을 사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 “당신이 이 도시생활 속에서 여전히 야성을 간직하고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신이 레종을 피워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의 심장이 살아서 꿈틀대는 숲속의 깊은 밤이나, 생고기가 입안에서 씹히는 질감 따위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왕국이 흘러나올 때 자신도 모르게 당신의 심장이 두근거린다면. 당신에게는 레종이 적당하다“(p.108). 담배 한 개비의 ‘쐐한’ 시간을 ‘스펙 쌓기’ 바깥의 인간들은 그나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쌩까고 있기 때문에 안 보일 따름 아닐까. 또한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88만원 세대’로 묶는 것의 불가능성. 게다가 같은 돈을 받더라도 그것에 대한 삶의 태도들의 다양성들. 이제 20대의 이야기들이 다채로워진다. 아니 ’20대’라는 말로 똑같이 묶을 수 없게 되었다. ’20대’를 말하지 않음으로 바야흐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그것을 통해 다시 ’20대’의 문제를 건드릴 수 있다는 이야기. 문진영의 소설도 그런 기여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문투가 날 잡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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