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 코뮨 혹은 마을 그리고 약간의 공허함

추방과 탈주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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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16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겪어서 쓴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 낮은산, 2009
2010/04/17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록펠러에서 빌 게이츠로, 단병호에서 이랜드 아줌마들로
2010/05/24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 <연세> 2010 여름</a></p> </td> </tr>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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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읽었던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그리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으면서 처음에 느꼈던 감정은 ‘공포’였다. 근대 권력의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 두거나”라는 통치의 힘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읽으면서 늘 드는 생각은(주로 아감벤의 논의) “그 외부는 그렇다면 불가능한가?”이었다. 책에서 얻는 ‘지식’으로서의 사유를 떠나서도, 종종 마주치는 시민사회단체의 상근 활동가들 혹은 봉사하는 사람들의 ‘평온한 모습’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단순하게 지금 굴러가는 체제를 재생산 하는 데 복무하는 이들로 해석하거나 소극적으로 보더라도 ‘체제에 균열을 주지 못하는 이들’로 해석하는 게 얼마나 온당한가의 문제에 부딪히곤 했다.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를 읽으면서, 또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좀 해법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물론 현재 한국사회에서 부딪히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은 여전히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다. 아감벤의 논의와 흡사해 보이는 ‘마진’의 맥락은 강하게 관철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대중을 주변화 시키고, 한계로 몰아놓고, 방치시키고, 그를 통해 지배계급에게 마진을 준다(pp.24-28).

한미FTA 때 고병권이 걸으면서 얻은 진실은 맑스가 말했던 ‘인클로저 운동’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어떻게 관철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다와 갯벌은 ‘공유수면公有水面’이라고 해서 국가가 소유한다. 원래 ‘공유수면’ 개념의 취지는 ‘소유’보다는 ‘관리’ 쪽에 있었다. 즉 공적인 이용을 위해 국가가 바다나 하천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유수면을 간척하는 순간 국가는 관리자가 아닌 소유자로 나타난다.”(p.29) 신자유주의 국가는 직접 ‘소유자’로 등장하여 대중을 축출했다. 2002년 ‘붉은 악마’가 출몰하던 서울 광장은 사기업에 이용권이 매각되어, 대중은 졸지에 ‘단순 관람자’와 ‘소비자’가 된다. 본원적 축적은 2000년대에도 작동한 것이다. 국가는 팔지 않는 것도 삼으로써 ‘기업을 위한 국가’를 위한 초석을 닦는다. 그리고 적절히 지적되는 것.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주변’ 영역에서 국가권력은 결코 나약하지가 않다. (……)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은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시장을 위한 개입’은 훨씬 더 강화되었다”(p.33).

그러면 고병권은 다시금 ‘혁명의 불가능성’ 혹은 ‘저항의 불가능성’ 또는 ‘지배의 영원한 관철’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고병권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주변화’를 오히려 ‘소수화’로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대중들은 쫓겨나고 주변으로 밀려나지만, 오히려 극한적으로 몰려있는 그들은 ‘개별화’되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있다.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도 ‘앉은 채’로 범법자가 되었다. 그들이 법적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탈주한다는 것’은 이처럼 악착같이 달라붙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권력의 가장 바깥에 위치한다. 그들은 떠나지 않고 머무른다. 그들은 앉은 채로 유목하고 있다”(p.41).

고병권은 신자유주의의 절정기에서 오히려 지배계급의 ‘불안’을 감지한다. “안전보장 담론의 강화는 신자유주의 정부 역시 주변화된 대중들만큼이나 어떤 불안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대중의 불안’에 상응하는 ‘대중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불안을 야기하는 대중’은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바로 그 ‘불안한 대중’이다“(p.63). 랑시에르가 이야기했듯이 몫을 빼앗기고 발언권과 목소리를 빼앗긴 그들이 뭔가를 외칠 때마다 권력은 불안한 것이다. 그들의 ‘소리’가 곧 이어 ‘음성’이 되는 순간에서의 저항들이 가능해진다. 물론 대중에 대한 통치를 위해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치안이 강화되고, 합의와 배제의 복합적인 활용이 존재한다. 촛불에 대한 해석에서 지배계급의 공포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을 벌인 것은 경찰과 청와대였다(소위 명박산성). 누가 바리케이트를 쳤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누가 공격적이고 누가 수세적인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p.83)

