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2]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10점
서동진 지음/돌베개

 2010/06/2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1]신자유주의 노동체제, 그리고 미라이 공업 下
2010/06/2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 읽기 #1]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그리고 미라이 공업 上
2010/03/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네그리, 메시아의 강림?


# 낯선 서동진, 낯선 푸코, 그리고 낯선 연구

사실 이 책은 2004년의 서동진의 논문이고 완전히 새로운 논의는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굉장히 새롭게 사람들에게 느껴지긴 했다. 이를테면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를 썼던 서동진과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의 서동진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더!’ 자유를 달라며, 소수자의 정치학을 말하던 서동진과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자유’를 규탄하는 것만 같은 서동진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p>

또 이 책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푸코가 있다.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로 대표되는 저작에서 자유를 포획하는 국가 권력의 테크놀로지, 지식-권력으로 생성되는 담론권력, 그리고 “권력은 도처에 존재한다”며 외치는 철학자 푸코의 논의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통해 분석의 틀로 활용되는 푸코는 너무나 다르다. </p>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기 버거워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모든 등장하는 개념들이 낯설고, 또 주장하는 바는 간명하나 그것들을 풀어헤치는 논리가 낯설다. 그래서 이 책의 4장인 <자기계발의 의지=""> 장과 에필로그 이야기만 신나게 읽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용도에 따라서 그 장만 읽어도 논의의 흐름을 좇아가는데에 있어서 크게 무리는 없다. 몇 달 전 펼쳐졌던 한윤형(#1, #2)과 박권일의 논의(#1, #2)가 그 장을 크게 넘어서지 않았던 것도 주요한 ‘주장’들이 그 장에 있기 때문이다. </p>

하지만 이 책을 구태여 어렵게 읽을 필요는 없고, 또한 그런 것이 저자의 목적도 아닌 듯하다. 또 그렇다고 이 책이 강준만이나 우석훈의 책처럼 손쉽게 술술 읽히는 책도 아니다. 원래 겨냥한 책의 독자군이 인문사회계열의 ‘대학원생’ 정도이기 때문이다. 박사학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대학원생’ 정도라는 것이 제도로서의 대학원생이 아니고, 인문/사회과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정도면 된다는 것은 위안을 줄만하다. 쉽게 말해 이 책은 친절하지는 않지만, 조금 공을 들이면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을 읽기 위해 선행으로 좀 읽어야 할 논의들이 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푸코의 콜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인 (아직 영역판밖에 없고, 한글판은 심세광이 난장 출판사에서 번역출간할 계획이다)를 읽거나, 짧은 글로는 Thomas Remke가 썼던 논문 정도를 읽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기존’의 푸코 논의에 익숙했다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에서 나타나는 푸코의 논의는 충격적이다. 미국식 자유주의와 유럽식 자유주의를 비교하는 이야기들, 신자유주의를 ‘인간성의 파괴’로 읽어내거나(리차드 세넷) 어떤 경제적 정책의 패키지(데이비드 하비 류)로 읽어내는 시도들을 넘어서서 ‘통치성(Governmentality)’로 읽어내는 푸코는 굉장히 충격적이다. ‘이’ 푸코가 ‘그’ 푸코 맞냐는 이야기가 나올법도 하다. 나 역시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 <임상의학의 탄생="">, <담론의 질서=""> 정도를 읽다가 이 책을 잡았을 때 놀라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이’ 푸코나 ‘그’ 푸코나 다 푸코이고, 그 교각을 놓아줄 저작이 아마 첫 번째 콜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정도가 될 법하다. </p>

그런 선행작업이 조금 되어있다면 이 낯선 논의가 별로 낯설지 않게 느껴지지 않을까.

#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이 책은 1997년 금융위기 사태 이후 등장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을 서동진은 이렇게 밝힌다.

일상적인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의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개인적 소비자의 모습을 거쳐, 지난 20년간 일터에서
등장한 새로운 노동주체의 모습을 떠올리고, 여기에서 다시 시민으로서의 삶을 규제하는 새로운 권력의 형태가 출현하고 이것이 부과하는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따라서 자신을 계발하기 위해 열정을 솓는 개인적 주체의 계보를 추적하며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과정에서 어떤 주체화의 궈력이 등장했는가를 분석하는 것. 이것이 이 책의 과제이자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분석이 최종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신자유주의일지도 모른다
“(p.33).

