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15] 박원순의 낙관주의, 그리고 마을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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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40350X&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마을이 학교다</A> – <IMG border=0 alt=6점 src="http://image.aladin.co.kr/img/common/star_s6.gif">
박원순 지음/검둥소</TD>
<IMG border=0 alt="" src="http://image.aladin.co.kr/cover/cover/898040350x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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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285" target=_blank>2009/04/1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그래, 다시 마을이다! – 조한혜정, <다시 마을이다="">, 또 하나의 문화, 2007</A>
<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293" target=_blank>2009/04/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놀아봐야 놀 줄 알지 –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A>
</TD></TABLE> # 박원순, 희망제작소, 그리고 마을
2009년 7월쯤 박원순을 인터뷰하러 희망제작소에 찾아간 적이 있다. 그의 몇 가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박원순은 “요새 청년실업 이야기하면서 걱정들 많이들 하시잖아요? 저는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는 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게 볼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자, 보세요.” 하면서 스크랩한 숱한 자료들을 들고 왔다. “세상에 직업이 이렇게 많아요. 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고요. 다들 애타게 젊은 이들을 찾고 있어요!” 나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답답했지만, 그의 논조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관적 전망’을 말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들’을 계속 부각시키는 것이 누구 말마따나 ‘프레임의 전환’의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소셜 디자인’ 작업을 하는 희망제작소 활동가들과 이야기하면서 수긍했고 희망제작소 회원이 되었다. 또 다른 한 편, 나는 ‘마을’의 중요성에 대해 몇 년전부터 굉장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건 예컨대 마쓰모토 하지메가 버틸 수 있는 힘으로서의 ‘동네 공동체’에 대한 것이었고, 성미산 마을에 대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한 편 켄 리빙스턴이 이야기하는 ‘생태사회주의’와 로컬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문화연구를 공부하겠다고 한 것도 맞다. 우석훈과 조한혜정이 시너지를 내는 공통 분모에 일본의 지역에 기반을 둔 ‘청년운동’이 있었던 것도 맞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때부터의 생각들을 모아서 생각해 볼 때 여러가지 ‘의심’의 구석들이 등장했다. 그건 ‘신자유주의’라는 문제틀 때문이기도 했고, ‘마을’에 대해 말하는 관점들이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 박원순의 자유주의적 낙관주의 그리고 마을과 교육 박원순의 책 <마을이 학교다="">는 분명 장점이 많은 책이다. 예컨대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같은 책도 가지고 있는 장점인데, 정말 발로 뛰면서 지속적으로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대안적인 사례’를 찾아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을’에 대한 문제설정에 동의하는 많은 활동가들과 학생들에게 ‘자료’로써 훌륭하게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현재 움직이는 거의 모든 모범적인 대안학교와, 자율적인 초등학교와, 아동 청소년 공동체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많은 공동체, 학교들이 있다보니 여기서 누락되는 사례들이 ‘비가시화’되는 효과들이 있기도 하다. 예컨대 이우학교가 다루어졌는데, 간디학교가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박원순의 관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는 철저하게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늘 함박웃음 짓는 사진들을 찍으면서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자유주의적인 ‘다원주의’에 근거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책에서 박원순은 ‘자유주의’의 개념정의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지적할 수 잇다. 예컨대 그러한 전형적인 예는 교육부-교육청-각급 학교로 내려오는 위계에 대한 공격이다. “자율학교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교육청의 관계도 바뀌어야 한다. 교육청이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교육청과 협약을 맺는 ‘협약학교’가 많이 늘고 그 학교에 대해서는 교육청의 기존 관리 감독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한다“(p.94). 물론 관성화된 관료제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정당하다. 문제는 박원순의 이러한 논의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차터 스쿨charter school은, 학교에 대한 교육행정기관의 각종 규제를 없애는 대신 학교가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운영하는 새로운 학교 형태이다. 미국 교육운동 중 가장 혁신적인 대안학교로 꼽힌다. 1991년 미네소타 주에서 학부모 학생에게 ‘학교 선택권’을 주기 위해 처음 도입했고 현재 미국 전역에 약 3천여 곳이 있다“(p.103). 이 쯤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볼 지점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가 교육정책을 통해 말하려 했던 ‘마이스트 고교’나 ‘자립형 사립고’와 ‘차터 스쿨’은 어떻게 다른가? 이는 마치 해리포터가 주는 판타지와도 같은데, 꽉짜여진 관 중심의 교육, 꼰대같은 선생들, 악다구니 부리는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자율적’으로만 실행하면 될 것 같다는 판타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목표는 ‘진보적’이어도 그것들이 곧 바로 ‘자본’을 경유하는 노리개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박원순은 공교육이 붕괴하는 것을 개탄하고, 그 가능성을 대안학교에서 찾으려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박원순은 애써 무시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본문에도 그러한 이야기들은 줄기차게 나온다. “이광호 소장은 이우학교의 이중적인 선진성을 괴롭게 실토한다. 인간적인 교육을 하면서도 수능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이우학교의 양면성 말이다. (……) 이렇게 가르쳤는데도 이우학교는 100대 수능 학교에 들었고, 외국어와 언어 영역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사회적 책무성을 높이는 교육을 하면서도 오히려 수능 학업 능력도 높아진 것이다“(p.53). 