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4] 당신이 알고 싶은 푸코를 알려주는 책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8점
사라 밀스 지음, 임경규 옮김/앨피

2010/06/3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
2010/07/01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헨드릭스의 이론 공부 #1]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

# 읽기 힘든 푸코, 왜?

1990년대 ‘문화연구’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1980년대 맑스레닌주의를 공부하던 사람들의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세계철학사(세철)>이나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그리고 레닌의 책들(<무엇을 할="" 것인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제국주의론>)의 일본어 중역판본을 읽어내는 것이 80년대의 독서였다면(그 외에도 읽었을 책들은 물론 많다. 이를테면 이진경의 책도 봤을 거고,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도 읽었을 거고.. 등등) 90년대에는 전혀 다른 텍스트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의 주요 텍스트들, 이를테면 레이먼드 윌리엄스나 스튜어트 홀, 그리고 그람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한 편에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로 잡았던 텍스트는 데리다와 료타르, 푸코 등이었다. 이른바 프랑스발 철학은 읽기 쉽지 않았다. 현란한 문투와, 어처구니 없는 번역의 패키지(지금도 여전히 팔리고 있는 김보현의 <해체> 같은 책은 여전히 아무도 읽을 수 없다)는 여러 사람 죽였을 법하다. </p>

푸코도 그렇게 읽혔다. 다들 “푸코의 담론..” 어쩌고 하면 빠질 수 없었기 때문에 텍스트를 잡긴 했지만 도대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김현과 이광래의 번역투도 쉽지는 않았다. 지금도 푸코 번역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듯하다. 오죽하면 이런 블로그가 나왔을까? (푸코번역 좀 잘해주세요 – 읽기가 힘들어요. 푸코는 어렵게 말하지 않았는데) 더 문제는 푸코가 말하는 지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난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푸코와 관련된 논의들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고 푸코와 관련된 논의들이 폭증했다. 그러한 푸코에 대한 해설서들은 여러 눈으로 푸코를 비춰주기 시작했고, 한동안 푸코는 빠질 수가 없는 중요한 텍스트가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들뢰즈가 읽는 푸코랄지, 네그리가 읽어내는 푸코 등등은 푸코의 중요성을 잘 강조해주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한동안 ‘유행’이 지나고 들뢰즈로, 네그리로, 다시 랑시에르/바디우/지젝/발리바르/아감벤으로 유행이 지나가는 와중 푸코는 좀 잊혀진 감이 있다. 그러다가 다시 복권된 것은 서동진의 책(2010/06/3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이 나오고, ‘생명정치’ 혹은 ‘생정치’ biopolitics라는 맥락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다시 푸코가 돌아오긴 했는데…

하지만 푸코는 여전히 어렵기 어렵다. 일단 저작이 방대하고, 한 이야기들이 겹치지 않고 일관된 서술도 아니다.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의 저자 사라 밀스도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 왜 푸코는 읽기 힘들까?? </p>

푸코는 독자들이 니체, 하이데거, 헤겔, 맑스와 같은 철학가들의 사상과 이론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글을 썼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철학가들이 유럽 대륙 이외의 독자들에게 꼭 친숙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푸코는 독자들이 학제 간 경계선을 가로질러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글을 썼다. (……) 더군다나 그는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주체를 다루는 법이 없을뿐더러, 근본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정립하려 시도했기에 더욱 난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p.208).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아무도 안 읽는 텍스트를 읽기 때문에 어렵다. 그 외에도 명료한 ‘인과론’ 따위는 집어치워버리기 때문에 푸코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 왜 푸코를 읽는 걸까? 어쩌면 푸코는 좀 더 편하게 자신의 이론을 대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푸코의 말이다. “내 모든 책들은 작은 도구 상자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그 도구 상자를 열어서 이 문장 저 문장을, 혹은 이 생각 저 생각을 드라이버나 스패너처럼 사용하여 회로를 고치거나 권력 구조를 해부하는 데 사용한다면, 특히 내 책이 의존하고 있는 원천 사상들까지 모두 나름대로 사용된다면 …… 그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p.32).

#구체적 지식인

푸코를 그래도 읽는다면, 그건 아마 푸코가 주는 어떠한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예를 들어보자. 전두환 정권 때문에 열받아 죽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군사정권 타도’라고 외치면서 전략을 짜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을 많이 집회에 모이게 하고, 매일 여러가지 방식의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 현 정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데모를 한다. 대통령이 직선제를 수용하고 선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백기완이 집권을 한다고 쳐보자. 그러면 그 운동가들을, 정치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들은 과연 해소가 될까? 전두환을 몰아내는 것만이 ‘해방’이었을까? 또 ‘정권교체’가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던 1997년의 강준만 식 프레임으로 가보자.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도래한 현실은 무엇이었나? 노무현이 당선되어 ‘해방’이 이루어졌나? 여러분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그게 단순히 ‘더 급진적’인 정권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러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넘어서서 ‘정권’ 차원 이야기 말고도 더 많은 이유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지점을 푸코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또 푸코가 매력적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푸코가 ‘실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그런 지식인들을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말할 때 사회 전방위적인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진지전을 행하는 지식인을 지칭하는데, 푸코는 좀 다른 의미에서 ‘구체적 지식인’을 말한다.

