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지금의 좌파 이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 |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 이택광 지음/글항아리 |
올 초, 이택광의 블로그를 통해서 이 책의 준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듣고 있는 수업과 맞물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이택광이 대학원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문화연구 입문="">이다. ‘문화연구’라는 학문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계보학이 펼쳐지고 있다. 맑스/아도르노/루카치를 한꺼번에 속도감있게 개괄하고, 롤랑 바르트를 읽다가 스튜어트 홀로 가고, 그 이후에 알튀세를 읽고 지젝과 헤겔 라깡을 버무린 다음 프레드릭 제임슨을 읽은 후 랑시에르와 푸코 바디우 데리다를 읽는다. 한 명 한 명을 다루려 해도 한 학기가 걸릴 것 같은 인물들을 순식간에 꿰고 있는 것이다. </p>
사실 ‘팀 티칭’이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 작업을 이택광이 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이 ‘전지전능’하다는 소리를 할 계획은 아니다. 종종 그가 강조하는 ‘독자’로서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그의 입장과 충돌하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해 타협이 꼭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이론(가)들이 잘 꿰어져 하나의 서사로 나온다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적 차원’과 알튀세가 만나는 지점. 어떤 지점에서 바디우와 랑시에르가 만날 수 있는지. 지금 맑스주의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 논쟁적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나름대로의 ‘독자 이택광’으로서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늘 똑같은 말을 다른 말로 말할 수 있는 ‘능력자’ 지젝보다 외려 이택광의 화법은 굉장히 일관되다고 말할 수 있다.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이전의 책들은 ‘비평’의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었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와 『무례한 복음』 등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그가 읽어내는 ‘라깡주의’라는 바탕과 ‘맑스주의’의 관점 그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 그의 독특한 분석 그 자체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들을 구성하는 ‘이론’들에 대한 이택광식 해법은 이 책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택광의 블로그에는 종종 이론적 관심들이 정리되어 있는 글들이 올라오지만 하나의 개념상자같이 ‘구성된’ 이 책의 가치는 나름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왜 들뢰즈와 가따리, 네그리와 하트, 데리다, 푸코 등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며 도대체 그 맥락은 무엇인지를 알고 싶을 때 이 책은 친절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랑시에르와 바디우, 지젝과 발리바르가 21세기의 벽두에 왜 좌파 지식인들의 ‘아이돌’이 되었는지도 이 책은 잘 이해하게 해준다. “지금 문제는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재정위하는 것이다. 이론을 이론에 머물게 하는 자기 지시적 수용 방식에서 이론은 무기력증을 키워왔다. 문제는 이론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바로 이론을 수용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이론은 수용 자체에서 문제의식을 새롭게 생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p.94)
다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지성주의적’인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넘어야 할 산이 좀 있다. 원래 ‘인문학 오타쿠’가 아닌 이상 최소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 맑스주의 정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이택광은 첨단 이론가들에 대한 ‘최대한’의 설명을 했지만, 그것들을 들뢰즈가 제안했던 ‘감응적 글읽기’로 읽기에 이 책은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게 만든다. 감으로 때리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이론가들에 대한 이택광의 해석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에 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몇 가지 읽다가 걸리는 부분만 좀 살펴볼 수는 있겠다.
“중요한 것은 이 여성운동과 함께 진행되었던 가부장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탈물신화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가부장제를 이용하는 것은 남성들 자신이다. (……) 그러므로 여성운동가들에게 가부장제는 실질적인 적이 아니다. 문제는 가부장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이미지를 통해 현실 모순을 해결하려고 드는 남성들의 판타지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판타지는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 문제라는 새로운 차원을 드러낸다.“(pp.37-38)
난 발생론적인 역설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가부장제가 먼저인지 ‘가부장제의 이미지’가 먼저인지. 하지만 맑스가 했던 말을 하나 떠올리고 싶은 것이 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산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가부장제를 청산하려는 노력으로 일원화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힘들(전근대적 힘을 포함한)이 있고 이는 글로벌 맥락과도 결합하여 다양한 방식의 가부장제를 양산하고 있다. 이를 ‘실재’의 문제라고 말하면 이택광의 덫에 걸리겠지만, ‘현실성’의 문제라고는 최소한 말할 수는 있겠다. 가부장제의 ‘재현’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자들은 공격하지만 동시에 ‘실질적인 적’으로서의 가부장제도 존재하며 현장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부장제가 잔존 혹은 아직 소멸되지 않은 쇠락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실질적인 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실질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환’은 엥겔스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더욱더 강화되고 있는 것 같다. 차라리 ‘틈새’를 말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더 유리한 입장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이 그나마 드러나는 문제들 말고 더 깊은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기에 난 힘이 부친다. 아이추판다처럼 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관심사는 아니다. 내가 보려했던 것은 현대정치철학들의 담론의 지도였고, 내 구체적인 독서의 목적은 관심을 끌만한 주제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하나의 ‘가이드’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 주었다. 현장에서의 실천장에서 구성되는 ‘감응적’ 이론을 벼리기 위해서는 더 가야할 길이 많겠지만.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