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치의 경제학과 살림살이의 경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10점
홍기빈 지음/책세상

예전 같았으면 이런 제목의 책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웃. 그리고 ‘경제’라고 말하는 것에 투 아웃. 마지막으로 첵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쓰리 아웃. 다음 회로. 이를테면 나한테 쌔끈한 책은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이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세 개의 아웃이 될만한 요소는 지금 내게는 ‘홍기빈’이라는 이름 석자 앞에서 다 녹아버리는 것 같다. 그의 폴라니 강연을 들으면서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호소 말고 구체적으로 폴라니를 통해 분석하는 경제와 그 담론 체계인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굉장히 호소력이 있었다. </p>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대학교 1학년 <철학의 이해="">(요즘은 이런 강의가 필수가 아니지만)에서나 들을 법한 고담준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경제’라는 것의 관념을 급진적으로 다시 사유하고, 그에 대한 현대 경제학(정확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공리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p>

이를테면 ‘가정경제’와, ‘정치경제학’, 그리고 ‘(순수)경제(학)’이라는 구분으로 나뉘는 경제에 대한 개념화의 역사는 지금의 현대경제학의 가정 역시도 하나의 ‘역사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최종적인 종착점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온다. “이미 니들이 했던 말은 내가 했던 말이다.”

‘가격 산출’에 대한 메커니즘에 대한 신 고전학파의 가정, 시장의 가격에 의해 균형점이 도출된다는 가정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애초 거래라는 것이 ‘영합zero-sum’ 관계임을 보여주며 이는 ‘사회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슘페터는 이러한 가격을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여 교환가치와 시장에서의 협상 가격의 동일성을 주장하는데(p.118), 문제는 이렇게 되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정의’라는 기준이 모순에 빠진다는 점이다. “그는 다시 정의를 분배할 때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 불공평을 시정하는 정의corrective justice
나누고 각각의 원칙을 논한다. (……) 어느 해에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여 분배하다가 최하층의 신분이었던 자가 너무 많이
차지하여 더 위의 신분으로 상승한다든가 반대로 위의 신분에 있던 자가 몰락하는 등의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100). 홍기빈은 애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크레이아creia를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오독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개인의 효용’이 아니라 ‘집단적 좋음’이 원 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격의 결정이 ‘집단적 좋음’에 의해 시장에서 협상된다고 말하면, 이는 사회적 기준에 의해 가격을 도출한다는 말이 된다.

홍기빈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살림살이의 경제-가정관리의 경제)가 ‘화폐의 경제’로 전환되면서 나타나는 모순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상호호혜의 경제)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한 편에서 폴라니의 기획과도 같다. ‘자연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핵심적인 것이 되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nature’와는 다르다. “인간이 자신의 생활 환경에 따라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발전시킨 목축, 농업, 수렵, 어로, 약탈과 같은
것들 또한 모두 자연적인 것이다. (……)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가정경제와 폴리스를 구성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물적 수단을 자연에서 조달하는 것도 자연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자연적인 인간의 경제활동에 한계가 없을 리
없다
“(pp.96-97). ‘돈벌이 기술’과 ‘획득 기술’이 아닌 경제활동. 그에 대한 구상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장사치의 경제’를 넘어서는 ‘살림살이의 경제’. 그리고 그것을 떠받을어주는 사회의 ‘호혜성의 경제'(곧 이어 마르셀 모스를 읽어볼 생각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praxis’와 ‘포이에시스poiesis’의 구분이 흥미롭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프락시스praxis와 포이에시스poiesis로 구별한다. 후자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이고 전자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111).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은 프락시스가 포이에시스보다 더 중요한 사회, 그리고 포이에시스가 심지어 돈벌이 기술 혹은 장사꾼의 ‘화폐의 경제’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맑스가 말했던 ‘자유인의 공동체’ 기획과 맞물림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을 뜨겁게 달구었던 ‘가치론’의 화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사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맑스와 베블린, 그리고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다”라는 레오포드의 서평이 떠오른다. 하나의 사상의 계보의 선이 보이기는 한다. 여기에 ‘구체성’을 가지고 철학을 했던 니체부터 시작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을 얹어볼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희소성에 대한 이야기. 자연은 희소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경제학 원론 책 첫 장에 나오는 공리가 있다.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어 이를 반박한다. “실제로 희소한 것은 권력이지 재화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희소성에 근거하여 경제를 정의하는
것이 초시대적인 보편 타당성을 갖고 있을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벌어야만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의미의 사회적 권력을 얻을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p.27). “희소한 것은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권력이나 서열이라는 점이다“(p.29). 위에도 언급했듯이 ‘자연적’이라는 생각 안에 한계는 없다. 문제는 이것들을 자본증식의 메커니즘, 즉 돈벌이의 기술로 만드는 것들의 문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좀 허무하다는 생각(홍기빈의 책 말미에서 그러한 태도를 비판하지만)이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모든 것이 화폐의 메커니즘으로 빨려들어가는, 그것들을 더욱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국면 하에서 다시금 ‘사용가치’와 ‘살림살이의 경제’를 복권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가 해체되어가는 순간에 “사회가 온전히 해체되어본 적이 없다. ‘자기조정적 시장’은 환상이고, 모든 경제에는 사회적 요소들이 배태(embedded)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사회적 경제를 살리자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둬도 ‘사회적인’ 어떤 것이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일까. 쉽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약한 고리’를 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강한 고리’를 끝까지 밀어붙여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사회는 실험장이 아니고, 어떤 진단들은 동시에 그 진단들이 함축하는 담론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종종 드는 생각은 이른바 ‘사회적 경제’라는 것까지 빨아들이고 있는 기업의 ‘윤리적 경영’이나 ‘사회적 공헌’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약한 고리’를 깨는 ‘전술’에 대한 것들이다. 내가 조급해서 일까.

다만 독일 역사학파나, 베블린, 케인즈에 대한 상대적인 ‘고평가’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한계들이 도래하고 있는 지금 실제로 미국의 우파들도 떼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에서 참조점을 얻을 수는 있겠다.

어쨌거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헛소리’에 대한 역사적, 인류학적, 철학적 공박은 이 짧은 책을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된 셈이다. 그 다음은 또 다른 이의 몫이거나, 홍기빈의 나중 저작의 몫이다(사실 홍기빈의 나중 저작을 읽지 못했으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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