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16]루스 베네딕트가 본 일본, 그리고 지금

국화와 칼10점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을유문화사

2010/07/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11] 오타쿠와 포스트모던
2010/01/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2010년 지금. 문화를 번역한다는 것은? – 김현미,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2009/05/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뻣뻣한 정치학도, 인류학의 세계로 풍덩!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2003</a>
2009/05/1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교과서를 읽다가, 문화의 시대를 생각한다- 원용진,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한나래</a>
2009/08/2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우정과 환대의 지식 공동체 – 조한혜정 외 : 교실이 돌아왔다, 2009
  </td> </tr> </table>

#인류학의 시선

문화연구를 공부하다보니, ‘인류학’을 분리하고 뭔가를 할 수 없다. 인류학적 방법론이 가지는 장점이 분명 있다. 예컨대 양적 방법론으로 수치들을 해석하고 있을 때, 그것들의 ‘지반’을 현장에 직접 들어가서 현장조사, 참여관찰, 인터뷰 등으로 달리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이론을 파악할 때에도 그것의 논리적 근거를 따지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현장의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거기에서 어떤 ‘시선’과 ‘편향’들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단순히 해체하는 것을 넘어 재구성할 수 있는 점은 분명 인류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인류학에 대해서 사람들은 ‘고고학자’를 바라보는 눈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볼 때가 있다. 예컨대, 19세기 인류학자들이 했던 작업들을 지금을 바라보는 준거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예컨대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하나의 ‘통과의례’로 현장연구를 통한 문화기술지ethnography를 제출하게 하는 전통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관점은 맞다. 하지만 이는 마치 현장연구fieldwork이 인류학적 작업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반쯤은 틀리다.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텍스트들과 여러가지 ‘발언’들 을 가지고 구성하는 작업들도 인류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관점들이고 이러한 관점들은 여러가지 분과학문들에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현대에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류학자인 빅터 터너의 ‘코뮤니타스-우정’에 대한 이론 등은 여러가지 공동체의 형성들에 대해서 신문방송학 등에서 연구할 때 주요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조한혜정이 자주 하는 작업이었던 ‘수업 공동체’에 대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연구 방법은 어찌보면 전형적인 ‘인류학적’ 방법이다. 요컨대 예전처럼 인류학자라고 해외로 나가 ‘원시적 풍습’을 가지고 있는 원주민들을 조사하지는 않는다. ‘현지인 인류학Native Anthropologist’이 대세가 된 지도 오래다. 게다가 탈식민주의적 관점들은 인류학자와 연구참여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루스 베네딕트가 본 일본

<국화와 칼="">에 대해 샅샅히 파헤치는 리뷰는 블로그라는 공간을 통해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크게 보면 일본의 계층제에 대한 논의, 고(효)/기무(의무)/기리(의리)/마코토(성실성)/자기 수양/아이 양육에 대한 이야기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일본인을 보면서도 한국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단순히 적대적인 ‘반일감정’의 관점을 떠나서 조금만 열어놓고 읽다보면 거기에 한국인이 존재한다. </p>

루스 베네딕트는 도대체 왜 이 책을 썼을까?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와 유혹에 빠진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한 훈련을 받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p.21). 1940년대의 서양인의 눈으로는 이 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처한 난점이었다. 그런데 이를 명료하게 해석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종주의’적인 편견들이 작동하여 “그들은 기질이 썩었다” 등의 ‘기질론’으로 환원되는 시도등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일본인은 믿을 수 없다” 등등.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은 “조센징은 맞아야 한다”식으로 일본인에 의해서도 무한반복되기도 했었다.

루스 베네딕트는 그런 단편적인 관념을 넘어서, 그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그 자료는 그들이 기록해왔던 자기-기술들과 매체의 보도, 일본인들이 쓴 책들, 그리고 재미 일본인들과의 인터뷰였다. 전형적인 인류학적인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너무 많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헤매게 된다. 일본문화 오타쿠들이 종종 만화의 구절을 따르는 “넌 나에게 치욕을 안겼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게 된 것도 ‘이름에 대한 기리’를 강조하는 일본 문화에 대한 베네딕트의 분석 덕택이다.

종전이 되자마자 왜 일본인들이 군 소리 없이 항복을 하고, 왜 일본인들이 ‘현세’에 충실하며, 자기수양에 열중하는지 등에 대해서 베네딕트는 훌륭한 설명을 보여준다. 천황에 대한 ‘만분의 일’도 은혜를 갚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고를 완전히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기무’라는 관점에서 자신들을 끊임없이 조이면서 충성을 다하는 모습 등이 군국주의와 종전 이후 ‘민주주의’의 수용에 있어 핵심적이라는 베네딕트의 주장은 탁월하다.

