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3] 한 눈에 읽어내는 봉건제부터 자본주의까지의 역사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8점
리오 휴버먼 지음/책벌레

# 통사와 이론, 인물사와 정치사 그리고 일상의 역사

통사를 쓴다는 일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몇백 년, 아니 몇천 년을 가로지르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기만의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다. 아니 최소한 몇백 년만의 일이라도 한데 묶어서 읽을 수 있다면 굉장하고 그런 작업들을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대가’라고 이름붙이는 것 같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자신의 ‘개념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이 작업을 해냈던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마 최근에는 에릭 홉스봄 정도가 있는 것 같다. 홉스봄이야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또 누가 있을까? 브로델이 떠오른다. 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방대한 저작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월러스타인은 브로델의 논의와 맑스를 만나게 하려 했었고 그 작업들이 ‘세계체제론’이라는 하나의 정치경제를 다루는 큰 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근대세계체제>가 바로 그러한 작업이고, 그에 뒤 이어서 지오바니 아리기 같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정초하는 사람들의 작업이 이어졌다. </p>

그런데 문제는 홉스봄이나, 브로델이나 월러스타인이나 다 읽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홉스봄이 좀 덜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다 굉장히 ‘이론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홉스봄의 ‘~의 시대’ 시리즈 두 권을 읽었을 따름이다. 이론적인 거 떠나서 더 큰 문제는 분량이다. 한 두 권이어야 읽을 엄두를 낼 것 아닌가.

거기다가 관점의 문제도 제기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 읽었던 계몽사의 <만화 한국사="">와 <만화 세계사=""> 시리즈를 다 읽고 나서 난 한국사와 세계사의 ‘도사’가 된 줄 알았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신문의 정치면을 ‘무협지’처럼 읽게 된 것도 그 계몽사 판 때문인 것 같다. 누구 왕이 신하 누구와 암투를 벌이고, 누가 반란을 일으키고, 어느 나라가 몇 년에 어느 나라를 침략하고 등등. 예전에 유행했던 <한국을 빛낸 101명의 위인들> 노래를 읊조려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인물사’와 ‘정치사’를 뛰어넘은 일상까지 포함하는 역사, 그러면서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책. 그런 책이 찾기 쉬운 일은 아니다. </p>

# 휴버먼의 중세와 근대의 ‘간략하고 이해하기 쉬운 역사’

그런 점에서 생각할 때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원제 : Man’s Worldly Goods –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 1933)은 굉장히 장점이 많은 책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주제 하나씩 묶어도 책 한 권은 족히 될 만한 것들이다. 중세의 장원경제, 중상주의, 중농주의, 대항해시대, 길드 조직, 선대제-매뉴팩처, 금융자본주의,제국주의. 그리고 그에 조응하는 정치적인 움직임들. 부르주아가 왜 ‘민족국가’와 손을 잡으면서 또 동시에 도전했는지. 그리고 왜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흐름들이 결국에 ‘몫 없는 자들’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민주주의’를 곧 바로 주지 못했는지. </p>

간략하고 이해하기 쉬운 역사로서의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역사가 전개된다. 1933년이라는 저술의 시기는 굉장히 여러 면에서 놀랍다. 나치와 파쇼가 일으켰던 제 2차 세계대전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일갈한 그의 인식도 굉장하지만, 정말 저자의 목표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평이하게 경제사와 경제학설사, 그리고 정치사를 한 번에 기술하는 능력은 굉장해 보인다.

책을 한 번 주욱 읽으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한정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길드 경제에서 중요했던 상호부조의 원리를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옳고 그름’의 문제에 집착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상명하복이 얼마나 ‘봉건적’인 제도냐면서 혁파해야 한다고 손쉽게 말하지만, 그 나름의 장점도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성들이 왜 ‘상상의 공동체’로 군대의 병들 간의 ‘평등주의’를 설파하는지 중세의 길드조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공업자 길드 안에는 서열이 있었으나 같은 서열의 사람들은 서로 동등했다. 그리고 말단인 도제에서 장인까지 승진은 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p.78). 언젠가는 ‘승진’하여 자신들이 한 명의 ‘장인’으로 몫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군대에서는 ‘병장’으로서의 권한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우정’이 끼어들었고, 그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았고 생계가 어려운 이에 대한 보조와 연금 지금은 길드 조직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경제’가 존재했다는 폴라니의 이야기들을 엮을 지점들이 나온다. ‘상호부조’의 경제. 홍기빈이 말하는 ‘사회적 경제’나 하승우가 말하는 ‘협동조합’의 이야기들이 개입할 지점들이다.

