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펴라, 놓아 버려라 (향후 작업 계획)

2010/08/1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좌파 이론의 쓸모에 대해서 – 며칠간의 노-홍-한-레의 논쟁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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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나 역시 한 명의 주사파들 근처에 있는 대학생이던 시절 굉장히 좋아하던 노래가 있었다. ‘조국과 청춘’의 <손을 펴라="">라는 노래였다. 그루브한 사운드 때문에 좋았는데, 나중에는 박노해의 시였다는 걸 알고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노래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선가는 원숭이를 잡기 위해 한 손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의 주머니 하나를 마련한다고 한다. 주머니 속에는 쌀이 담겨 있다. 원숭이가 그 쌀을 먹으려고 와서 손을 집어넣으면 쌀을 집을 수는 있는데, 주머니의 주둥이가 좁아서 쌀을 쥔 채 손을 뺄 수는 없다. 원숭이는 아둥바둥 대기 시작하고, 쌀을 놓으면 도망칠 수 있는데, 이 멍청한 녀석은 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도망치지 않고 그걸 움켜쥐다가 사람들에게 잡히고 만다는 내용. “손을 펴라, 놓아 버려라. 한 번 크게 놓아 버려라.”라는 가사는 그래서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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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논객’이라는 것, ‘파워 블로거’라는 지위에 대한 공명심이 대단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술 마시면서 떠들 때는 몰라도, 즉각적인 논증을 통해 반박과 재반박의 공박을 수행하기에 그리 적절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게 쓰다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일단 즉각적인 논증이 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게 적절해 보이는 것은, 연구를 하고 그것들의 자료를 모아서 한 묶음으로 모아서 하나의 ‘내 이론’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 읽어야 할 이론들(사회과학,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내게는 너무 많다.

글을 읽는 대상을 생각할 때, 대중적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로 크게 나눌 수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지향하는 것은 다른 ‘논객’들과 비슷하게 전자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서 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전자의 글쓰기를 한다고 하여서 누구나 ‘논객’ 혹은 ‘비평가’로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걸 한 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컨대 ‘논객’의 자질은 내게 지금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게 후천적 ‘블로그’ 혹은 ‘게시판’ 또는 ‘미디어’를 통한 대전을 통해 생기는 감각이라 할 지라도, 내가 잘 가지게 되는 감각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빠른 속도의 논쟁에 개입하기보다는, 일단 ‘내 필드’를 만드는 것. 그게 아무래도 ‘문화연구자’의 자세인 것 같고, 동시에 그 작업들을 통해 ‘글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대한 대답들도 다른 방식으로 나오는 것 같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 내가 언급할 것은 확실히 아니고, 엉거주춤하게 ‘논객’ 마켓에서 잘 나가보려다가 5년 안에 소멸될 것 같다. 그길은 적어도 내 길은 아닌 것 같다. 다시 ‘연구’와 ‘분석’ 그리고 ‘학습’을 토대로 살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글을 쓰려 한다. 일본에서 논쟁들을 읽으면서도 든 생각이다. 지금 내게는 ‘필드’가 없다. 그 ‘필드’에 대한 감각을 다지는 것이 지금 내게 필요한 작업이다. 폴 윌리스의 작업과 스튜어트 홀을 잊지 말 것. 조금 늦는다고 영영 늦는 건 아니지.

책을 읽는 계획도, 책을 읽는 방법도 다시 짜야할 것 같고. 데이터를 다루는 방법도 달리 익혀야 할 것 같다. 석사학위 논문까지 딱 한 학기가 더 남았을 따름이며, ‘사회과학 저자’라는 것이 뭔지 잠깐 감을 잃었던 것 같다. 감을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