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 <연세> 2010 여름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10점
하승우.유해정 지음/북하우스

2010년 한국에서 산다는 것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좀 더 좁혀 대학생이나 20대로 산다는 것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 ‘불안’, ‘공포’, ‘방치’, ‘쓰레기가 된 삶’. 한동안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통해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비단 한 둘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대학교 학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이미 1년에 천만 원을 넘어설 기세이고, 졸업은 취업을 담보로 못해준다. 인턴, 학점, 교환학생, MBA. 스펙경쟁은 이제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몸도 바뀐 것 같다. 이제는 ‘열 받을 시간’도 점차 없어지는 것 같다. 분노하거나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일류대에 입학한 ‘매니저 엄마’의 아이들은 이미 ‘신자유주의’와 일체감을 갖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에서 이제 확실히 행복이 ‘성적순’임을 깨닫고, 그런 가르침을 주는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니 사랑하지는 않지만, 엄마와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토플 책을 내려놓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어떤 경제학자의 책은 이미 ‘자기계발서’로 읽힌다. 스펙을 ‘제대로’ 쌓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제 ‘인문 스펙’이 화두가 되기까지 한다. 인문학 공부도 ‘빡세게’ 면접에 활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 ‘희망의 인문학’은 ‘CEO의 인문학’이 되어버렸다.

정부의 ‘희망찬’ 비전과 달리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만이 넘친다. 거기에는 계급과 젠더도 없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냉소하는 것일까? 아니면 냉소적이다 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사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 많다. 그럼 도대체 뭘 할 수 있냐고? 하승우와 유해정의 『도시 생활자의 정치 백서』를 읽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낼 수는 있는 것 같다. 그냥 답답하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는 거다.

책의 첫 마디는 ‘일갈’(!)이다. “만일 정치에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라면 세금도 내지 말고 군대도 가지 말라. 열심히 일해서 왜 남 좋은 일을 시키나. 군대 가서 열심히 복무하며 왜 엉뚱한 사람들을 지켜주나? 돈 잃고 몸 버린 뒤에 정치에 관심을 가져봤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이다. 지금 관심을 가지며 참여해야 한다.”(p.25)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도대체 그러면 왜 세금은 내고 군대는 가나? “정치는 지나친 부의 불평등이 사회질서와 규범을 무너뜨리는 걸 막고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맡는”데, 우리가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기업가에게 맡겨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자는 잘못된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 삶이 지금 이 모양이다.”(p.59) 그런데 이쯤 되면 좀 억울하기는 하다. 나름 젊은 사람들로 ‘진보적’인, 혹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것 같은 후보를 찍었던 것도 사실 아닌가?

그런데 잘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 ‘원하는 바’를 그들이 말하긴 했었나? 그냥 ‘새 시대’라는 추상적인 말들이나, ‘기득권 혁파’라는 구호에 넘어갔던 건 아닐까? 그리고 ‘민심’이라는 말을 너무 손쉽게 받아준 건 아닐까?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유독 ‘민심’을 많이 얘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지를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 자기 생각을 곧 민심이라 얘기하면 된다. 그게 왜 민심이냐고 누가 물으면 그는 자신을 찍어준 사람들의 뜻이라고 얘기하면 된다. 누구의 마음인지를 정확하게 얘기할 필요가 없으니 자기 마음대로 얘기하면 민심이 되는 것이다.”(p.77) 이런 야바위를 칠 수가 있는 것도 사실은 대중이 만만해서다. 우리는 좀 더 직접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고, 조금 더 ‘영리’해질 필요가 있는 거다. 사람들이 모두 ‘착해진다’면 세상이 변할까? 잠깐 다시 생각해보자. 노무현의 ‘진정성’을 믿었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신당했는지를 말이다. 단순히 수구 기득권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문제는 ‘참여’를 말했던 정부가 사실상 맘대로 했을 때 ‘영리’한 견제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을 견인했던 힘이 약했던 것 아닐까?

