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인성, 가난, 물질적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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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군가의 ‘인성’에 대해 공격하는 것을 싫어한다. 반대한다. 분명 싫은 사람도 있고, 입장으로 명확하게 누군가와 반대의 자리에 설 때가 많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인성’을 걸고 넘어가는 것에 반대한다. 먼저 ‘인성’이 기본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되 그것은 개인적인 ‘성찰’에 따라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그녀는 압도적으로 그가 처해있는 상황,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조형된다. 난 후자에 더 무게를 싣는 사람이다.

 ‘성찰’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 자체에 반대한다. ‘성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이 부족하다”라는 말 자체가 나는 성립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는 ‘희생’과 비슷한 단어로 내게 느껴지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할 수 있고,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희생’(‘성찰’)이 남에 대한 숭고함에 대한 예찬으로 읊어지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비판/비난/힐난/평가의 단어로 등장하는 것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타자’의 눈은 늘 중요한데, 그것은 철저히 ‘내부화’될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눈’이 망치가 되는 순간 그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라는 게 기본적인 내 생각이다.

요컨대 성찰을 강요하거나 인성으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다른 한 편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그것은 어쩌면 ‘사회적 관계/구조화하는 힘’의 누락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찰에 대한 ‘권유’는 대체로 인성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청자가 그것을 순전히 ‘조언’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일까. 그게 가능하지 않다면, 곧 바로 결국 ‘착한사람의 억울함’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호의로 ‘성찰’을 조언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그/그녀는 ‘삐딱한’ 태도로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 결국 그/그녀의 ‘인성’에 문제가 있거나 ‘성찰적’ 주체가 아님을 입증되었다. 그리고 조언한 ‘착한사람’은 ‘억울’하다.

So what? 결국 나의 그/그녀의 맥락에 대한 이해는 증발해버릴 수밖에 없다. 이는 여러 활동가들의 ‘페다고지’ 프로그램에서도 누차 발견되곤 한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 더 강하면 강할 수록 위험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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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대체로 ‘상대적’이다. 또한 여전히 ‘절대적’이다. 가난은 단순히 와인바에서 와인을 마시고 싶을 때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셔야 하거나, 그 마저도 없어서 편의점에서 캔 맥주도 비싸서 카스 병 맥주 한 병을 사고, 안주도 없이 먹는 그런 ‘상대적’인 것만이 아니다. 삶의 ‘존엄’이 무너지는 사람에게 ‘정신적 토대’는 결핍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들의 삶은 ‘잔인해’지는 것으로 ‘정신적 토대’에 복수를 하고 만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나는 ‘인성’과 ‘성찰’을 남을 바라보는 평가의 저울이나 시력을 교정해주는 렌즈로 활용하는 것을 싫어한다. 반대한다. 그것은 ‘물질적 토대’ 때문인데, 그것은 단순히 ‘가난’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예컨대 그 ‘가난’으로 엮어서 말하는 시선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문제를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인데, 물질적 토대라는 말은 그것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아무 것도 ‘정당화’하지 않지만 그것은 많은 것을 ‘설명’하기는 한다. ‘성찰’과 ‘인성’을 ‘평가’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면, 즉 쉽게 말해 ‘열받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처한 ‘맥락’, ‘물질적 토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일이다.

매일 악다구니를 부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노출되는 것과, 모두 ‘인간의 예의’를 다하면서 자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인간 자아를 조형한다. 물론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해야하는 지에 대해,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특별하지 않음에 대해 분명히 생각을 해봐야 한다.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가난해도 용기있고 떳떳하며, 가난하기때문에 더 따뜻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개인들을 알고 있고,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몇 몇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때마다 행복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가난하기 때문에 야비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비겁하고 비루하며, 가난하기 때문에 더 차갑고 여유없이 빡빡한 계급재생산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자의 ‘훌륭한 사람’들에게 예찬을 하되, 후자의 ‘진상/양아치’같은 삶에 대해 매도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려 한다. 후자에 대한 비난은 굉장히 간편하다. 그들에게 성찰을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순환논리가 시작되는데, 그들은 ‘야비하고, 비겁하고, 비루하며, 차갑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 그러한 것들은 단순히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난 그들에게 ‘성찰’을 권유하지 않는다. 그/그녀들의 삶이 완화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더욱 더 잔인해질 것이라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 말은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가난해도 용기있고 떳떳하며, 가난하기때문에 더 따뜻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개인들”에 대한 비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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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당화의 습관이야말로 늘 ‘강박적’인 삶을 살아온 경험의 누적이며, 그의 관계를 살펴볼 때 그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 아니 손쉽게 유추하기 쉽지 않다. 그의 드러난 것만으로 그를 판단할 수 없다. 물론 난 누군가의 ‘변명’들을 계속 듣고, 나 역시 숱한 ‘변명’을 늘어놓고,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그 ‘정당화’를 들어주지 않는 수준에서 끝내면 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이 변명을 일삼는 자를 ‘축출’하는 수순으로 간다거나, 그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즉  “넌 거짓말을 많이 하니까”라는 이유로 선생이 학생을 따돌리면서 말할 때 난 그 선생의 목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예컨대 ‘우정과 환대’ 혹은 ‘성찰적 자아들의 공간’ 또는 ‘삶에 대한 존중’이 가능한 공간과 구태여 어떤 방식으로 노동하고, 부를 어떻게 분배할 지, 그리고 누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교하게 말하는 것이 늘 달라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가난하면서 훌륭한 사람들은 부디 여전히 ‘성찰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잘 보살피고, 가난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들도 역시 자신들이 언제 갑자기 ‘가난해짐으로 야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잘 보살피면 될 일이다. 그게 싫으면 ‘성찰’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된다. 어떤 경우에는 ‘호의’가 ‘거래’보다 훨씬 더 폭력적일 수도 있다.</p>

</SPAN>외려 물질적 토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서로 ‘인정하기’ 위한 내 생각의 기초적인 장치다. 손쉽게 분노하지 않기 위한. 열폭이 삶을 파멸할 정도로 내 삶의 기반은 언제나 튼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터지면 날 건사해줄 사람이 없다.”

그 고립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성찰’이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 한 들 내게는 사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