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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화된 근대성, 젠더,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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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 ![]() 문승숙 지음, 이현정 옮김/또하나의문화 |
군대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를 찾자고 하다가 계속 헛물만 켜고 있었다. 이를테면 ‘군대의 사회학’류의 저술은 읽다가 그냥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국방부 용역을 받았거나, 아니면 군대에 대한 회고를 늘어놓으려는 류의 ‘아저씨’ 학자들의 연구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읽으려고 하는바를 찾지 못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사 제대로 된 책 한권을 발견했다. 사실 이 책을 처음부터 ‘제목’은 알고 있었으나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똑같은 전제로 똑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만 같다는 ‘선입견’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문승숙의 논의는 ‘군대’를 가지고 근대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박노자의 『씩씩한 남자만들기』나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의 논의와 궤를 같이하는 것 같지만 사실 다르다. 박노자는 근대성의 기원을 읽어내는 방식이 전형적인 ‘계보학’적 방식이고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갑자기 비약적인 점핑을 하는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점핑하는 약점을 가졌다. 쉽게 설명하면 도대체 어떤 요인들이 남성들의 신체가 그렇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구체성’이 떨어진다. 민중들이 어떻게 저항했고 그들이 어떻게 ‘군사화된 신체’가 되어있는지를 도대체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대립하는 성별인 여성과의 분석이 박노자에게는 없다. 권인숙의 논의는 ‘비분강개’로 가고 자꾸만 ‘군사주의’와 연류된 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감정선이 드러나는 논의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역사성의 ‘구체성’이 별로 없다.
문승숙의 논의의 탁월함은 푸코에 대한 대안적 해석(어쩌면 이는 맑스가 <자본>에서 취했던 자세와 비슷하다.)을 가지고 ‘군사적 근대화’를 읽어내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주민들을 국가의 유용하고 순종적인 구성원을 만들 때 훈육과 물리력을 혼합하는 것은
남한의 군사화된 근대성이 푸코의 근대성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푸코의 근대성은 훈육 권력이 커지고 물리력은 점차 줄어드는 것이다.
(……) 예전에는 군대가 “개인의 신체에 대한 통제와 훈련으로부터 아주 복잡한 여러 집단의 특수한 힘을 이용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을 학교, 공장, 병원, 감옥 같은 근대 훈육 기관에 빌려 주었지만 이제 그것은 군대 내부 정치에서만
나타나게 되었다“(p.51). 요컨대 ‘합리화’로만 근대성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폭력'(알튀세의 억압적 국가기구처럼)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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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리고 이러한 문승숙의 개념정의는 단순히 ‘분석 스타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성을 통해 증명된다. “군사화된 근대성의 핵심 요소는 공산주의자 타자와 싸우는 반공주의 자아로서 한국을 구성하는 것, 훈육과
물리력으로 반공 국가의 구성원을 만드는 것, 산업화 경제를 군 복무와 결합시키는 것이다“(p.46).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예는 다음과 같다. “1970년대는 총력안보와 총화 단결 이념 아래 전쟁 준비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던 사회적 군사화가
두드러지는 시대였다. 사회의 모든 부문이 몇 가지 방식으로 전쟁 주니에 끌어 넣어졌다. 1971년부터 민방위 훈련이 실시되어,
주민들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민방위 훈련에 참가해야 했다“(p.61). “(1975년 만들어진) 방위세는 199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율곡 사업이라는 명목의 군비 증강에 쓰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국민 총생산의 약 2%를 차지한 이것은 군대 현대화를 위한 주요 자금원이었다“(p.62).