또한 왜 일본인들이 매번 겸양의 표현을 하고, ‘혼네’를 잘 드러내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기리’에 대한 베네딕트의 분석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기리는 아주 괴로운 일이자 ‘본의 아닌 일’이다. 따라서 ‘기리 때문’이라는 표현은 일본인에게는 번거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말이다“(p.187).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받지 못하는 것도 ‘기리’를 통해서는 잘 설명이 된다. 이름에 대한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늘 자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이름에 대한 기리’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되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방식으로 갔다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현대의 상황에서 ‘자살’로 자신에 대한 치욕을 씻는다는 것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무와 기리에 대한 관념과 계층제가 강했던 일본의 문화를 함께 보면, 유교에서 ‘인仁’이라는 관념이 삭제된 상태에서도 일본이 어떻게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만들어갔는지를 파악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굉장히 제도화가 잘 되어 있었기에 안정적이었다. “일본인은 이런 제도 아래 있으면서, 무력적인 계층제도의 지배 하에 놓였던 몇몇 다른 나라의 국민처럼
온화하고 순종하는 국민이 되지는 않았다. 각각의 계급에 일종의 보증이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천민계급일지라도
특수한 직업을 독점할 권리를 보증받았고, 그 자치단체도 당국의 승인을 받고 있었다. 각 계급에 가해지는 제한은 컸지만 그 대신
질서와 보증이 있었다
“(p.103). 조선을 이런 관념으로 살펴본다면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 지 흥미로워 보인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조한혜정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양육-프로이트와 멜라니 클라인의 가설에 대한 비교-편과 함께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화가 가능할 것 같다. 아무래도 ‘돌봄노동’과 ‘가사노동’, 그리고 ‘육아’의 의무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여성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바깥에서의 남성 필자들이 볼 수 없는 부분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일본의 생활 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이다. 그것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가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자유는 최저에
달한다
“(p.336). 가부장제가 강했던 조선의 육아와, 1970년대 이후 ‘산업화’를 거친 한국의 육아를 함께 비교해봐도 좋을 것 같다. </p>

또한 젠더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여성’과 ‘남성’이 탄생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이는 앉는 방법뿐만 아니라 자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일본 여인이 자는 모습을 보이기를 꺼려하는 것은, 미국 여인이 나체를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사내아이는 아무렇게나 잠을 자도 괜찮지만, 여자아이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곧바로 편 채 자야 한다. 이것이 사내아이의 예의범절과 여자아이의 예의범절을 구별하는 최초의 규칙 중
하나이다.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요구도 하층계급보다 상류계급이 더 엄격했다
“(p.353). 여기에서도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가설이 입증된다.

베네딕트는 단순히 ‘서구인’의 관점에서 일본을 보았다기보다, 최대한 일본인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준거로 하여 분석을 했고, 외려 그녀의 시선에서는 ‘공감’이 비춘다. 하지만 미국에 대일본 정책을 제언하는 부분에서 여전히 일본은 ‘수동적 객체’로 소환될 따름이다. “만일 학교나 군대에서 나이 많은 소년이 어린 소년에게 개처럼 꼬리를 흔들게 하거나, 매미 흉내를 내게
하거나, 다른 사람이 식사를 하는 동안 물구나무서기를 시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면, 천황의 신성 부정이나 교과서에서 국가주의적
내용을 없애는 것보다도 일본의 재교육에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p.366). 물론 이런 비판이 지엽적일 수는 있겠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장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 것이다“(p.413).

# 오타쿠의 시대, 베네딕트의 현재성은?

일본 문화에 대한 베네딕트의 이론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아마 이 책의 초판이 번역 출간되었던 1974년의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반일감정’이 심했던 시기 이 책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을지는 나도 잘 확신이 없다.

그리고 베네딕트 이론의 ‘현재성’에 대해 좀 질문하고 싶은게,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혁명이 불가능할 것 같은 암시를 한다.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p.396).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68년을 기점으로 일본에서도 ‘전공투 세대’가 일어났고, 사회적 반향을 엄청나게 일으켰으며 그 주역들은 현재 민주당 정권에서 일정 부분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고, 그 문화적 힘은 굉장하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베네딕트 이론의 ‘파산’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애당초 일본인의 여러가지 문화적인 속성들이 ‘역사적’으로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변동’들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갔는지를 좀 탐구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가라타니 고진 등을 읽을 계획인데 그 부분에서 고진은 어떻게 읽어낼까가 궁금하다.

동시에 ‘내셔널리즘’이라는 관점으로 읽어낼 때, 어떤 조건들이 다시금 ‘평화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던 일본에서 ‘극우파’를 양산했는지도 좀 궁금하다. 이를 경기 침체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우파들의 ‘기획’으로 읽어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던질만한 이야기는 ‘오타쿠’의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의 일본에 대한 궁금증이다. 아즈마 히로키 등의 논의 등이 보여주는 ‘신세대’ 들은 얼마나 베네딕트가 보여주었던 ‘일본인의 성향’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것들은 어떻게 변용되거나 유지되거나, 혹은 여전히 강고하게 뿌리깊게 박혀있을까? 궁금하다.

탄탄하게 쓰여진 논의를 보고 나면 늘 뿌듯하되, 이것들을 다 머리에 처 넣고 싶어져서 불안해진다. 강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관련된 다른 논의들을 보면서 ‘지도’를 만드는 길인데. 어떤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까? 일단 일본을 다녀와야 겠지?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