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에서 빌 게이츠로, 단병호에서 이랜드 아줌마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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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01827&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A> – <IMG border=0 alt=8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리차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문예출판사</TD>
<IMG border=0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31001827_1.gif">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1. 록펠러에서 빌게이츠로, 단병호에서 이랜드 아줌마들로</SPAN>

<P class=바탕글>신자유주의 체제의 노동관계와 그 이전의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관계는 어떤 차이를 갖게 되는가? 먼저 포스트 포디즘, 후기 자본주의 이전의, 즉 신자유주의 이전의 경제체제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을 떠올려 보면 된다.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어둠 속에서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다 잘라!”하고 음습한 소리를 낼 것 같은 악당의 모습이 고전적인 자본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가는, 혹은 CEO들의 형상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더벅머리에 히피 같은 인상으로 청바지와 니트 티를 입은 채 일에 몰두하고 다른 세상일에 대한 관록 따위는 없을 것 같은, IT 버블 이전의 ‘실리콘 밸리’의 전문가 집단이 현재의 자본가의 모습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관록 있어 보임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가는 늘 능숙하게 ‘변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SPAN></SPAN></P>

<P class=바탕글>노동자의 모습은 어떨까? 전형적인 모습으로 전통적인 산업경제의 노동자 형상으로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우직한 표정과 힘줄이 돋보일 것 같은 팔뚝. 근육노동자의 모습과 뒤에 머리띠를 두르고 “단결투쟁”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은 노동조합원들의 파업대오가 떠오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의 노동자상을 전형적으로 대변하는 이미지는 다르다. 2007년 파업을 했던 이랜드 홈에버 아줌마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KTX 여승무원들의 노동조합도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교대 근무에 파트타임, 비정규직이고 2년 계약 이전에 잘려야 하며 ‘유연성’이라는 말과 ‘정리해고’, ‘감원’이라는 말과 연동이 되어있으며 ‘Feminization’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실감나게 해준다. 예시되지 않은 남성노동자들도 점차 그러한 조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여전히 ‘민주노조 운동’의 카르텔이 깨지지 않은 11%의 노동자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2. 조직과 노동 조건의 변화</SPAN></P>

<P class=바탕글>리처드 세넷은 지금 신자유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리를 세 가지로 집약하여 설명한다. 1)조직의 비연속적 개혁, 2)생산의 유연 전문화, 3)중앙 집중이 없는 힘의 결집(p.62)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조직의 ‘개혁’은 상시적이 되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문제제기 이전에 삼성 그룹을 가장 강하게 견인하던 부서는 바로 ‘구조조정본부’였다는 바는 상징하는 바가 크다.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늘 강조되는 것은 바로 역동성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라는 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한 편에서 앨빈 토플러의 언어를 따 온 ‘adhocracy’. 즉 관료적 조직이 아닌 일이 있을 때 팀 단위로 대응하는 능동적 조직에 대한 담론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P>

<P class=바탕글>세넷의 책에 나오는 엔리코와 리코의 부자간에 존재하는 세대 차이는 그러한 노동 체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리코는 이러한 3가지의 신자유주의적 원리들을 몸으로 느끼면서 ‘일 경험’을 한 것이다. 그리스 노동자들이 일했던 빵집에서의 노동경험과 그들이 퇴직하고 난 후의 빵집의 노동경험의 차이는 지금의 노동이 ‘질적’으로 얼마나 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빵사들은 빵 재료나 반죽에 손가락 하나 댈 필요가 없으며, 모든 제빵 과정이, 예를 들어 오븐의 온도나 굽는 시간을 결정하려면 그에 관한 데이터를 뽑아 빵 색깔대로 만들어놓은 아이콘들을 모니터에서 고르고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었다. (……)제빵사들은 더 이상 실제로 빵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p.93) “근로자들이 실제 빵 제조 과정에서 기술적 무능함을 드러낼 때마다, 그는 현실을 수동적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p.95) 빵집에서 일하는 제빵사가 기계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게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유연 전문화’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P>

