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19] 여성주의와 소통. 그리고 좌파.

페미니즘의 도전10점
정희진 지음/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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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젠더와 문화연구를 함께 배운다. ‘학문’과 ‘실천’이라는 것이 어떻게 마주치는 지에 대해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 내가 페미니즘을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수업 전 날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긴장해서. 그리고 내 딴에는 나름 대화를 위한 ‘고민’이 담겨있는 언어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지만, 늘 어느 측면에서 꼭 문제적이곤 했다. 2009년 2학기 <젠더연구입문>이라는 수업이 마칠 때쯤 대화와 소통의 ‘기본’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p>

한국의 좌파 인텔리가 맑스주의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차용하는 것과 달리 여성주의를 한국의 좌파 인텔리가 차용하는데에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 것 같긴 하다. 아니 남 이야기 할 필요 없이 내 경로는 그래왔고,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여전히 내게 페미니즘은 늘 ‘낯설고’ ‘불편하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가지 반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충 최소한의 선에서 멈추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신사협정’ 같은 것을 가상으로 체결하는 방법이 있다. ‘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합의의 당사자는 사실은 본인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역지사지’의 최대화가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방법으로 끝까지 싸워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늘 세 번째 인 것 같다. ‘공감’의 윤리가 대화를 위한 기본이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공감’하지 못한다. 이게 절대 장점은 아닌데, 어쨌거나 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그 전에는 전혀 몰랐으나 내 주위에도 굉장히 ‘젠더 감수성’이 형성되어 있는 남성들이 좀 있는 편이고, 그들을 보면서 나름의 준거의 점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맥락과 내 맥락이 다르고, 여전히 급진적 페미니즘이 전제하는 바에 대해 몇 가지는 잘 동의가 안 되는 상황에서 그들처럼 하지도 못하려니와 마음이 여전히 꺼려진다는 게 솔직한 내 지금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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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이래 저래 마음이 뒤숭숭한 찰나. 아는 여성 신학을 전공한 누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갔다가 책꽂이에 꽂혀있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집게 되었다. 내 심리 상태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두드려 맞던, 때리던 하여간 나를 좀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p>

책의 내용은 너무나 평이하게 쓰여있고, 눈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급진적 여성주의등이 전제하는 ‘가부장제’와 ‘가부장제 사회 주체로서의 남성’에 대한 일원화된 구성에 대한 정희진의 반박을 읽으면서 통쾌해 했다. (물론 급진적 여성주의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횡단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멤버십에 기반을 두면서도(rooting) 그것을 본질화하지 않으며, 타자를
동질화하지 않고 상대방의 상황으로 이동(shifting)할 수 있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대화가 횡단의
정치이다
“(p.20). 동일자 같은 ‘피해자’로 간주될 때가 많은 여성 주체가 아닌 ‘정체성의 정치’를 넘나드는 새로운 주체로서의 횡단의 정치는 늘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매력적이다. 또한 이러한 수사는 수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여성주의적 사유’의 전제들을 흔드는 방식으로 읽어낼 때 더 잘 드러난다.

여성에게 (기존) 언어가 없다는 사실은, 인식론적 특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 경험과 지배 언어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모든 인식, 특히 새로운 언어는 현실에 의문을 가질 때에만 생성 가능하기 때문이다“(p.81). 페미니즘에 적절한 (기존) 언어가 없을 때 자신들의 말을 아로이 새기는 일. ‘프레임’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더라도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일상’과 ‘성찰성’이라는 것을 ‘회고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움’과 연동하는 방식으로 ‘진보’로 구성할 때 이 역시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 않고 멈춘다면,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 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신이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진보’ 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p.130).  그리고 이 또한 ‘현장’의 경험과 물려있기 때문에 ‘신뢰’라는 것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구성애나 전통적인 여성운동에서 자주 등장했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반박이 굉장하다. “성적 자기결정권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p.177). 내가 종종 굉장히 불편한 것은 여성주의가 만드려는 주체가 ‘근대적’ 주체. 예컨대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전능함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조하면서 ‘자기 경영’의 주체로 만들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보일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사회’의 부산물들이 개인을 꾸짖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마련인데, 문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비판하려면 근대의 ‘독립적 주체’에 대한 판타지를 깨야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급진주의 여성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종종 그 맥락을 탈각해버리거나, 혹은 그냥 판타지를 수용하고 멈출 때가 많다. 예컨대 김상봉 선생의 ‘서로 주체성’이나 ‘상호의존’을 가지고 주체를 다시 구성할 수는 없나? 그리고 그 구성은 ‘남성’과는 할 수 없는 일인가? 늘 내게는 그건 ‘질문’꺼리일 수밖에 없다.

또내 정신을 확 깨운 구절이 있었다. “‘마초’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이들은 모두 내가 먼저 칭찬과 격려로 자신을 보살펴주기를 바란다. 이른바
‘지혜로운 여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는,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p.41). 언젠가 우리 과의 동료가 수업을 하다가 한국의 진보/좌파 남성들이 두 부류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1)가르치려는 남자 2)계속 물어보는 남자. 나는 분명 2번 항의 남자일 텐데. 그러면서 물어보니까 보살펴달라는 심리를 분명 깔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방식의 언어로만 대화가 되어야 ‘지혜롭다’고 간주한 적도 좀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좀 짚어야 할 것 같은게. 책의 출간 시점은 2005년 11월. 글들은 그 전 1~2년 사이인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좀 변한 것 같은 양상들은 존재하는 것 같다. “한국 남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만나는 여성들을 동료로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다.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도 자신이 사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의 연장으로 본다. 그들의 ‘휴식처’인 가정에서 만나는 어머니 ·
누이와 ‘놀이터’인 술집에서 만나는 접대 여성이, 남성이 여성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pp.54-55). 같은 주장을 볼 때 물론 공감할 수 있지만, 이제 점차 공적 영역에서 만난 여자들을 ‘동료’로 평가하지 않으면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 지경에 남자들은 이미 돌입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좀 더 어린 세대(86년생 정도) 밑으로 보자면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외려 다른 방식의 ‘학습’을 시키는 것만 같을 수 있다는 점이다. 386의 자녀들인 그들은 좀 다르긴 다르다. (2009/08/2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우정과 환대의 지식 공동체 – 조한혜정 외 : 교실이 돌아왔다, 2009). 전통적인 젠더 정치학으로만 구사할 수 없는 부분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분명 인정을 해야할 것 같다. 전통적인 이슈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오랫만에 놓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좀 생각할 시간을 가져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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