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11] 오타쿠와 포스트모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8점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문학동네

 2009/04/19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처음 잡은 문화연구 입문서 – 존 스토리,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2010/06/25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방학. 문화연구. 글쓰기. 책읽기.
2010/04/2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지금의 좌파 이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포스트모던’하다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한국에서는 이제 한물간 이야기인 것 같다. 1990년대 맑스주의에서 다른 길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랄지, 푸코의 논의랄지. 지금은 좀 외려 구닥다리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한 편, ‘문화평론가’들이 써냈던 <현실문화연구>의 책들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들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여전히 그런 경향들은 있는데. 어쨌거나 요즘 그런 이야기는 ‘주요 담론’ 안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p>

또 다른 한 편, 일본에 대한 생각. 사실 나한테 일본에 대해 물으면 몇 가지 트라우마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민족주의자였던 내 아빠와, 작은 아빠에게 너무나 교육을 잘 받고, “한국을 빛낸 101명의 위인들” 같은 노래를 열심히 불렀던 나의 10대까지의 기억에서 일본은 늘 ‘왜놈’, ‘쪽바리’ 등으로 인식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즉 내 중고교 시절에 X-Japan을 듣고 <에반 겔리온="">을 보며, <원피스> 등에 열광하던 오타쿠들이 존재하긴 했었는데, 나는 그들과 친해지지 않았다. 어딘가 ‘변태’같고(실제로 별명이 변태였던 녀석도 있었고), ‘게이’같으며(실제로 ‘게이’도 있었고) 어딘가 사회부적응자 같은 그들에 대한 내 선입견은 ‘일본문화’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만들었다. 아, 물론 X-JAPAN을 들었지 그건 Red Hot Chilli Peppers를 듣거나 Mr. Big, Skidrow 등의 락음악을 듣던 취향의 연속선상이었을 따름이고 l’arc en ciel 등을 듣지는 않았으니까. 딱 거기에서 멈추곤 했다. </p>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이런 내게 좀 다른 시선으로 ‘일본’을 그리고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통로로 보인다. 그리고 그 매개물은 바로 ‘오타쿠’이다. </p>

오타쿠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가 있다. “‘오타쿠’라는 말에는 1988년에서 1989년에 걸쳐 미야자키 쓰토무가 일으킨 여아 연속 유괴살인사건
때문에 아직도 독특한 무게가 실려 있다. (……) 미야자키 사건 직후 어떤 주간지는 오타쿠란 “인간 본래의 커뮤니케이션에
서툴고 자기의 세계에 틀어박히기 쉬운” 사람들이라고 해설했는데, 이와 같은 이해는 지금까지도 일반적일 것이다
“(pp.18-19). 나도 이렇게 오타쿠를 정의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그건 오타쿠를 단순히 ‘병리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을 반대하며, 또한 그것들을 ‘역사적’인 형성물로 바라보는 히로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다. 예컨대 오타쿠의 ‘세대론’이 있다. “그 셋이란 6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우주전함 야마토="">나 <기동전사 건담="">을
십대에 본 제1세대, 7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앞 세대가 만들어낸 발전되고 세분화된 오타쿠계 문화를 십대에 누린 제2세대,
8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에반겔리온> 붐 때 중고생이었던 제3세대로 나뉘는 것으로, 이 세 그룹의 취미 지향은
각각 미묘하게 다르다</span>“(pp.23-24). </p>

이런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똑같이 가능할 것 같다. 예컨대 <미래소년 코난="">을 봤던 세대와, <에반겔리온>과 <원피스>를 봤던 세대. 그런데 히로키가 ‘오타쿠’를 말할 때는 위에서 언급한 주로 제3세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제3세대’의 행태들이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스트모던과 ‘오타쿠’를 연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오타쿠들을 ‘일본적인’ 어떤 것으로 묘사하려는 민족주의적인 시도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에도시대’에 대한 판타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오타쿠적인 감성이 일본의 독자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오타쿠계
문화의 전개를 일본 국내에서의 통사로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포스트모던화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이 책의 기획은 그와 같은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p.30). 히로키에 의하면 오타쿠적인 현상은 미국의 ‘서브컬처’를 받아들인 ‘범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일본의 나름의 맥락들은 그것들을 일본의 독특한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주체인 ‘오타쿠’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일본적’인 것으로 환원할 경우 동시대에서 세계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이는 ‘오독’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볼 수 있다. </p>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타쿠’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먼저 근대적인 ‘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가 있다. 이를테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 있고, ‘보이는’ 표층이 있다. 우리는 표층을 보면서, 결국에는 심연에 있는 어떤 ‘본질’ 혹은 ‘진리’를 깨쳐야 하는 것이며 표층에 현혹되면 안 된다. 모든 일들은 그것들을 엮어주는 심연의 진리와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타쿠를 통해 등장하는 ‘작은 이야기들’의 세계가 있다. 들뢰즈의 말을 따르자면 그건 트리형 모델과 리좀형 모델이라고 구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근대적인 ‘거대 서사/큰 이야기’의 체제는 오타쿠들의 행태와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조건에 따라 허물어 지고 과도기의 경우 여러가지 양상의 ‘갈등’들을 배태한다. “50년대까지의 세계에서는 근대의 문화적 논리가 유력했으며 세계는 트리형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커다란 이야기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교육되며 또 욕망되고 있었다. 그 표출의 한 예가 학생들의 좌익주의로 기운
것이었다. (……) 그런데 이와 같은 변동은 그 시기에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가
데이터베이스적인 모델로 움직이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기관이나 저작물을 통해 낡은 트리형 모델(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이식받기 때문이다
“(p.74).