책에는 여러가지 편린들이 스쳐간다. 청소년 운동으로 제기되었던 두발자유운동, 교복폐지운동 등부터 시작하여, ‘신세대 혁명’으로 표상되는 ‘서태지 세대’의 자유의 의지들이 어떻게 자기-경영, 자기계발의 의지로 전환되었는지 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서로 반드시 인과관계는 없지만 맞물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는 푸코의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먼저 지식-담론의 작동이다. 두 번째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작동이다. 세 번째는 그것들을 주체들이 어떤 ‘내/외부’의 정치적 의지와 연동하여 자기화하는 것이다.

책은 그것을 1990년대 이후 국가의 담론이었던 ‘지식기반경제’라는 담론과, ‘국가인적자원개발’과 ‘교육인적자원부’ 담론과 기술, 그리고 기업의 테크놀로지였던 MBO, ERP 등의 경영기법과 경영담론,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자기계발’ 담론과 그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 기법들의 등장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틈새를 조직하는 자기계발서의 전형으로 공병호와 구본형의 자기계발서들이 등장한다.

문제는 여기다 대고 ‘화’를 내봐야 별 일이 안 벌어진다는 것이다. 또 안 벌어지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가 얼마나 손쉽게 자본의 논리에 먹히는 지를 서동진은 잘 보여준다. “신교육체제가 시장 중심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며, 소비자주권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는 “비판”은 절대 그릇된 주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흥미로운 점은 (……) 정작 그 비판의 대상이 되는 정책을 뒷받침하고 조정하는 정치적 합리성은 거부감 없이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가령, 교사 노동의 “책무성”, 교육 재정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학습자”의 “수월성”, “자율성”,
“다양성” 같은 것은 모두 “신자유주의”의 세부적인 관리와 지배의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다
“(p.92). 좌파나 우파나 똑같이 ‘자기주도적 학습’을 어떻게 ‘진정성 있게’ 해낼 것이냐를 가지고 교육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지금 한국의 자화상이 아닌가. 자기주도적 학습 밑에 깔려있는 담론적인 야바위를 지적하는 경우는 없다.

또한 이러한 경향을 ‘노동문제’로만 환원하는 태도들도 있다. 노사관계에서 자본의 공세일 따름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공허하다. 이미 ‘일터’와 ‘삶터’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지 않나. 새벽에 헬스를 하고, 퇴근 후에 학원으로 가고, 주말에 도서관에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일터 바깥’이 존재하긴 하는가? “경영 담론은 일하는 주체에 주로 국한된 것이었다. 고용에서부터 조직생활, 채용과 보상,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터 안팎에서
일하는 주체는 이제 자신을 ‘역량 있는’ 사람으로 주체화해야 하고 이는 언제나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이상을 좇으며
이뤄진다
“(p.348). 일터 바깥에서도 많은 직장인들은 ‘삼성맨’으로 ‘GS맨’으로 살고 있지 않나. 일터 바깥의 주체도 조형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섣불리 기업 안에서의 새로운 경영 테크놀로지에 대해 비판해봤자 그것들은 그러한 테크놀로지를 ‘보완’해줄 따름이다. “경영 담론에서는 이미 불멸의 표어라고 할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는 말이 알려주는 것처럼 BSC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또 이를 객관화시키려고 한다. 물론 노동주체의 주관적인 삶, 특히 정서적이고 직관적인
행위들을 과연 객관화 · 수량화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측정 · 관리할 수 있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자못
냉소적인 반문은 BSC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BSC를 좀더 개선하고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뿐이다
“(p.194). 이를테면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시크릿’을 찾지 못한 자가 문제이지 그 책은 뻥이 아니다. 1년의 MBO를 잘 못 수행한 무능한 인간이 ‘역량’이 부족할 뿐, MBO 제도 자체는 결함이 별로 없고, 있다하더라도 또 다시 잘 ‘측정’하면 새로운 솔루션이 나온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반문’들은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다.

하도 ‘스펙’을 가진 인재들이 바보 같으니까 ‘인문 스펙’, 심지어 ‘진보 스펙’이라는 것들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현상이다. 문제는 그 경쟁의 논리가 작동되는 방식 그 자체가 아닐까.

#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되다

서동진이 이 책을 통해 발견한 성과는 바로 ‘자유’의 의지의 이름으로 ‘자기계발’이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까 위에서 언급한 주체들의 ‘자기화’, 즉 ‘주체화’의 이야기이다. 단순히 국가가 시켜서, 혹은 기업에서 잘리지 않으려고만 사람들이 ‘자기계발’을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 그 ‘자기계발’의 논리에 투항한다는 말이다.