“구체적 지식인”specific intellectual이란 (……) 노동자들을 혁명의 장으로 유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억압적 정권을 그 내부로부터 침몰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문 영역 내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하는 지식인을 지칭한다. 푸코의 예를 따르면, 핵무기를 연구하면서 정부의 핵 정책을 비판하는 핵과학자들이 이런 구체적 지식인에 속한다“(p.52). 그리고 “구체적 지식인이란 유토피아적인 환상과 각종 정파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공적 지위를 구체적인 정치 운동에 사용하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p.53).

푸코는 단순히 좌파-공산당, 사회당/우파-국민전선, 드골주의 공화주의자들의 구도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역시 공산당 당원이었지만, 탈당을 했다. 물론 그는 ‘가장 급진적인 좌파’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파들과도 일을 열심히 한 축에 속한다. “푸코의 생애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정치 투쟁에 참여하는 고전적인 프랑스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1965년과 66년 사이에 프랑스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중등 및 대학 고등교육제도를 검토하고 정부의 교육 정책을 조언했을 뿐만 아니라, 1976년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형법 개혁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푸코는 프랑스 교육부의 고등교육부 부장으로 발탁될 뻔했다가 동성애 경력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또 그가 프랑스 국영 텔레비전 방송인 ORTF의 이사로 선임될 수도 있었다는 설도 있다. 즉, 푸코는 정치적 급진주의자로 여겨지지만, 정부 고위 관료직을 제안 받기도 하면서 경력을 쌓았다“(p.52). 여기에 전통적인 좌파-맑스주의자의 프레임을 댄다고 해보자. 푸코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변절자?” 그런데 푸코가 그렇게 간단한가?

푸코를 평면적으로 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는 푸코가 말하는 ‘투쟁’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푸코는 이런 모든 투쟁을 “국지적local” 혹은 “현장immediate” 투쟁이라 정의한다. 왜냐하면 이런 투쟁들은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되는 부당함을 비롯하여 타인이나 집단 혹은 사회제도가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런 투쟁의 주요 목표는 권력기관, 권력 집단, 엘리트, 혹은 계급을 공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통치의 기술, 즉 권력이 행사되는 형식을 비판하는 것이다.”“(p.81)

잠깐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의 주장들을 생각해보자. “흑인은 흑인이다. 그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서 노예가 된다.” 이러한 주장을 상기해볼 때 프롤레타리아트와 자본가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인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안에서 계급 투쟁의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 상황에서 투쟁은 자본가를 ‘때려잡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양산하는 ‘관계’를 해체하는 것 아니었던가. 푸코도 마찬가지로 ‘권력’관계를 만드러내는 효과를 해체하자는 전술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푸코를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러한 현장이 ‘의회’와 ‘대정권투쟁’의 현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도 있다는 언명. 그 점이 푸코의 매력이고, 이 때문에 다른 한 편에서 여성주의자들과 퀴어 이론가들, 또 생태주의자들이 푸코를 좋아했던 이유다. “푸코가 하고자 했던 것은 현실 내에서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정치학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p.45). </p>


#지식, 담론, 권력

‘푸코’ 하면 떠오르는 세 가지 단어는 지식, 담론, 권력 정도로 모아지지 않을까? 물론 ‘광기’, ‘감시와 처벌’ 등이 떠오르겠지만, 이러한 ‘사회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매개물이 바로 지식, 담론, 권력이라 말할 수 있다. 지식은 담론을 축을 타고 권력 ‘효과’를 만들어낸다. 푸코의 유명한 말 처럼 “권력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 말은 권력을 ‘쟁취’하는 어떤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권력은 단순히 권력을 가진 자가 나약한 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다. 권력은 사람과 제도의 일상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일상적 관계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p.73). 그리고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어떤 특정한 행동양식을 검열하고 심지어는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하지만, 또한 새로운 행동양식의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한다“(p.74).

