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14] 독자를 바보 만드는 다이제스트, 난독증과 오독

책 vs 역사4점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뤼디거 마이 지음, 배진아 옮김/추수밭(청림출판)

#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그리고 다이제스트</span> </p>

독일에서는 근대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적으로 ‘교양’이라는 하나의 분과학문은 아니지만, 최소한 알아야 할 에티켓과 같은 ‘지식’의 카테고리가 있어왔고, 그 분야에서 분명 독보적인 저자들이 있긴 하다. 내가 보기에 ‘핵심 교양’ 즉 다이제스트 시리즈를 만들 수 있는 논자의 실제적인 모범은 디트리히 슈바니츠 정도인 것 같다. 자기가 쓸 분야의 ‘사상사’를 쓰거나 ‘지성사’를 쓸 정도가 되어야 다이제스트를 쓸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다이제스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교양’이라는 주제는 디트리히 슈바니츠 정도 급이나 움베르토 에코 정도나 되야 쓸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 같은 경우 각 분야에 대해서는 역사를 쓰지만, ‘교양’이라고 뭉뚱그려서는 그러한 책을 쓰지 않는데 그건 기력이 딸려서라기 보다는 한 권으로 뭉뚱그려 엮어내는 것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틈새’들을 이점으로 읽어내면 쓰는 것이고, 그 ‘틈새’들을 단점으로 읽어내면 쓸 엄두를 잘 못낸다는 게 맞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것은 ‘한 권’으로 내기로 했으면 한 권은 에피소딕하거나 내러티브에 충실하거나 간에 그 구성 자체는 꼼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살펴볼 <책 vs="" 역사="">의 저자 볼프강 헤를레스와 클라우스-뤼디거 마이는 그런 ‘교양-다이제스트’를 쓸 수 있는 자격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을 잡으면서 계속 느껴지는 것은 어떤 ‘편협함’들이다. 그리고 원래 나는 맑스-엥겔스, 들뢰즈-가타리, 네그리-하트 같이 둘이 쓰더라도 한 명이 쓴 것 같은 공저는 신뢰하는 편이지만, 대충 반땅 해놓고 서로의 관점이 별로 스미지도 않으면서 얼버무려 각자의 챕터를 쓰고 그것들을 엮어내는 시도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은 철퇴를 맞아야 한다. </p>

# 이해할 수 없는 시대 구분

제일 먼저 철퇴를 때릴 수 있는 부분은 이 책이 역사의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되어 ‘고대 – 기억의 역사가 시작되다’, ‘중세 – 종교를 위한 책에서 학문을 위한 책으로’, ‘근대 – 세상을 정복한 책’, ‘현대 – 생활 매체로서의 책’편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책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들은 각 부가 소제목으로 넣은 이름과 얼마나 걸맞는지 의문이다. ‘기억의 역사’와 <기하학 원론="">이 얼마나 대응하는지 알 수가 없고, <신국론>이 왜 ‘고대’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설명도 없다. 게다가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는 중세편에, 그리고 루터의 <독일어 성서="">는 근대편에 있는데. 중세에 <독일어 설교="">를 읽은 루터는 근대의 편에 있다면, 루터는 어디 사람인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기준도 아니라면, 어느 시점쯤이 ‘근대’라고 할 수 있을까? 표준적인 해석에 의하면 에크하르트도 ‘근대’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라틴어가 아닌 자기 ‘민족’의 언어로 책을 썼던 것이 ‘근대적’ 기술의 특징인데 말이다. </p>

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근대’와 ‘현대’의 무지막지한 구분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는 뭘 기준으로 ‘현대’라고 하는가? 나폴레옹의 <민법전>이 ‘현대’편의 첫 장을 이루고 있지만, 그 역시도 특별한 설명이 없다. 게다가 ‘현대’의 부제는 ‘생활 매체로서의 책’인데, ‘현대’ 장에 나와있는 책들을 살펴보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등장한다. “이건 뭐임?” 하는 소리를 멈출 수가 없다. 마지막 장은 J. K. 롤링의 <해리포터>가 등장하는데 도대체 연속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떤 책을 읽은 이는 이게 탁월한 저널리스트의 감각이라고 했는데, 이쯤 되면 이 책의 용도를 묻고 싶기도 하다. </p>

쉽게 말해 이 책에 나오는 순서대로 다 읽고 ‘지식의 보고’를 얻게 하자는 건가? 문제는 그것들이 특별히 ‘나름의 지도’조차 없이 나열되어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난독증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 오독, 그리고 찬양의 경우

구태여 스피박까지 동원하면서 저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할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서구-남성 편향적인 독해는 <말괄량이 삐삐="">를 가지고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걸 참작해서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오와 헌팅턴, 아도르노-호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오독과 해리포터에 대한 이상한 찬양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p>

사실 ‘고대’편에서 공자를 읽어낼 때부터 낌새를 챌 수가 있는데, 이들이 갖고 있는 마오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다’가 정답인 것 같고. 오로지 ‘분노’만이 가득한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을 잡은 새 ‘황제’는 중국인을 위한 새로운 가르침을 창조했다. 그 새로운 가르침은 공식적으로는 공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공자가 없었더라면 그런 가르침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중국이라는 나라는 유교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황제의 이름은 바로 마오쩌둥이었다.“(p.33) 그들의 ‘감수성’을 재단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의 ‘오류’ 정도는 지적할 수 있겠다. 중국은 유교가 만들고, 유교는 마오쩌둥의 가르침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오쩌둥이 어디에서 ‘유교’의 자양분을 받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으로 대충 ‘야부리’ 털어놓고 도망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평가를 할 수가 없다. 단순히 ‘선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마오쩌둥 어록="">의 내용에 대한 평가 없이, 중국 ‘대약진 운동'(책에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이라고 한다)에서 죽어나간 사람들과, 홍위병들에게 모욕을 당했던 라오서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평가할 거면 도대체 왜 ‘책’을 꼽은 것인가? 이 ‘책’이 역사를 바꿨다고 하면, 왜 이 책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평가해야 하나, 저자들의 평가는 서구에서 왜 인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이다. 게다가 그 이유도 ‘근사하게 들려서’였다. 대중을 ‘바보’로 아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라 볼 수 잇다. 아니 이런 말을 2010년에 하고 있는 내가 웃기기도 하다. 왜 ‘비열한 계략이자 함정’이었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그걸로 인해 벌어진 일만 나열할 뿐이다. </p>

