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훈련소 경험

2008/12/27 – [일기장/사진들] – 지옥 – 육군 학사장교 퇴교한 날.

2008/12/27 – [일기장/사진들] – 반전 – 공군사관후보생 116기 합격

2009/07/01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전역했다.

몇 번 이 블로그에 쓴 적이 있었지만. 난 ‘입대’라는 의례를 두 번 치렀다. 첫 입대였던 2005년 7월 4일. 그리도 두번 째 입대였던 2006년 3월 20일. 난 두번의 훈련소를 겪었다. 먼저은 영천에 있는 육군 3사관학교였고, 두 번째는 공군 기본군사훈련단 간부교육대대 사관교육대였다(지금은 장교교육대대). 뭐 구조적인 분석을 지금할 건 아니다. 그 때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해 그냥 말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그냥 의식의 순서대로, 그리고 시간의 흐름대로 쓸 뿐이다.

# 영천 3사관학교 / 육군 학사사관 46기 – 24살 체대생, 벌점제, 후보생 상호평가

영천에 처음 갈때는 엄마, 아빠, 사촌형을 데리고 함께 갔다. 그리고 부모와 사촌형이 떠나자 마자, 훈육관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천에서 내가 처음 마주친 동기라는 인간들은 처음 낯설었지만 아니, 너무나 익숙했다. 나는 다시 1995년 3월 2일 중학교 1학년이 된 기분이었다. 다들 ‘대학교’ 씩이나 마치고 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욕’들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매일 ‘멱살잡이’가 끊이질 않았다. 만만하게 보이면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기 십상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체대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한 방에는 8개의 침대가 있고 한 방은 한 개의 ‘분대’가 되었다. 나는 3-1 분대에 배정받았다. 즉 3소대 1분대였다. 교번은 550번. 내방에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할 때 대부분은 24살. 바로 군대에 온 편이었고, 27살 한 명과, 28살 한 명, 즉 2명의 ‘형’이 있었다. 아, 그리고 26살도 한명이 있었네. 5명 24살에 3명이 그 이상. 다른 분대들을 볼 때는 대체로 24살에 수렴했다.

24살 체대생. 그것이 영천 3사관학교에서의 후보생들의 대부분을 설명하곤 했다. 사실 사후해석하자면 어느 ‘양성기간’이든 한 번은 혼을 빼놓고 적어도 3주 정도 ‘군인화’과정을 겪는 단계는 있다. 하지만 육군 학사사관에서 요구하는 ‘군인화’단계는 두 번의 군경험을 떠올려보건데, 터보를 단 상태로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건 순전히 체대생들 덕택이다. 그들은 ‘이론학과’에는 관심이 없고. 몸으로 잘 하는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여러가지 ‘모범’들을 말하며. 여전히 ‘보병 병과’ 중심으로 말했던 2005년의 분위기에서 그들은 진정 ‘에이스’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많은 경우 ‘지휘근무자’가 등장했다. 예컨대 중대장 후보생, 소대장 후보생. 난 뭣도 모르고 소대장 후보생을 했다가 잘렸고, 처음 소대장 후보생이었던 S의 경우 임관 직전까지 왕따를 면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와 S같은 경우 체대생도 아니었고, 운동신경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5년 김일병 사태는 그러한 양성교육의 FM화의 ‘상승효과’를 만들어냈다. 그 중 가장 훌륭한(?) 제도는 바로 상점/벌점 제도였다. 뒤의 공군 편에서도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상점/벌점 제도는 굉장히 ‘육군적’인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육군은 ‘폭력’이 하도 문제가 되자 폭력 대신 ‘벌점’으로 해결하자는 방침을 세우기 시작했다. 예컨대 처음 가입교를 할 때 우리는 ‘벌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보통 ‘얼차레’를 받았는데, 이제 ‘단체’로 받는 기합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개개인에 대한 ‘벌점’만이 남기 시작했다. 예컨대 근대민족국가의 ‘상상된 연대의식’에 호소하기 보다는 ‘각자책임’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방식이 강화된 것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거의 모든 평가가 ‘벌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은 없이 계속 ‘페널티’만 주기 시작했고, 건물의 정 중앙에는 매일 각 후보생들의 ‘벌점/상점’을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아놓곤 했다. 벌점 몇 점 이상이면, 훈련 기간의 유일한 낙인 ‘외박’이 제한되고, 몇 점 이상이면 유급, 그 이상이면 ‘퇴교/자퇴’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벌점’의 압박은 단순히 ‘압박’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퇴교’자를 속출시키고, 매주 ‘훈육심의위원회’를 개최함으로써 ‘현실화’되었다.