오타쿠들은 ‘2차 창작’물들을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큰 이야기’ 중심의 혹은 어떤 세계관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피규어에 열광하고 모에 요소들에 열광하는 것이다.”필연적으로 개개의 작품의 완성도보다도 캐릭터의 매력이 더 중요해지며, 또 그 매력을 높이기 위한
노하우(모에 요소의 기술)도 급속하게 축적되게 된다
“(p.92).

또한 리얼리즘의 재현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손쉽게 오타쿠들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꼰대적인’ 시선이며 이들의 나름의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타쿠들이 사회적 현실보다도 허구를 택하는 것은 양자를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가
부여하는 가치규범 중 어느 쪽이 그들의 인간관계에 유효한가 하는, 예를 들어 아사히 신문을 읽고 선거에 가는 것과 애니메이션
잡지를 한 손에 들고 판매전에 줄을 서는 것 중 어느 쪽이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유효성을
저울질한 결과이다
“(p.59).

여기서 한 가지 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큰 이야기 같은 ‘본질’이 없어진 상황에서 ‘작은 이야기들’의 토대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2차창작 모두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는 시장이 육성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들 시뮬라크르 아래에 좋은
시뮬라크르와 나쁜 시뮬라크르를 선별하는 장치=데이터베이스가 있어 항상 2차창작의 흐름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것은 바꾸어 말하면 포스트모던에서 종래의 오리지널과 복제의 대립 대신에 시뮬라르크와 데이터베이스라는 새로운 대립이 대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p.108-109). 단순한 ‘담론’이 아니라 ‘유물론적’ 접근이 가능할 수 있다는 여지를 히로키는 남겨두는 것이다. 예컨대 이건 ‘인식론’의 전환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물화’와 ‘스노비즘’을 이야기했던 알렉산더 코제브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겠다. 그는 헤겔의 ‘거대 서사’가 사라진 지점에서 미국인의 ‘동물화’나 일본인의 ‘스노비즘’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동물은 항상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싸여 또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모드가 바뀌어가는 전후 미국의 소비사회는 그의 용어로는 인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물적’이라고
불리게 된다. 거기에는 굶주림도 투쟁도 없는 대신 철학도 없다
“(p.118). “다른 한 편,
‘스노비즘
‘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p.119). 히로시는 ‘일본’의 오타쿠들이 ‘동물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체질인류학 등에서 이야기는 ‘문화적 결정론’을 공격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외려 그나마 진실을 보여주는 게 지젝의 ‘냉소주의’에 대한 이야기 정도라면서 평가를 한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일본의 ‘포스트모던화’와 연동해서 설명한다. “일본에서 그 과정은 1945년의 패전으로 한 번 절단되었다. 그리고 거꾸로 부흥기에서 고도성장기에 걸쳐
일본은 오히려 교육기관이나 사회조직 등 사회의 이데올로기 장치를 강화하고 커다란 이야기=국가목표를 부활시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해왔다. (……) 그리고 그 통합이 다시 느슨해진 것이 70년대이며 그 결과 일본에서는 포스트모던으로의 이행은
70년대에 들어 겨우 본격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급속히 진전되었던 것이 아닐까
“(p.130)?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오타쿠 같은 인간형은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 된다.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의 2층구조에 대응하여 포스트모던의 주체 또한 이층화되어 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의 ‘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에서의 ‘커다란 비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의해 구동되며, 전자에서는
동물화하지만 후자에서는 의사적이며 형해화된 인간성을 유지하고 잇다. (……)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이라고
부르고 싶다
“(p.164). 하지만 누차 히로키가 강조하지만 이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며 여기에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다. 거기에서는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비이야기 사이에 어떠한 연계도 없고, 세계 전체는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도 의미를 주지 않는 채 표류하고 있다
“(p.165).

올 초, 대학원에서 엄기호가 했던 강연이 굉장히 인상깊었는데, 히로키의 이야기와 결국에 비슷한 이야기를 했구나 싶다(이 포스팅을 보고 곧 테러당하나? -.-). 전환된 구조에서 다시금 ‘진정성’을 갖고 전통적 방법의 ‘거대 서사’를 말하는 방식의 운동이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이야기. 최근의 정치철학에서 계속 ‘소수자’ 혹은 ‘몫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맥락도 같이 생각해볼 법하다. 그리고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본 리뷰에는 쓰지 않았지만, HTML 등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알고리즘과 포스트모던, 또 주체를 함께 엮어서 보는 분석들은 굉장히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통찰을 준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과 어떤 지점에서 만나게 할 건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 ‘일본적’이라는 말대신 동시대에 어떤 변곡점들을 가지고 지금 한국과 일본의 ‘잉여’들과 ‘오타쿠’들, 그리고 ‘히키코모리’들, ‘진상들’이 살고 있는지를 함께 묶어보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해볼 것인가를 고민해도 좋을 듯.

어쨌거나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다. 첫 장만 빼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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