이러한 습관은 <계몽의 변증법="">을 평가할 때에도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다양한 관점에서 거듭 변형시키면서 자신이 던진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이 저작의 문제점이 있다. 그들은 고민만 거듭했을 뿐,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p.303) 그러면서 슬쩍 포퍼를 편든다. “포퍼는 인류의 행복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모든 인간에게 강요하기 위해 분석을 예언으로, 진술을 변증법으로, 이론을 세계관으로, 계몽을 정치적인 신앙으로 대체할 근거를 헤겔의 철학과 역사적인 사명감 속에서 찾은 사람들을 계몽주의의 적으로 꼽았다. (……)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포퍼의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인기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누린 인기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논리적인 분석을 제시한 그의 저작은 정치적 종교의 경전으로 사용하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span>“(p.301) 저자들은 담담하게 ‘기술’하는 것같으면서 온당하지 않은 ‘인상 비평’을 통해서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를 골로 보내버린다. ‘지적 사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을 저자들은 제시하지 않는다. 무책임한 다이제스트의 최악의 케이스가 나타나는 것이다. </p>

마지막으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이야기할 때 나는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오독의 잔치이다. “슈뢰더는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 공격에 대해 연설하던 중, 중요한 것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 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했다. 헌팅턴의 저서에 대한 이런 반격은 세계에 지켜내야할 문화가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p.325) 이런 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논리학 교과서는 말한다. ‘세계에 지켜내야할 문화가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사례는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시되지 않는다. 동시에 ‘슈뢰더류’를 ‘발명’하면서 그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순전히 책의 제목만 보고 책에 반대했으며, 스스로의 사회 도덕의 수호자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의 작가(이때는 ‘저자’가 맞는 용어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문화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양한 문화의 충돌이었다.“(p.326) 말장난이다. ‘싸움’과 ‘충돌’. ‘충돌’이 어떻게 ‘싸움’이 되는지를 말했던 논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거기에 깔려있는 국제정치/국제정치경제의 특수성들이 제기되었었는데 저자들은 ‘다이제스트’라고 막말을 또 남발한 것이다. </p>

저자들이 행한 헌팅턴에 대한 최악의 오독는 이미 많이 제기되었지만 다음과 같다. “자유와 문명의 미래는 세계의 주요 문명을 이끄는 정치인과 지식인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데 달려 있다. 문명 간의 전쟁에서 유럽과 미국은 반드시 연합해 함께 행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리되어 제압당하게 될 것이다.“(p.326) 이걸 ‘대처할 방법’으로 저자들은 읽는다. 어처구니 없는 문장 아닌가. ‘자유와 문명의 미래’를 ‘정치인과 지식인’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그리고 ‘유럽과 미국’을 엮어 기독교 문명의 ‘제압당하’는 것을 막아야 할 사명. 이야말로 이슬람을 바라보는 이데올로기적 태도 아닌가. 에이 입만 아프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자들은 내게 “헌팅턴을 안 읽고” 말한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안타깝게 정치학을 전공한 나는 이 책을 레포트를 쓰기 위해 무료 ‘3독’이나 해버렸다. 이 ‘문명’과 ‘정체성’, ‘종교’에 대한 대답은 아마르티야 센이 더 정확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2009/12/3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같음과 다름 그리고 이름 붙이기 – 아마르티아 센 : 정체성과 폭력).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책의 저자들이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좌파’로써 이라크를 해방시키러 공격가자고 했을 때의 그 아우라와 비슷한 듯도 하다.

# 한 권으로 읽는다는 것

사실상 이 책만 비판할 것은 아니다. “하룻밤에 읽는 ~” 시리즈도 있고, 여러가지 종류의 다이제스트가 시중에 깔려있고, 이는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나는 모든 다이제스트를 비판할 생각도 없고, 점차 바빠지는 현대인들이 그나마 이런 책이라도 들고 다니는 것이 안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나 같은 대학원 생이나 연구실에 하루 종일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슬림’하게 만드는 시도나, 여러가지 ‘추천할 책들’을 엮는 시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엮어내는 ‘맥락’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펼쳐낼 때 기획하는 출판사들이 ‘어떤 저자’를 뽑아내서 그걸 맡기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이 라캉에 대한 다이제스트를 쓴다고 했을 때 누가 이의를 제기하랴? 또 들뢰즈가 푸코에 대한 다이제스트를 쓴다고 할때? 결국 문제는 그 논의의 ‘빽빽함’과 ‘정보량’ 정도가 될 텐데, 이 책은 그 지점에서 실패이고, 많은 다이제스트들이 그 부분에서 망하는 것 같다. 근데 이런 책들이 쎄빠지게 쓴 한 권의 ‘테제’가 있는 글들보다 많이 팔린다는 걸 생각할 때 ‘출판의 윤리’와 ‘저자의 윤리’ 그리고 ‘좋은 책’이라는 것 자체가 끝없는 논쟁지점이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당분간 ‘다이제스트’라면 학을 떼고 잘 안 읽을 것 같다. 이미 공증된 몇 명의 저자를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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