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변화’도 봐야하지 않을까? – 권인숙의 논의를 보며

 2010/07/05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5] – 군가산점제와 여성 징병제에 대한 이야기
2010/04/02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온라인 당비의 생각]좌파는 군대에 대해 어떻게 묻고 대답할 것인가?
2010/03/02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군대에 대한 고정관념 바깥의 군대 생활 이야기
2010/02/11 – [생각하기/머릿속 지도그리기] – 군대 3부작 개시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책을 썼던 권인숙은 지속적으로 군대 연구를 하고 있는 여성학자다. 그녀의 주장은 크게 보면 3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군대가 사회의 수직적인 군사문화를 재생산하고 2)군대가 남성성을 양산하며 성별위계(젠더위계)를 공고하게 만들며 3)군대는 폭력적인 공간이며 소수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도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한국사회와 군대와, 또 다른 한 축에서 특수한 그녀만의 운동권 문화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는 이어서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이매진, 2008) 같은 책을 통해서 운동권 내의 가부장성에 대해 지적하는 연구들을 가능하게 했다. 2005년 권인숙은 <대한민국은 군대다=""> 말고 <한국여성학> 저널에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병역의무: 카투사의 남성성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 논문이 흥미로운 것은 그 ‘카투사’가 워낙 독특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학벌 사회인 한국에서 대부분 유명대학 출신으로 구성되어 이미 특권적 지위에 가까이 가 있고, 한국 사회에서 계층 상승에 중요한
도구인 영어를 배우는 경험을 한 이들로 구성된 군대가 카투사이다. 이들이 병역의무와 관련된 군대적 남성성에 의해서 어떻게 남성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남성성의 서열화를 받아들이는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p.225). 여기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잘 드러나지 않고, 마치 남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식의 자연스러운 성도덕과 성역할 기대 속에
자리잡혀 많은 경우 통제와 우월, 특권의 구조가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p.224). 구태여 말하지는 않지만 다들 ‘남자’라면 모름지기 어쩌고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권인숙은 이러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카투사들에게도 관철되는지 여부를 인터뷰를 통해서 살핀다. 사실 군대를 경험하지 못하는 여성학자들에게 ‘참여 관찰’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카투사도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강박적으로 매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예비 엘리트들로 구성되는 카투사들은 이런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영향력 하에서 자신의 선택을 비하하고, 군인적 정체성에 자신감을 잃는다. 또한 미군과의 접촉과 차별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약소국 의식과 반미의식은 국민적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여 미군과 분리된 남성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낳는다. 이는 카투사들의 집단문화를 한국국적인 형태로 유지하고 국가에 대한 희생의 질과 양을 중심으로 서열화하는 구조를 동의하고 실천하는 동력이 된다.“(p.250)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얼마나 적실할까? 일반적으로 카투사의 경험을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서 핵심적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관철을 읽어낼 수는 있는 것일까? 먼저 난 연구의 디자인부터 온전히 동의하기는 힘든 것 같다. 연구참여자(인터뷰이)의 선정이 그렇다. 15명의 연구참여자들은 1978년부터 2000년도, 22년이라는 시간의 편차가 있지만 다 한 묶음이 되어있다. 그들의 경험의 ‘차이’들은 없어지고 평균적인 ‘카투사’가 되어 등장한다. 정권으로 보자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인데. 그 사이에 군대로만 한정짓더라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어왔나. 그 차이 때문에 인터뷰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연구참여자들의 해석을 해줘야 하지만 논문에 그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자는 한국의 급격한 경제개발에 의한 한미간의 경제력 변화 내지는 국력변화의 영향을 살피기 위해 70, 80년대와 90년대 말까지 골고루 면접인원이 구성되도록 모집했다.” 권인숙의 연구 목적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징병제의 주변인인 카투사들의 시각을 통해 징병제의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세계화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영향력도 살펴보려고 한다. (……) 이들이 병역의무와 관련된 군대적
