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 효과 – 2010 그린비 학술 심포지엄

자세한 사항은 : 알튀세르 심포지엄 블로그 참조.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절대로 우회할 수 없는 이론가가 있다면, 아마 세 명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튜어트 홀, 루이 알튀세르, 안토니오 그람시 정도가 그럴 것 같다.

물론 최근의 이론가들이 존재한다. 저 ‘현대 정치철학’이라 불리는 장에서 격돌 중인 이론가들이 바로 그렇다. 이택광이 ‘4대 천왕’이라 부르는 지젝, 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를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등장했던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등등. 숱한 ‘정치철학자’들을 모두 ‘문화연구’의 품으로 읽어내는 방식도 있겠지고, 난 일단 거기에 대해 큰 관심은 있지만 그것들의 ‘유의미성’에 대해서는 좀 유보적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문화연구는 그러한 ‘이론’들과 동시에 ‘현장성’ 혹은 ‘실천’이 같은 지평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예컨대 랑시에르가 좋지만, 그의 <무지한 스승="">에서 지칭하는 스스로의 페다고지에 대해서 새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보라. 투박한 프레이리의 말에 이미 많은 ‘계기’들이 내재해 있다.

어쨌거나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주는 구조적 제약에 대한 이야기는 알튀세르가 한 차원에서, 그리고 그와 다른 방식으로 ‘장치’ 혹은 ‘효과’로서 읽어낸 미셸 푸코가 한 차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에 대해서 그람시의 이론들에 문화연구는 크게 빚지고 있는 것 같다. 스튜어트 홀은 알튀세르와 그람시를 한데 엮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튜어트 홀에 대해 ‘개량적’이라고 손쉽게 비판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에 대해 평가해야하는 것은 폴 윌리스도 마찬가지지만 지속적으로 ‘현장’에서 그것들을 맥락과 함께 읽어내는 ‘경험연구’를 진행했다는 점에 있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는 문화연구자의 규준이라 말할 수 있다.

푸코를 한동안 읽던 나는 다시금 알튀세르를 떼어놓고 푸코가 이야기하려던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알튀세르 효과="">에서 벌어질 이야기들에 굉장히 관심이 간다. 사실 푸코가 하려던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 알튀세르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가 궁금하다. 생각해보면 푸코도 알튀세르의 제자였고, 위에 언급한 ‘4대 천왕’ 중 지젝을 제외한 나머지, 즉 랑시에르, 바디우, 발리바르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가 아니었는가. 서로 다른 계기에서 알튀세르를 비판하지만, 그 역시 알튀세르의 ‘훌륭한 독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일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 고민의 핵심에는 늘 ‘지금 여기’의 문제가 걸려있는데, ‘이론적 고민’에 대해서 이 세미나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한동안 벌어진 논쟁들의 ‘논객’들과 함께 알튀세르를 주제로 이야기한다면 전혀 다른 방향에서의 ‘실마리’가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논객’들의 문제가 알튀세르와 꼭 연동된 것은 아니겠지만서도.

며칠 전 만났던 선배의 말처럼. 다시 더 깊은 인류학과 사회학. 그리고 맑스주의의 고릿적 이야기로 돌아가볼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