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성역화. 폭력의 재현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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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기를 써야하는 것이 맞으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걸 정리해야 여행기를 쓸 수 있을 듯하다. 어제 만난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내는 결혼 한 지 35년이 되는 환갑을 넘긴 사내였다. 나는 그와 그의 아내와 동석을 해서 소주 몇 병과, 맥주 몇 병을 비웠다.

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실 때 나왔던 이야기는, 그의 전직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실한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신의 음주와 흡연 행위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보여주곤 했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지만, 자신은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 거기에 대한 비판은 적절한데, 끊기가 쉽지 않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술꾼이었던 예수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그렇게 가르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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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변가에서 버터구이 오징어와 쌀과자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면서 그 사내가 했던 말을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부부는 내가 글을 써서 여기저기 팔아먹기도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내게 자신들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 좀 기술해 달라며 부탁을 했다. 난 맥주를 마시며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 사내는 자신이 이혼할 뻔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어느 날, 그 사내는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고 있었다. 입지전적인 삶. 고아에서 이제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잡고 남부럽지 않게 살기 시작했던 그 사내는, 아내가 아침에 이럴 거면 ‘이혼’하자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낮에 그녀의 동선을 파악한 그 사내는 차를 끌고가서 그녀의 뒤를 ‘덮쳤다고’한다. 그리고 그녀를 차에 실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했다고 한다. 그녀는 차에 다리가 밟혔는데, 다행히 ‘신경’은 건드리지 않아 ‘불구’는 면했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일단 ‘적개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컷의 ‘힘’을 가지고 자기 아내를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것 자체는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고, 그리고 놀래서 그녀를 병원에 후송하는 행위 자체는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려 놀란 것은 그 사건에 대해 회고하는 그녀의 톤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것이 ‘그 사내’의 드라마인 것처럼, 자신은 그 드라마의 ‘조연’인 것처럼, 그를 온전히 이해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사내는 자신에게 ‘가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면서 ‘변명’도 아닌 ‘정당화’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톤으로 묵묵히 사건을 표현했다. 가정이 깨지느니 아내가 죽고, 자신도 죽겠다는(?) 그의 결의에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의 결의에는 ‘진실함’이 묻어 있었다. 이는 그야말로 ‘신앙인’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비장함은 그녀의 맞장구로 인해 ‘진정성’을 획득했다. “이 사람이 허튼소리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그녀의 발언은 그의 비장함을 상승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가 내게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였다. 이미 공소시효는 지났다. 그는 사건의 ‘야마’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할 계획이 없었다. 외려 자신의 ‘비장함’과 ‘진정성’에 대한 호소만이 난무할 따름이었다.

예컨대 폭력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약자’의 ‘신화’가 되어버리고, 그는 ‘약자’가 되어 저항을 했던 것으로 정리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분명 대립축에 있던 그녀는 이미 그 사내의 모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나이가 먹음에 따라 ‘명예남성’이 되었거나, 시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담담한 것일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어떤 ‘내적 상처’ 따위는 없었을까. 폭력은 왜 이렇게 ‘가족의 신화’와 더불어 재현되고 말았을까.

가장 무서웠던 것은 위에 언급했듯이 그 사내가 정말 신실하고 정직하고 늘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