가장 중요한 문승숙의 문제제기는 지금까지 ‘근대화’와 ‘군사주의’를 줄기차게 말하면서도 실제로 그것들이 어떻게 ‘경제개발’과 결합했는지에 대한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문승숙의 대답은 병역과 노동시장의 통합이다. “국민 개병제는 한국 여성주의자들의 관심도, 한국의 정치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지만,
성별에 따라 노동 시장을 분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병역 의무자들을 중화학 공업에 배치하는 것을 제도화한 것은 1973년에
제정한 병역 특례법이었다“(p.87).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국가가 훈련한 노동자들 대다수는 대체 복무로 병역을
마쳤다. 즉 정부가 병역의 대안으로 활용할 수 있게끔 해둔 분야로 들어갔다. 공공 직업 훈련소에서 훈련 받은 남성 노동자 수는
1980년대에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p.94). “군사화 경제의 큰 틀 안에서 병역 의무자를 반숙련 또는 숙련노동자로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남성의 병역
의무를 순순히 마친 사람들에 대한 보상으로 쓰인 반면, 병역 기피는 고용 기회 박탈로 처벌받았다. (……) 병역에 대한
이와 같은 보상은 군사화된 경제의 핵심 요소였는데 그러한 경제 체제에서 병역은 경력으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병역필은 곧 더 많은
급여, 빠른 승진, 공무원 시험의 가산점을 의미했다“(p.101). 1973년은 굉장히 특기할 만 한 해이다. 병역법 위반자 처벌에 대한 특별법이 생겼고(p.83), 동시에 특례법이 생긴 것이다. 그 결과 “1973년 이후 병역 기피자 수가 대폭 줄었고 계속 적은 수로 유지되었다“(p.83).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중반부까지 ‘군사화’는 진행되었지만 그것 자체가 삐걱대고 있었고, 고도 성장을 위한 ‘중공업화’를 추진하려 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군사화’와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엄밀하게 남성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법안 두 가지는 산업과 군대를 편입한 ‘군사화된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얼르고 뺨치고. 이는 처음 언급했던 ‘훈육’과 ‘물리력’의 결합에다가 ‘성별화된’ 포섭 전략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 준다. 정부 당국의 자화자찬은 이러한 전략의 성공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군은 근대화에 두 가지 공헌을 하였다. 첫째, 경제 개발에 있어서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
개발 인력 자원을 배출하였고, 둘째, 산업화, 도시화에 필요한 기술 자원과 정신력을 육성하였으며, 이는 다시 직업 기술 교육과
훈련 및 행정적인 관리 기법에 관하여 교육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반적인 교육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p.89에서 재인용).
이러한 ‘군사화된 근대화’의 효과에는 어떤 ‘배제’들이 있었을까? ‘여성’의 배제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까지 ‘산업 역군’이 누구였을까? 바로 ‘여공’들이었다. 여성 노동자들. 경공업 중심의 경제개발 전략을 쓰던 한국에서 미혼 여성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통해서 이윤을 축적하게 해주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군사화된 근대화’는 중공업과 병역이 결합된 형태의 가부장적 형태의 발전과 맞물려 있었다. 국가가 지원하는 직업교육, 사기업의 직업 교육 등등은 남성의 ‘병역 특례’를 위한 자격증 취득 전략과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교육 내용들은 ‘중공업’의 ‘기술자’를 양성하는 식으로 재편되었다. 여성 노동자의 자리가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성 직군’과 ‘남성 직군’의 분리라는 것도 이 시점부터 절묘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분노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상태’는 드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들의 노동 상태가 호전되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공장 바깥으로 쫓겨나거나 서비스 산업으로 진출하거나 ‘가정 주부’로 소환되기 때문이었다. ‘가족 계획’과 ‘합리적 가족 경영’에 대한 담론 분석들은 이 양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성노동자들에게 가르치는 교육들이 ‘가정에서의 주부로서의 역할’ 교육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문승숙의 논의들은 그러한 한국의 자본주의와 ‘근대성’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젠더 위계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담론’의 형태를 통해서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선, 모든 종류의 자료를 다 짚는 것만 같은 꼼꼼함은 그녀의 주장에 신빙성을 갖게 한다. 또 이어서 제기되는 ‘양극화’와 병역의 문제에 대한 부분은 특기할 만 하다. “한국국방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징집 대상자 중 절반이 약간 넘는 수가 현역으로
복무한다. 모든 남자가 군대에 가야 한다는 개병제의 실상이 하층 계급 남자들 중에서 적합한 신체와 교육 수준을 갖춘 이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고 지배 집단 중 대다수는 면제받거나 보충역으로 복무하는 것일 때에는, 군대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인다 해도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은, 더구나 탈냉전 시대의 민주화 체제에서, 군대나 국가가 젊은 남자에게 ‘남성의 국민 의무’를
이행하라고 설득하기는 어렵게 만든다 “(pp.183-184). 단순히 ‘군가산점제’ 등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단순한 ‘성별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이고 게다가 ‘국민개병제’를 유지하는 한국에서 첨예하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던질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녀는 잘 보여준다. “지배 담론에서 병역을 남성의 국민 의무로 구성할 때 남성은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되지만, 병역 배제와
면제 범주를 자세히 보면 남성들 사이의 위계가 계급, 지위, 성적 지향, 인종 등에 따라 정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병역 이행은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키는 위계만이 아니라 남성 내부의 위계 또한 만들어 낸다. 그것은 시민의 주체성에서 함의하는
평등의 이상 자체와 모순된다“(pp.179-180).
문승숙의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를 보면서 몇 가지를 느끼는 것은 우선 여성주의적 분석들이 남성들이 구체적으로 군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했던 점들의 문제였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군대에 대한 자료를 다룰 때의 엄밀함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젠더’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를 꺼낼 때, 또 역사적인 분석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굉장히 많은 자극을 주는 책이다. 한국에서 군대와 군사주의, 젠더의 문제를 볼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