그런데 실제로 등장했던 촛불은 2008년, 어떤 의미에서 분명 실패했다. 정부는 대중들의 요구를 듣지 않았고, 그 이후 정부의 촛불에 대한 탄압과 꿋꿋한 치안 통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에 대해 고병권은 “과연 충돌은 피해야 했던 것인가. 충돌이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면 애당초 대중은 거리에 나서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경찰의 잔인한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비폭력적이지만 더욱 공격적인 행동으로 당당히 맞서야 했던 게 아닐까. 대중을 감싸 주는 존재보다 대중 앞에서 뚫어 주는 존재, 아니 대중 옆에서 대중이 되어 함께 당당하게 상황을 타개하는 존재가 6월 말과 7월 초 사이에 필요했던 게 아닐까”(p.101)라고 말하는데. 전적으로 공감했다. 촛불은 그 급진성이 꺾진 순간, 공세가 꺾인 순간 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촛불에 대한 이야기로 ‘대안’을 모두 말하기엔 불충분하기도 하다. 촛불이 어떠한 ‘일시적 자율 공간’ 혹은 ‘해방구’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일상의 정치학’을 통한 저항은 어떤 지점들에서 가능할까? 고병권이 책을 통해서 말한 것은 ‘코뮨주의’이다. 여기에는 ‘우정’이 있다. 수업을 통해서는 ‘마을’과 호환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의 인식은 사실 알고 보면 보이든 보이지 않던 나름의 준거집단을 가진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적합한 인식은 그것과 적합한 코뮨을 구축했을 때만 획득된다. 우리 앎의 과정은 우리가 대상이라고 불렀던 다른 어떤 신체와의 앎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이다”(p.212). 자본주의에 대한 코뮨주의의 해석이 재미있는데 자본주의는 ‘화폐’라는 코뮨에 준거를 둔 세상이란다. 모든 것을 교환가치라는 척도로 환원하는 순간 ‘화폐’의 공동체가 열리고 그 바깥의 가치들은 ‘인식’론에서 ‘진리’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필요한 것은 ‘화폐’라는 척도가 아닌 다른 인식과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코뮨’ 혹은 ‘마을’이 된다. “우리는 우정의 정치학을 꿈꾼다. 우리는 누구와도, 그 어떤 존재와도 친구가 될 생각이다. (……) 위대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먼저 창조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친구를 창조함으로써만 우리의 우정을 이어 간다.”(p.219).

이진경의 ‘코뮨’과 고병권의 ‘코뮨’의 느낌이 내게는 좀 달리 느껴졌다. 그리고 고병권은 계속 코뮨을 유지하기 위해서 ‘발’로 뛰고 있는데. 그의 ‘현장성’이 굉장히 많은 공감을 주었다.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동시에 ‘현장’을 강조하는 그의 한 마디가 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문제는 ‘실천을 위한 이론이었는가’ 혹은 ‘이론이 실천되었는가’가 아니라, ‘이론이 실천인가’에 있다. 그들의 이론이 투쟁하고 있는가. 그들의 이론이 운동하고 있는가?”(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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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 읽고나서 일견의 ‘공허함’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구체적인’ 무어냐는 말이다. 지금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냐. 여기에 ‘현장성’이 있긴 한데. ‘코뮨’의 필요성도 동의가 되지만, 결국은 자꾸만 ‘지금 여기’라는 문제 설정을 댈 때 무기력 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자꾸만 내가 ‘정치경제학’의 논의들과 구체적인 ‘분석’에 더 꽂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분명 이 책은 성찰과 사유의 도구이자 행위의 규준으로 분명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좀 나가서 직접 봐야겠다. 경험해야 겠다.” 이런 말 밖에 남지 않는가? 다른 한 편 ‘정치적’인 것과 ‘정치’를 어떻게 함께 사유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동시에 등장한다. 대문자 ‘정치’에 대해서는 어떤 말들을 할 수 있는가. ‘일상’에서 출몰하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의 다리는 어떻게 놓아야 할까. 이럴 때 하승우처럼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던지는 시도들이 의미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뭔가의 결핍이 계속 느껴지긴 한다. 내가 평온하지 못해서일까? 사실 철학자에게 통찰력 이상의 어떤 뭔가를 요구하는 게 온당한가도 생각해 보긴 해야겠다.

추방과 탈주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