<P class=바탕글>또 다른 한 편에서유연한 스케줄들이 도입된다. “근무 시간 자유 선택 근로자는 자신이 일하는 장소는 자유롭게 관리하지만, 작업 진행 자체에 대한 통제 권한은 없다. 즉 근로자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직접 대면에 의한 감시에서 전자적 감시로 바뀌고 있다“(p.79). McDowell의 논의가 보여주는 것이 일터가 레저의 공간과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면, 세넷은 재택근무 체제는 집과 일터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3. 리스크 – 변화의 시대</SPAN></P>

<P class=바탕글>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디드로의 노동에 대한 관점과 애덤 스미스의 노동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지 노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디드로는 다시 예술에 비유해서 노동자들이 작업 과정의 각 단계를 조작 · 변경하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제지 노동의 일상도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확신했다.” 중요한 것은 ‘일의 리듬‘, ‘정신과 신체의 조화‘(p.44)이다.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노동조합이 ‘라인 속도’를 자본과 결정하던 시절에는 이러한 디드로가 말하는 방식의 노동이 진행되었다. 단순 노동을 한다고 바보가 된다는 생각이 스미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것이 옳을까.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은 다시금 던져져야 한다. 관료주의가 마냥 더 ‘비민주적’이라는 생각도 이제는 의문에 붙여져야 한다.</P>

<P class=바탕글>술집 트라우트를 운영하던 로즈의 경험은 현재의 ‘유연한 노동’의 방식들이 인간성과 어떤 관계들을 맺고 어떤 위기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진정 성공적인 사람은 문젯거리를 다른 동료들에게 떠넘기고 그 골칫거리로부터 잘 피해 다니는 사람일 거라고 했다”(p.109). 이제 성실성은 우월한 인간성-성향이 아니다. 로즈는 “축적된 경험은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p.111).</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유연한 체계의 불완전성은 근로자들로 하여금 ‘분갈이’, 즉 일에 대해 모험을 감행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p.112). 계속 불안하게 만들고 그러한 상황에서의 ‘변화’들에 대해서 예찬한다. 그리고 슘페터적 ‘창조적 파괴’라는 언설은 소수의 자본가들과 CEO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노동자들 자신의 언어로 이식된다. 마치 이는 알튀세의 ‘호명’의 효과와 같다. “능동적 대응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실생활에서 모험을 감행하도록 압박한다. (……) 많은 사람들은 대가를 얻을 가능성이 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 등장한 시장 여건상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p.125) 매일의 도박이 벌어지고 꿋꿋이 ‘경험’을 쌓는 노동자는 비난을 당한다. 계속 ‘모험’을 진행할 따름이다.</SPAN></P>

<P class=바탕글>이러한 노동 윤리가 적당한 경우는 물론 존재한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다보스 포럼의 사람들이 그렇다. “다보스 회의장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것처럼 평정을 유지했다. 만약 평범한 개인이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을 활용하려고 했다가는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해 자칫 유배자가 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네트워크의 불연속성은 개인의 의식에서 불안정성을 가져온다. 또 그들은 이동 중에 길을 잃기 쉽다.”(p.120) 남는 것은 ‘모험’의 판타지뿐이다. 그리고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자기 계발’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불안’들이 계속 노동자들을 짓누른다. IBM 해고 노동자들의 자기 서사가 처음 ‘음모론’으로, 그 다음이 ‘인종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이 ‘자기 경력관리’의 문제로 완결되는 것이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푸념’하는 것이다.</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4. 덫 – 팀워크 체제와 피상적 인간관계</SPAN></P>

