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17] 그냥 엉덩이 책상에 붙인다고 공부인가요?

공부2점
김열규 지음/비아북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책을 ‘인문학책’이라고 해야하는지 혹은 ‘수필’이라고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다루는 주제가 문학과 논리학를 돌아다니는 수준이라고 보면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책에 대한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라는 점에서는 그냥 ‘수필’로 보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좀 생각해보면서 내린 결론은 그냥 ‘인문학자’가 쓴 ‘수필’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언젠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를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이 책에 대해 ‘일말’의 기대라도 했었지만, 여지없이 부숴졌다. 이 책을 읽는데 드는 시간 1시간 20분. 빽빽한 철학책이나 사회과학책 1페이지 분량이, 이 책에서는 대체로 5페이지 정도가 되는 것 같다. 그나마도 ‘중언부언’해서 내용을 채웠다고 볼 수 있다.

팔 순 노학자가 글을 쓴다고 해도 이제는 ‘여지’를 별로 둘 수 없는 세상인게, 한참 ‘프랑스 철학’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나, 여전히 New Left Review 등에 글을 쓰는 홉스봄 등을 보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진 않아도 팔 순이면 자신의 글이 어처구니 없이 나왔을 때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공부를 할 대로 한 사람이 ‘공부의 맛’에 대해 논하는 것은 당연하다. 김열규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한 사람이라고 본다. 평생 민속학과 문학에 천착했던 그가 후학들의 ‘게으름’에 대해 회초리를 들 때, 우리 또래에서 ‘회초리’라는 것이 꼰대질이라고 비판받는다 하여 그에게 그 기준을 손쉽게 내밀 수는 없다. 그 부분에서 김열규는 정당하다.

외려 내가 비판을 하는 지점은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공부의 실용주의’이다. 그가 예를 들듯이 학생을 떠나, 직장인도 평생 공부에 빠져드는 상황이라는 ‘인식’은 적절하다. 하지만 ‘논설문’ 부분에서 그렇게 ‘시비 걸기’가 필요한 것이라 말하던 김열규는, 뒤죽박죽 되어버린 ‘공부’의 양상에 대해 아무런 ‘시비 걸기’를 하지 않는다. 예컨대 김열규의 ‘공부 세계’에서는 미셸 위의 공부와 공병호의 공부와 알랭 바디우의 공부와 김우재의 공부가 모두 같은 공부다. 그걸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고, 땀에 흥건하게 젖어서 엉덩이가 도로 의자에 붙은 ‘공부의 추억’만 공유하는 걸 드러낼 따름이다. 그게 다 공부일 수 있는데, 그러면 그냥 공부는 한 ‘딜레탕트의 습관’ 혹은 ‘훈육의 흔적’ 양 갈래 길밖에 안 남으며, 그것이 담지하는 ‘세계’와의 관계는 무화되고 만다.

차라리 ‘공부工夫’라는 말이 가지고 원뜻대로 도올처럼 푸시업과 체조나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이 훨씬 ‘관념론’에서 벗어난 ‘몸의 공부’에 더 도움이 되며 훨씬 더 ‘비판적’으로 보인다.

요컨대 인문학이 가져야 할 본령으로의 ‘비판’은 ‘시비 걸기’라는 수준에서 포섭되고, 그 다음에는 “공부 열심히 한 당신”에 대한 예찬 만으로 책이 가득차 있다. ‘호모 클릭스’, ‘호모 스투디오수스’ 등을 이야기할 때 신선한 듯 하다 다시 보면 그냥 ‘세태’ 혹은 ‘기술 발전 수준’을 보여줄 따름이다.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 ‘한국 통’을 넘어서 ‘지구 통’이 되라고 말하는 책이 가지고 있는 정보량 치고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결국에 김열규가 에필로그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전인적 인간’이었을 따름이다. ‘전인적 인간’ 누가 모르나. “에이 시간 아까워”가 솔직한 내 독서의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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