이우학교가 ‘귀족학교’로 불리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박원순이 이 이야기를 다루려면 분명 정교하게 뭔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러한 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고산산촌유학센터는) 학교의 모든 재정을 아이들의 유학 비용으로 충당하다 보니 오히려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모의 아이들이 온다고 한다. 부모의 직업 비율을 보면 의사, 회계사 등 고소득 직업이 5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원의 일부는 사회적 취약 계층의 아이들을 받고 있다“(p.195).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견될까? ‘일부’ ‘사회적 취약 계층’이 그 공동체나 학교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이 게토화 되지 않게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해 답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박원순은 특별한 대답이 없다. 그러면서 손쉽게 ‘대안’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대안학교와 고산산촌유학센터 같은 곳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공동체나 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보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간 계급의 386들이기 때문이다. 박원순의 자유주의적 믿음과 낙관주의, 그리고 명확한 변별없이 뭉텅이로 엮어버리는 기술은 비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인천의 ‘기차길옆작은학교’가 그렇다. “이곳에는 20대나 심지어 10대에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인생의 출발부터 어렵게 시작하는 것이다. 김중미 씨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상당수는 10대 후반에 시골에서 가출해 이 지역으로 올라오거나, 만석동에서 나고 자랏지만 원래부터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결혼하고 낳은 아이들이 이제 20대가 되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그 부모들 세대와 비슷한 위치에서 살아간다“(p.230).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분명 재개발로 인해 계속 몰락하고 있는 빈곤계급의 문제이고 이는 구조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모순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박원순의 대답은 내가 듣기에 쿨하다 못해 황당하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꿈과 희망이 있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운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좀 더 넉넉하고 여유로워지기를 바란다“(p.239). 우리 사회가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지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 이거야 말로 ‘자선’으로 빈부격차를 해결한다는 18~19세기 미국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발상 아니었던가. 물론 여기에서 분명한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 같고 이것을 이 자리에서 길게 평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전혀 다른 공동체들을 모두 ‘대안’이라며 놓는 것은 많은 지점에서 모순으로 등장한다는 점 정도를 지적할 수 있겠다. # 지역, 사회적 경제 그렇다고 해서 박원순의 모든 주장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면 그가 말하는 ‘지역/로컬리티’의 문제틀이 분명 중요한 지점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역과 결합하는 교육 공동체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중앙으로 집중되고 모든 것들이 나름의 ‘장소’를 잃어버리고 ‘현장’이 망각되는 것을 생각하면 박원순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풀무학교 생협은 1977년부터 시작해서 비누와 빵을 만들어 직거래하고, 직판장을 운영하고, 졸업생이 요구르트 공장을 세웠다. 이후 어린이집이나 전원마을, 생활유물전시관, 에너지센터, 장애인복지기관, 노인복지기관도 생겼다. 인구가 적어서 주민 조직이 활성화되는 데 20년이 넘게 걸리긴 햇지만, 주민 조직도 굉장히 발달해서 10여 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다“(p.22). 협동조합 등을 통한 ‘사회적 경제’ 이야기는 분명 다른 방식의 ‘대안 경제’를 말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전문가 주의’에 입각한 ‘교사’들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체제에서 벗어나 ‘마을’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한 지점도 너무나 적절하다. “합기도, 서예, 도예, 탁구 등을 모두 동네 안에서 배운다. 현장학습 장소는 거리가 멀지 않다. 마을 어른들과 마을에서 일하는 분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다“(p.32). “보통 마을 축제라고 하면 먹고 마시고 노는 게 다이다. 마을 주민들은 객석에 앉아서 초대된 가수의 노래를 듣기만 한다. 자신의 마을, 자신이 주인인 행사에서 ‘관객화’ 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 공동체 문화는 잔치 문화다. 서로 모여 음식과 가진 것을 나누고, 모두 주인공이 된다“(p.123). 분명 이러한 지적들은 새겨들을 구석이 있다. 또한 교장 공모제 등의 효과에 대해서도 박원순은 놓치지 않고 지적는데, ‘아래에서 위로-상향식bottom up’되는 방식으로 교육을 구성하는 대안들은 직접민주주의적이며 굉장히 유익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최신 경영학 패러다임이 접목된 방식의 ‘고객 마인드’라는 말들이 등장하고 ‘창의 경제’ 등의 내러티브가 구사될 때 나는 어떻게 이것들을 다뤄야 할 지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는다. ‘신경제’ 혹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이 늘 ‘창의력’있는 인제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박원순의 말도 그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위에서 언급한 차터스쿨 등의 이야기와도 맞물린다. ‘이윤’ 등의 필요가 분명 ‘사회적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동력이지만, 이는 자본 증식의 메커니즘이라는 ‘상위’ 규칙에 의해서 언제나 휘둘릴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가 증명한 바 아닌가. 마치 68 운동의 히피즘이,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독점자본’과 스티브 잡스의 ‘애플 자본주의’로 빨려 들어가듯 말이다. 이 지점쯤 되면 나는 끊이지 않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대안학교 교사들은 ‘노동조합’을 구성할 수 있는지 등의 ‘구태의연한 질문’부터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난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우리 선생님들은 일주일에 3일은 밤 12시까지 야근을 합니다. 양평초등학교 전체 야근이 우리 학교의 야근 시간보다 더 적을 겁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악독한” 교장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p.159). 어쨌거나 이 책은 덕택에 많은 생각할 거리를 늘어놔 주니 이래저래 자극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