더 문제는 ‘다면평가제’가 2004년에 시범 도입, 2005년에 ‘후보생 상호평가’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인센티브’ 방식이 아니라 ‘저열한 후보생’을 솎아내는 도구로, 즉 ‘페널티’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육군적인, 너무 육군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예컨대 체대생도 아니었고, 체대생들과 훈육관들 모두에게 ‘장애인’으로 찍힐 정도로 몸이 빠르진 않았다. ‘후보생 상호평가’는 나 같이 빠른 속도로 적응하지 못하는 후보생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아까 언급했던 S를 포함하여 그들은 줄줄이 훈육심의로 넘어갔고, 몇몇의 경우 ‘성공적’으로 임관한 경우도 있었지만(S의 경우도 ‘악으로 깡으로’ 겨우겨우 임관까지 갔다), 다수의 경우 ‘퇴교’를 면하지 못했다. 난 계속 이 제도에 대해서 의심했는데, 이는 나쁘게 말하면 ‘싫은’ 후보생을 찍어내기에도 최적의 기제였고, 열등한 후보생에 대한 아무런 ‘동기부여’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2005년 9월 1일 난 나왔으니,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는 모른다. 아마 2005년 학사 46기는 유래없이 ‘퇴교자’가 많았던 기수였으리라 생각한다.

# 공군 기본군사훈련단 / 사관후보생 116기 – 27살 인문사회 대졸자, 인센티브 평가제

진주에 갈 때는 부모님과 같이 가질 않았다. 나는 ‘공군 사관후보생들 모두 모여라’ 카페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같이 도시락을 먹고 함께 입대했다. 평화로운 가입교가 시작되었고. 거기에서 가장 놀란 것은 평균적인 연령이었다. 여군들이야 경쟁이 치열해서 그렇다쳐도, 남자들의 경우도 24살들을 찾을 수 없었다. 25살이 된 나였기에 한 살 더 먹어서 그걸로 ‘나이 대접’을 받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는데, 27, 28, 29, 30살까지 다양한 ‘연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건 아예 불가능 했다.

훈련의 판도도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 중에 체대를 나온 사람은 조종 중대 말고 일반 후보생의 경우 116명 중 5명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센스있게 운동을 잘해서 훈련을 잘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건 ‘모범적’ 사례에 불과했다. 게다가 훈련소는 ‘각자책임’을 강조하지 않았다. 늘 책임은 ‘연대책임’으로 그리고 곧 ‘사후 116기’의 책임이 되었다. 매번 다 함께 “네 ~~~ 후보생”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대성박력으로 기합을 받곤 했다. 낙오되는 이들에 대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항공의무전대(항의전대)로 가서 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 ‘수진’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였다. 모두 ‘몸짱 캠프’에 온 것마냥 행동했다. 물론 가장 다들 잘 하는 것은 ‘이론 학과’였다. 필기야 뭐. 화장실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후보생도 좀 있었다. 나는 졸려서 잠에 들곤 했지만.

물론 공군에서도 가/감점 제도가 있었다. 이건 ‘상/벌점 제도’와는 기본적으로 뉘앙스부터 차이가 난다. 조금 더 하고 빼고와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은 차이가 있다. ‘벌점’이라는 말에는 이미 ‘처벌’의 뉘앙스가 있지 않나. 기본군사훈련단에서는 ‘죄를 지어’ ‘군법에 의해 처벌’ 받는 다는 느낌보다는 늘 ‘교정’ 받고 ‘동기부여’ 받는다는 느낌이 있었다. 오죽하면 기합을 ‘동기부여’라고 불렀겠는가? 어떤 의미에서 동기들은 ‘공산주의’를 체험하는 것만 같았다. 훈련기간 BX를 가는 일도 없었고, 같이 외박을 나가는 날도 똑같은 돈을 지급 받았다. 우리에게는 ‘돈’의 개념도 없었고 어떠한 ‘차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각자 훈련의 수행능력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의 ‘대대장’ 근무후보자들은 가장 우수한 후보생이 아니라 그냥 ‘한 번 떠들고 싶은’ 후보생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게다가 공군에도 당연히 ‘상호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 컨셉이 육군과 완전히 달랐다. 이건 ‘인센티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농담처럼 ‘나 특기 잘 풀리면 장기할래, 나 점수 줘’ 이랬고. 나는 굉장히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또 애당초 우리 기수에는 ‘조종장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고득점’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경쟁’에 연연하지 않았다. 특기를 ‘훈련의 결과’들과 ‘이론 학과’ 등등의 점수로 나누기는 했지만, 몇 명의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배정받은 특기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자대 생활’도 ‘공군장교’ 스타일이라면 어떤 것일지 알만하게 선배장교들인 훈육관들이 설명을 해주곤 했다. 공군에서는 육군에서 느꼈던 ‘강박’과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은 ‘잘리지 않는다’ 혹은 ‘다 끌고 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여기저기 ‘자유’의 공기가 은연중 묻어나오는 교육사령부의 분위기 덕택이었다. 특히 ‘정훈부’의 ‘중위들’(반례로 영천 3사는 대부분 교관이 대위 혹은 소령이었다)은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조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런데 어떻게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은 ‘훈련소’라고 할 수 있는가?? 난 매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박대기(사후 110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