자기계발 담론이 연봉이나 몸값을 올리라고 말할 때 그들은 치부를 하도록 권유하거나 자기 인생을 도구적으로 대하라고 조언하는
것이 아니다. 외려 이 자기계발 담론이 전하는 것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신의 ‘자유’를 되찾으라는
것이다
“(p.287). 다만 그 ‘자유’의 세계에는 안정적인 국가의 보호나, ‘연공서열제’, ‘평생직장’의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해왔던 구태의연한 체제가 없을 뿐이다. 거기에는 자기와 만나는 ‘자유로운 주체’들의 경쟁을 위한 ‘자유’가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곧 바로 “너희들 속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계몽적인 태도는 들어설 장소가 없다. 그리고 그런 강한 반감이라는 것은 사실은 위에도 언급했듯이 1990년대의 ‘신세대 혁명’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자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서동진의 주장이다.

이른바 1990년대 이후 성행했던 문화 변동에 관한 이야기들, 특히 서태지 세대 혹은 신세대로 대표되는 이야기들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군사문화, 학교문화, 패거리문화, 훈육문화, 가부장제문화, 직장문화 등 기존의 문화적 정체성을 비판하고 성찰한다는
문화 비평류의 담론들은, 경영이란 말만 쓰지 않았을 뿐 자기경영의 주체, 위에서 했던 말을 빌리자면, 기업가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갈래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 그들은 (……) 자유와 개성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1인기업가의
모습이자 벤처자본가의 모습, “브랜드-유”, “나-주식회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pp.300-301).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억압기제’로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신자유주의가 억압적이라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미 ‘몸’이 변했기 때문에 손쉽게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2009년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책에서 우석훈이 이야기했던 ‘내 몸이 신자유주의에요’ 혹은 ‘신자유주의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쉽게 풀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쟁이 익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 </p>

# 그 바깥은??

하지만 서동진은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더 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새로운 정치학’을 구상해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를 한다. 다만 ‘어떻게’가 문제다. 박권일의 비판도 그 ‘어떻게’에 나와있다. 박권일은 서동진의 논의를 결국 386 같은 ‘혁명적 주체’의 귀환을 말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런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또한 ‘자기계발 영역에서의 담론투쟁’을 통해 만들어질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대뜸 서동진에 ‘답’을 달라며 소리지르는 것도 역시 별 의미는 없어보인다.

사실 책의 여러 군데에서도 나오지만, 과연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것이 영구적일까?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에서도 지적되지만 실제로 축적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자본 증식’이라는 논리에서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오로지 해낸 것이 있다면 ‘부의 계급적 이전’이었을 따름이다. 쉽게 말해 있는 놈들을 더 배불려줬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이 감내할 수 없는 ‘임계치’를 넘어서는 포악한 본성들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워킹푸어’, ‘잉여인간’의 탄생이 바로 그것 아닌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의 논리가 극한까지 다달았을 때 그것에 조응하지 못하는 세계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할까? </p>

다른 한 편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성’을 받아들인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충격’이 도래했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는 그들에게 ‘자기경영’ 없이는 불안해 죽을 것이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몸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 이야기하듯이(2009/12/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저널리즘이 쓴 최고의 신자유주의 분석 –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그러한 체제와 주체성의 전환에는 늘 ‘충격파’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냥 순순히 그런 시절이 오지는 않았다. 푸코가 말을 아무리 ‘환상적인 앙상블’ 식으로 말하더라도 그 저변에는 늘 폭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 다른 역사적 ‘충격’ 때문에 깨져오곤 했다. </p>

물론 나는 여기에서 어떤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감벤의 ‘비관론’이 ‘역사’를 거세한 낙담이듯, 네그리의 ‘낙관론’도 사실은 ‘갈등’을 제거해버린 유토피아의 충동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서동진의 책은 ‘냉소’가 넘치는 하나의 비관론처럼 보이긴 하나, 그는 여전히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전사 같아 보인다. “자유를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조절하며, 나아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주체화해야 할
것인가를 강제하는 것이 자유의 정치학이라면, 그런 자유의 동원을 다시 문제화함으로써 자유가 지닌 위험을 알리고 비판하는 것도 역시
자유의 정치학이어야 한다
“(p.377). 다만 그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 역시 뭔가를 더 ‘알리고 비판’하는 ‘지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먹물의 느낌이 나지만, 하지만 그가 가진 언어에서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다음 저작을 기다린다.

책을 읽는 와중 계속 뭔가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내 머릿속의 ‘자유’에 대해서 막 떠올려보는데, 나 역시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하는 주체 깔대기에 빨려들어가는 건가? 매일 시간을 짜야 하고, 그러면서도 시간 강박에서 자유로우려고 하는 주체. 바쁘지 않으면서도 일 잘 하는.. 이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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