중세 경제를 잘 보다보면 자유주의자들의 ‘시장 발생’에 대한 환상적인 입장이 아니라, 그것들에 얼마나 많은 핏자리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인클로저 운동과 식민지에서 자행된 ‘프롤레타리아트’화의 과정. 화폐 관념이 없는 자들에게 화폐로 벌금을 부과하고 그들을 공장과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끌고들어갔던 식민주의자들을 보라. “농업 기술과 과학과 도구의 이 모든 주목할 만한 개선을 대규모로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엔클로저 운동 덕분이었다. 그것은 구래의 개방 경지 제도, 즉 모든 사람을 위한 공유지 제도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p.218). “정부는 원주민에게 화폐로 납부해야 하는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 원주민들에게는 화폐가 없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백인이 소유한 대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함으로써 원주민들은 세금으로 바칠 화폐를 구할 수 있었다. 급여는
형편없이 낮앗다. 물론 원주민들은 광산이나 대농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세금은 내야 햇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12).종종 우리는 자본주의가 역사의 ‘발전’으로 도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리에는 늘 약탈당하고, 수탈당하고, 두들겨 맞거나, 죽임을 당한 원혼들의 핏기와 그 옆에 있었던 탐욕의 존재들의 ‘오물’이 가시질 않는다.

당시 이러한 상업, 즉 정복 · 해적질 · 약탈 · 수탈은 자본주의 생산을 개시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축적된 방법이었다.
맑스가 이유 없이 다음과 같이 쓴 것은 아니었다. “만약 화폐가 …… ‘태어날 때부터 한쪽 뺨에 핏자국을 띠고 세상에
출현한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출현한다.”
“(p.204)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18~19세기를 묘사했던 소설들의 그로테스크함은 현실 그 자체의 ‘비참’과 연동되어있었던 것을 다시 한 번 연상하게 된다. 엥겔스가 보고했던 영국 노동계급의 현실. 두살 짜리 아동 노동자의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사실인 ‘옛날’ 이야기는 아니다. 휴버먼의 시대에도 그러한 노동은 여전히 작동했기 때뭉니고, 지금도 그러한 노동은 유지되고 있다. 매번 ‘공정무역’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아동 노동이 바로 그렇지 않나(2009/04/0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이 아이들을 기억하시나요? – 이와쓰키 유카 외, 이영미 옮김, <나는 8살, 카카오 밭에서 일해요>, 서해문집, 2009). 늘 도래할 수 있는 ‘오래된 현재’이기 때문이다. </p>

그리고 그러한 순간들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들에 늘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휴버먼은 잘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2010년이라는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이야기들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점들을 보게된다. 이를테면 그의 ‘경제결정론’적 태도가 보일 때 그렇고,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이야기 정도가 그렇다. “노동조합은 지하로 들어가 ‘공제 조합’이나 ‘사교 클럽’으로 위장해야 했다. 동맹 파업과 피켓팅
같은 노동조합의 무기들은 날이 무뎌졌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여전히 살아 남았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바라는 것, 즉 더 나은
생활수준을 이룩할 수 있는 노동자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p.243). 노동조합을 교란하는 기제를 개발하는 자본의 힘을 이제는 잘 알지 않나. 그리고 노동조합 자체가 다른 ‘외부’의 인간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잘 알지 않나. 다른 방식의 짜집기가 필요한 게 지금이니 말이다. 그리고 잉여가치를 계산할 때 ‘노동 시간’을 단위로 계산한다는 점이 좀 조야해 보이기는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늘 ‘노동자’는, ‘피해자’로만 읽히는 것 같다. 자본가는 늘 ‘가해자’로 읽힌다. 하지만 ‘생산관계’와 ‘생산수단’이라는 관점을 취하려면 그러한 인격적 존재로서의 계급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급을 읽어야 하지 않나. 맑스가 왜 구태여 부르주아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프루동과 달리 말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시선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종종 이야기할 때도 좀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파시즘이 ‘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등장했는지를 명확하게 하지 못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갈 필요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여러가지 측면에서 좌파의 이론들이 혁신되기 ‘이전’에 이 책은 나왔고 저자의 ‘탓’을 할 필요는 없다. 다음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를 보면 된다. 그리고 입문서로 이 책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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