쉽게 생각을 해보자. 공장에 많은 사람들을 몰아 넣고, 기계의 리듬에 맞춰 일하게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억압에 노출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전까지 해왔던 자연의 리듬에 맞춰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신체’에 대해 더 많은 공격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동자들이 기계를 멈추고 파업을 하며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 그 전의 자연의 리듬에 맞춰 일하는 것에 비해 더 ‘큰’ 저항이 된다. 응집된 힘이 더 ‘큰’ 저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권력의 작동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행동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지식’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그 순간이 바로 권력이 우리에게 행사되는 순간이라고 주장한다“(p.144).”어떤 사람을 하나의 주체 혹은 개인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담론의 대상, 즉 권력/지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p.145). 이를테면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 나에 대한 지식 하나가 생겨난다. 내 주민등록번호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시민권’이 생겨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가 ‘관리’하는 신체가 하나 더 생겼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즉 나는 ‘권력/지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내가 반드시 ‘억압’에 노출되었다고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시민’이기 때문에 ‘시민권’이라는 몫을 내놓으라고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법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푸코는 랑시에르와 공명하는 지점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진리 · 권력 · 지식, 이 세 가지는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때문에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바로 지식과 진리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p.149). 그리고 이러한 지식/진리/권력의 매개항이 바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담론은 규범화된 언술의 집합체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다른 언술들과 예측 가능한 형태로 결합되어 존재한다. 담론은 일련의 규칙들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이 규칙들을 통해 특정한 발화와 언술들이 사회적으로 유통된다“(p.110). 쉽게 말해 담론은 지식들 중 어떤 게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지를 분별해주는 매개항이 된다. 그리고 어떤 지식이 ‘쓸데 있는지’와 ‘쓸데 없는지’를 구분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담론이 ‘초역사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담론은 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역사성’을 지닌다. 어제의 진리가 지금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담론의 변화가 벌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역설적으로 ‘대항적 지식’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실제로 정치운동에 참여하면서 푸코는 대항적 지식의 생산이 중요한 것임을 인식했다. (……)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는 정보,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정보를 생산하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에 대한 비판이 된다“(pp.150-151). 기존의 담론이 매개하는 지식들의 ‘관계’를 비틀고 뒤집어버리는 ‘대항적 지식’들이 ‘헤게모니적’이 될 때 전혀 다른 관계가 될 수 있음을 푸코는 이야기했다. 푸코는 결코 비관주의자는 아니었다.

#열폭의 정치학을 넘어서 – 우리는 푸코를 가지고 싸울 수 있을까?

위에도 언급했듯이 푸코는 자기를 연장처럼 다뤄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가능할까? 한동안 푸코를 읽어낼 때 ‘비관주의적 시선’으로 읽어내거나, 푸코가 지적하는 아포리아들(불가능성)에만 집중하는 논의들이 많았다. 하지만 푸코는 다시 생각해보면 늘 액티비스트였다. 현장에 있는 사람이었고 뭔가를 계속 바꾸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책’으로 읽어내는 푸코로 어떻게 ‘정치학’을 만들어낼 것인지가 아닐까. 푸코가 ‘진보적 정치학’에 대해 썼던 글들은 좀 참조점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 “진보적 정치학이란 한 가지 실천 속에 내재된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조건들을 인식하는 정치성이다. 반면에 여타 다른 정치학은 단지 이상주의적 필연성과 단순 명료한 결정론과 개인의 자발적 참여의 자유로운 상호 작용만을 중요시한다. 진보적 정치학은 실천 속에서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여러 형태의 변화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살펴보는 반면에, 다른 정치학은 변화의 획일적 추상화나 마법과도 같은 천재의 출현에 의존한다“(p.45). ‘현재의 구체적인 조건’이라는 상황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역사적 법칙’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놓고 그 ‘역사성’을 관찰하는 태도. 손쉽게 인과론을 적용하지 않고 ‘유보’하는 태도. 그런 것들이 푸코가 주는 ‘정치학’의 메시지가 아닐까. “푸코가 일차적으로 하고자 하는 바는 사물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시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사건에 대한 특정 분석이 ‘옳다’고 가정하여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다른 일련의 ‘사실’들을 일률적으로 꿰맞추기에 앞서 우리가 서 있는 입장을 더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라고 제안한다“(p.213).

난 이 지점에서 ‘열폭’하는, 손쉽게 끓어오르고 폭발하고 여기저기 발산해버리고 뒷수습은 안하는 한국의 어떤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을 읽는다. “어쩜 이럴 수 있어?”는 촛불을 끓어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손쉽게 정답을 도출하고 그 답을 통해 움직이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들은 아닐까. 어느 정도 답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오래된 습관’을 동원하여, 단상을 만들고 운동권 어르신을 모셨던 방식의 ‘상상력의 억압’이 더 이상의 ‘정치’를 막았던 것은 아닐까. 또 다른 한 편에서 운동권들이 시민들에게 욕을 먹었던 이유, 6.2 지방선거의 ‘표심’을 예측하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좌파 이론’을 가지고 공부하는 나에게 푸코는 굉장한 해방감인데. 지금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푸코는 어떤 ‘해방’의 무기가 될까. 문제는 ‘푸코’가 아니고, 자신들의 실천들에서 필요한 것들을 잘 차용하는 자세들이 아닐까. 물론 손쉽게 ‘열린 마음’이라고 할 건 아니겠지만.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는 분명 장점이 많은 책이다. 명쾌하게 건져야 할 것들을 잘 보여준다. 다만 좀 아쉬운 것은 ‘통치성 학파’가 대두할 정도로 신자유주의 ‘통치성’이라는 분석을 푸코에게서 건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밀러의 접근이 좀 지체된 거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에서 번역자 임경규가 지금 푸코를 읽어낼 때 자주 쓰는 개념들과는 다른 ‘낯선’ 개념어를 씀으로 인해 좀 독해가 어려워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좀 든다. 물론 이런 것들은 ‘보완’가능한 것이고 황당한 정도는 아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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