이쯤 되면 굉장히 피곤할 수도 있다.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정치까지 어떻게 계속 신경을 쓰냐고. 그런데 이 말은 절반만 맞다. 이를테면 당장 신문의 1면~4면까지 나오는 ‘정치 기사’에 신경 쓰라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쯤에서 일단 저자인 하승우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나키스트다. 그가 쓴 책들을 떠올려보자면,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난장, 2009), 『아나키즘』(책세상, 2008),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뜨인돌, 2008),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 2006),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학교 출판부, 2004), 등이 있다. 그가 계속 하고 있는 일은 ‘협동조합’의 운동이다. 그는 ‘커다란 정치’(혹은 정치판의 정치)가 당장 우리의 일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일상에서부터 우리가 ‘정치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게 기본적인 그의 생각이다. 아나키스트는 당장 국가를 전복하자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일상의 정치’이 억압받지 않아야 함을 준거로 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아는 내가 이 책에 신뢰를 갖게 되는 건 그가 늘 ‘일상’에서부터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누군가가 노회찬을 지지해서 그냥 그를 찍는다고 당장 노회찬이 당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설령 당선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고 그냥 방치하면 노회찬조차도 이명박처럼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 구체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정치’부터 참여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피곤하거나’, 아무리 해도 안 될 일이 아니다. ‘잉여’에서 조금만 탈피하면 된다. “흔히 정치와 경제, 정치와 생활을 구분해서 생각하지만 이런 삶 속으로 들어가면 생활이 곧 정치가 된다. 예전에는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이 정치혁명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 생활을 바꾸는 것으로도 자본주의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치는 이미 우리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p.213) 정당에 들어가고 당비를 납부하며 정당 안에서의 공직자 선거에 충분히 관심을 갖는 문제도 있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생협이나 여타 협동조합에 가입하고 대형 마트 대신 생협의 매장을,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 대신 의료생협에 참여하는 행위들도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어찌 정치라고 부르지 못하겠는가?”(p.215) 그리고 더 생각을 해 보자면, “지금까지는 큰 정치에 귀를 기울여왔지만 이제는 작고 소소한 정치에도 관심을 좀 가져보자. 따지고 보면 작지도 않다. 웬만한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1천억 원이 넘으니 그중 단 1퍼센트만 제대로 사용해도 우리 삶의 질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p.313)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는 협동조합이 까르푸를 인수해버렸다. 우리는 ‘인수합병M&A’와 ‘정리해고’를 거의 같은 걸로 생각하지만, 이 인수과정에서 고용은 보장되었고, 비정규직은 모두 정규직이 되었다. 이를 단순히 ‘작은 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인식 아래 이 책은 살다가 부딪히는 ‘정치’와의 대면에서 필요한 것들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다른 한 편에서 한 편의 ‘백서’로 혹은 ‘매뉴얼’을 의도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로 한 복판을 돌아다니다가, 불심검문을 받을 때의 요령. 언론사에 제보하는 방법, 도저히 뭔가 궁금할 때 행정기관에 정보공개청구를 하는 방법. 엔지오에 가입하고 회비를 낼 때 세액 공제를 방법 등등을 알 수 있다. 사실 정당들과 정부가 제도로는 보장하지만 시민들에게 잘 알려주지 않는 것들, 아니면 여기저기 펼쳐 놓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방치해놓은 알짜들을 이 책은 잘 모아놓았다.

이 책의 내용들을 읽다가, “당장 내일 모레가 선거인데”(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선거가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혹은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조급증’들이 대중들을 피곤하게 했던 건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동시에 든다. 신자유주의적인 질서가 도입되면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게 무엇이었던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 혹은 ‘공동체’의 부정 아니었던가. 사회와 공동체가 없을 때 개개인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최소한의 비빌 언덕은 ‘가족’만 남게 된다. 가족을 통해서 운영될 때 결국 개별 가족들의 최고의 합리적 전략이 “애들을 공부시켜 출세시키자” 아니었던가. 그 결과가 지금 20대들의 ‘살인적 경쟁’이 아니었을까.

일상의 정치의 활성화 그리고 공동체 정치, 협동조합, 당원으로서의 ‘정당 내부’의 정치는 일견 피곤해보이지만 결국 다른 한 편에서의 ‘완화’를, 비빌 언덕의 제공을 가능하게 된다. ‘숨통’을 틔운다고 할까. 당장 아무 것도 안 될 수 있지만, 최소한 버틸 수 있는 공간들. 이 공간들이 많아지고 거기에서의 ‘정치’가 작동할 때 끔찍함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신자유주의’라는 ‘가상’, 그리고 어이없는 정권의 헛소리를 넘어설 수 있는 공간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아무 것도 못할 것이라는 그 좌절감이다.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10점
하승우.유해정 지음/북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