<P class=바탕글>사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에게 강권되고 또 다른 한 편에서 수동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수용되는 ‘자기 경영’의 논리는 한 편으로는 근대적 ‘주체’의 논리와 같다. ‘독립적 주체’에 대한 선언들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에 대한 것들을 무능한 것으로 비난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빌 언덕’에 대한 요청들은 해체되고 개별적 주체들의 경합의 장만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상층 계급의 ‘상호 의존’ 혹은 카르텔이 깨져본 적은 없다. ‘개별화된 주체’에 대한 호명은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수행되었을 따름이다. 대기업들의 아웃소싱의 구조나, 더 강력해진 경영자의 권한 등은 세넷이 언급한 세 가지 원리 중 세 번째인 ‘중앙 집중이 없는 결집’의 내용을 잘 드러내고 ‘팀제’ 조직이라는 것으로 장된 ‘수평적 조직’이라는 말의 허상을 공격한다. “오히려 자기 보호적이었고, 서로를 질책하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며칠 뒤 보드카 팀은 해체되지 않고 또 다른 프로젝트로 그대로 옮겨갔다.”(p.155) 남는 것은 ‘경쟁’의 격화뿐이다. “현대의 경영자들 역시 개인들끼리 물고 물리는 식의 치열한 경쟁이 한 그룹의 작업 수행 능력을 침몰시킬 수도 있음을 안다. 그래서 작업 중에 팀 내의 근로자들끼리 서로 진정으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허구가 생겨났다.”(p.160) 게다가 서로 믿지 못한다. 이는 기업에 있어서도 ‘덫’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의존성에 대한 수치심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상호 신뢰와 책임감을 손상시키고, 따라서 사회적 결속력이 약해져 집단인 기업체의 업무 활동을 위협한다.”(p.205) </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5. 덫에서 빠져 나오기 – ‘우리’와 ‘우리’ 안의 차이</SPAN></P>

<P class=바탕글>세넷은 결론부에서 자본의 ‘지리적 한계’에 대해서 지적한다. “경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장소에 무관하지 않다는 징후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 동남아시아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유연한 노동 시장에서도 지역적 · 사회적 · 문화적 지리 여건이 투자 결정을 위해 무척 중요시된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장소가 힘을 가지게 되어, 신경제는 그에 따라 제한받는 것 같다.”(p.199) 그리고 대안을 구성함에 있어서 ‘우리’를 손쉽게 나타내는 태도에 대한 경계를 말한다. “‘우리’는 이제 좀 더 대규모로 한 나라에, 혹은 그 내적 갈등의 역사에 여러 민족성들이 잘못 맞춰진 조립품을 은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가공되고 의심스러운 ‘우리’가 다시 생명력을 되찾고 있다.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정력적인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 신경제로부터 도피하기보다는 신경제에 저항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인격적 관계를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p.202) 공동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으로 인한 시간의 단절, 사회 조직의 해체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 차이를 팀워크라는 피상적인 협력보다는 개개인의 의견 표현과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만 한다.”(p.210)</P>

<P class=바탕글>이러한 ‘의견 표현’과 ‘협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동시에 구체제에 대한 ‘향수’, 이를테면 획일적이었던 압축적 근대화의 표상인 박정희를 소환하는 한국의 태도 등에 대한 경계와, 새로운 대안들을 조직함에 있어서 ‘차이들’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지점을 제공한다. 다만 세넷의 결론부에서 ‘개인들의 심리적 필요’를 통해서 체제의 변화를 말한 부분은 느슨해 보인다. 그 ‘필요’들을 조직하는 문제는 다시금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의견 표현’과 ‘협상’을 뛰어넘는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동시에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로벌 맥락에서의 ‘글로벌 계급’으로서의 젠더 분화 등에 대한 언어는 특별하게 없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함께 설명할 수 있을까. 세넷은 남성들에게도 ‘유연성의 체계’가 작동한다고 주장했는데 여전히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영역에서 ‘결정권자’는 남성-백인-선진국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잔존한 ‘근대적 양상’에 불과한 것일까? 의문점이 남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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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그리고 번역자는 ‘조용’이라는 한 사람으로 되어있는데 내가 보기에 한 사람이 번역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근로자’와 ‘노동자’가 오락가락 할 때 그 맥락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통일이 안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근로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세넷의 책을 번역한다는 게 짜증나기는 했다.</P>

<P class=바탕글>세넷의 책을 읽고나서 하비의 책과 세넷의 책을 비교하면서 좀 읽으면 좋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하비의 <신자유주의>를 읽을 계획인데 뭔가 또 새로운 게 보이겠지. 세넷의 책에서는 ‘산업사회학’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들을 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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