남성성에 의해서 어떻게 남성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남성성의 서열화를 받아들이는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p.225). 내가 보기에 이 주제는 책 한 권 감은 되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어느 정도는 편향이 있는 해석이 그렇다.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편해 보이는 것도 있고 일반 군대가는 거… 그것도 괜찮긴 한데, 편한 거를. 그때 젊은 나이라 편한
거를 이렇게 추구했다기보다는 하여튼 뭐 새로운 것을 기대했죠. 그리고 자유 시간을 좀 많이 가질 수 있다, 뭐 이런 얘기가
혹하기도 하고. (면접자 9)
“ 그런데 이에 대한 권인숙의 해석은 “그의 설명은 ‘젊은 사람이 편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한국 군대의 문제점인 폐쇄성과
자유시간의 부재라는 어느 정도 더 이성적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를 지원동기로 재현하려고 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이런 카투사 선택의
불편한 자의식에는 ‘편한 군대’ 또는 영어라는 실리적인 이유로 카투사를 지원한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었다
“(pp.231-232). 젠더의 눈으로 볼 때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관철만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성 연구에서 여성을 단순히 ‘피해자화’ 시켜서 보지 않듯이, 남성에게도 그 눈만을 도입할 수는 없는데 권인숙은 그런 오류를 저지른다. 이를테면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가부장 프레임’에서 외부가 없듯이 말이다. 인터뷰이의 대답에서 ‘새로운 것’과 ‘자유 시간’에 대한 ‘욕망’에 대해 최소한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편하고’ 안 편하고를 가지고 남자들끼리 위계를 나누는 시선 바깥에 그러한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 사소해져버린 것이다. ‘자유 시간’이 함의하는 것도 굉장히 다양할텐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카투사라고 놀려요?) 예 어디 가서 말로 못하죠. (엘리트라고 인정해주고 남자들 사이에 그러지
않나요?) 안 그럴 거 같은데요. 진짜 군인이 아니라고 하겠죠. 편하게 살았다고
“(p.249). 라고 인터뷰이가 대답했을 때 권인숙은 ‘헤게모니적 남성성’만 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육군 전투병 많은 예비역 모임에서는 조용히 있고, 다른 ‘엘리트 친구들’과 모였을 때 스펙 쌓은 것과 커리어에 대한 계획을 함께 담소 나누는 카투사 예비역의 시선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 카투사들은 돈을 주고 성을 샀던 케이스는 한 번도 못 들었어요. (……) 왜냐면 이제
미군이고 어떻게 보면 학삐리가 보기에 그닥 그런 클래스들이 아니다 보니까 저게 한심해 보이는 경우들…
“(p.246). ‘학삐리’가 어떻게 ‘주류’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나. 그들이 ‘남성성’을 활용하는 방식은 어찌보면 ‘전략적’이기 때문이다. 자꾸 이런 우려가 드는 것은 그녀의 ‘국가주의’에 대한 지극히 ‘고전적’인 해석 때문이다. “세계화도 국가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IMF 등의 경제위기는 늘 국가적 위기로
이해될 만큼 국가는 한국 사회의 사람들에게 가장 뚜렷한 행동의 주체이고 생존의 단위로 각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국민은
다른 정체성을 압도하는 단일한 주체가 된다
“(p.229). 이미 ‘개별화된’ 신자유주의적 상황의 사람들과 국가주의의 전통적인 관계망은 오로지 랑시에르의 말마따나 ‘치안’의 논리밖에 안 남앗는데, ‘국민’을 지금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권인숙의 연구는 분명 전형적인 ‘민군관계론’으로 군대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정치학/국방학의 시선, 그리고 성별화된 ‘시민성’에서 ‘성별’을 은폐해왔던 사회학적 방법에 대해서 성찰할 지점을 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헤게모니적 남성성’조차도 재편하는 어떤 다른 흐름들이 발생하고 있는 지금, 군대에 대해 ‘같은 전제’로 ‘같은 결론’을 내는 작업들이 얼마나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이미 ‘씩씩한 남자’의 상은 한 물 가고 이제는 ‘영리한 남자’의 세계가 오지 않았나. 물론 2005년의 논문으로 지금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 지금 권인숙은 어떤 연구를 통해 ‘군대’와 ‘남성’에 대해 말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