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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밀에게 벤델 말고 다른 친구가 있을 수는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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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 –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지음, 배인섭 옮김, 채기수 그림/아롬주니어 |
이건 동화이지만, 동화가 아니다. 처음에는 김현경의 강의에서 애들 읽는 동화를 왜 읽나 하긴 했다.
여기에는 현대의 ‘배제당하는 이들’, ‘환대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가 담겨있다. 생각해보면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슐레밀은 원래 존재감이 없었다. 소개를 받아 찾아간 상류 귀족의 자리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에게 사람들은 ‘최소한의 에티켓’ 수준으로 대답했을 뿐 그에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에게도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는 계속 해서 귀족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는 않았다.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와 슐레밀이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존재감이 없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반드시 계급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관계’라는 것들, ‘준거’라는 것들이 없이는 ‘사람-인정’이 불가능하다. 레비나스가 구태여 근대적 주체를 ‘타자’를 통해서 읽어내는 시도들은 그러한 점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슐레밀은 그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를 자신의 ‘비천함’을 통해 해석하고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와 ‘거래’를 한다. 김현경의 지적처럼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만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림자 따위는 팔아버려도 ‘돈’만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슐레밀이 부딪힌 문제는 더 복합적인 것이었다. 페터 슐레밀을 시찰을 나온 ‘왕’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백작’ 정도의 칭호는 손쉬운 것이었다. 그의 끝없는 ‘과시 소비’는 페터 슐레밀로 하여금 뿌듯함을 주기도 했고 사랑하는 ‘미나’와의 로맨스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햇빛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그림자 없음’이 발각되는 순간에 경험되었던 ‘사람-불인정’의 경험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부’를 통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질수록 불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날 것 그대로의 그의 존재로는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마치 이는 성서의 구약에 나오는 많은 ‘죄인’들이 여호와를 바라보지 못하는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어둠의 세계’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지금을 말하고 있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슐레밀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하인 라스칼은 슐레밀의 돈을 유용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동시에 슐레밀의 ‘비밀’을 추궁한다. 그리고 슐레밀이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인정’의 권리들을 빼앗으려 한다. 사랑했던 미나를 빼앗는 것이 그 정점에 있었다.
슐레밀은 파멸한다. 회색 옷을 입은 사내를 만나서 ‘그림자’와 ‘영혼’의 거래를 제안받을 때 이미 미나를 빼앗기기 직전이었고, ‘영혼’의 무게를 재고 있으면서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미나는 이미 결혼해 버린다. 그에게 우연찮게 주어진 ‘투명 망토’와 ‘투명 모자’들은 다시금 잠시나마의 위안을 주지만, 그에게 거래를 제안해오는 회색 옷의 사내는 그의 곁을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계속 슐레밀의 곁에 있다. 거래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마지막 결투’를 외치는 슐레밀에게 회색 옷의 사내는 주머니를 흔들면 언제든 나타나겠다고 말한다. 이 순간에 슐레밀이 주머니를 집어던지는 것은 회색 옷을 입은 사내의 ‘야바위’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사람’으로서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슐레밀에게 주어진 상황들은 너무나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혹은 ‘선택’의 문제였을까.
벤델과의 우정은 사실 그러한 ‘그림자’나 ‘그림자’를 판 대가로 얻게 된 ‘황금’과 상관없이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상황은 사실 늘 가능했다.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의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예들을 예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영화 「구글 베이비」가 보여주는 상황이 얼마나 끔직한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적당해 보인다. 오히려 질문은 ‘잘못된 선택’(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의 메피스토텔레스와의 계약 같은) 혹은 너무나 당연한 ‘필연’ 혹은 ‘운명론’의 문제로 환원되어선 안 된다.
‘사람됨’이라고 말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잃게 된 사람’. 마치 『호모 사케르』의 헐벗은 생명. 돈도 없고 권력의 바깥으로 내쳐진 ‘예외상태’의 사람. 그들은 ‘인간’인가? 혹은 아감벤의 말처럼 ‘동물’의 상태인 가? 사실은 이 부분에서 다시금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왔던 말을 상기해볼 수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그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 하에서만 노예가 된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밀고가 볼 수도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누군가는 아무 것도 없는 누군가일 따름이다.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서만 그는 사회적으로 배제 당한다.” 2008년 <문화와 경제=""> 워크샵에서 이진경이 강의에서 말했던 바가 생각이 난다. “그를 짐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질문을 해 봐야 한다. 그렇다면 짐승은 그렇게 막 다뤄도 되는가?” ‘사람됨’이라는 말을 구태여 ‘짐승’의 문제까지 내려서 생각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특정한 사회적 관계’(이를 ‘근대’라고 말할 수 있을 법 하다)에서만 그들은 내쳐지고 배제당하고 만다. 문제는 그 ‘특정한 사회적 관계’, 좀 더 넓게 보면 우리의 습속들과 사람에 대해 판단해왔던 그 기준들의 문제가 아닐까.</span></span>
김현경의 강의 중에 나왔던 ‘환대’라는 말의 반대가 ‘전쟁’이라는 말에 굉장히 공감이 되었다. 공동체들은 늘 ‘공동체의 일원일 수 없는 것들’ 즉 ‘희생자’를 만들어가면서 공동체의 유지를 진행해 왔다. 게토들이 만들어졌고, 자본의 교환가치를 준거로 세워진 근대적 체제들은 기존의 ‘희생자’들을 푸코의 말마따나 ‘감금’하면서 시작할 수 있었고 또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몫 없는 자들’을 양산해가면서 유지했다. 그 배제된 모든 이들은 마치 ‘비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당했다. 지금 구성되어야 할 ‘환대’는 데리다의 말마따나 먼저 ‘묻지 말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의 상황을 묻지 말아야 하며 일단 환대하는 것. 김현경의 ‘환대’는 ‘성원권’의 형태로 수행적 발화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난 그 부분에서 여전히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 즉 묻지 않고 ‘환대’하는 것의 필요성을 여전히 버리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절대적 환대’라는 준거가 사라졌을 때 ‘전쟁’은 늘 ‘구성되는 것’에 대한 ‘수행적인 전쟁’의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원권’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 ‘성원권’ 자체를 근대적 ‘권리’ 개념에 묶여진 구속복을 벗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탓일까?
마지막으로 슐레밀에게 주어졌던 모든 상황들이 사실은 ‘연극적’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연극’이 만들어내는 횡포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결국 그 ‘연극’을 늘 만들고 있는 ‘사회’, ‘공동체’. 다시금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라는 말들을 곱씹게 된다. ‘몫 없는 자들의 시공간’이라는 랑시에르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근대를 ‘장례’ 치러주고 새로운 ‘근대 바깥의 공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슐레밀에게 벤델 말고 한 명의 친구만 더 끝까지 ‘믿어 주었다면’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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