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20] 20대 저자론의 밑천에 대해서.

청춘대학4점
이인 지음/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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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5일 두리반에서 <방 있어요="">와 <자기만의 방=""> 영상 상영회 및 토론회가 있었다. (2010/05/05 – [생각하기/정치사회비평] – Fly, Hendrix, Fly 2010년 봄 번개, 그리고 <방 있어요?> (수정판)) 한참 그 준비가 있을 때 나와 함께 준비하던 Jiva는 정치 사회 블로그 중에서 썩 괜찮은 블로그가 있다면서 꺄르르 이인의 블로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그 블로그에 들어가보지는 않은 것 같고, 그 후에 한 두 번 가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행사 당일 이인은 우석훈과 이택광을 취재해 갔고, 그것들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던 것 같다. </p>

그리고 7월 언젠가 김선주의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라는 책에 대한 포스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걍 ‘훈장질’이어서 댓글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http://blog.ohmynews.com/specialin/337793) 물론 그는 내가 주장한 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며 넘어갔다. 착하고 선한 세계에 대해 내가 별로 감수성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블로그였다. 어쨌거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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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이 출간했다는 <청춘대학>을 읽는다. 처음 프롤로그에 쓰여있는 문장부터 불편했다. “넓은 가슴과 따뜻한 마음으로 꼭 끌어안아주면서 힘내라고 등 토닥여주는 선생님이 있다면, 젊은이들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바위 얼굴처럼 마음을 절로 훈훈하게 해주는 어른들을 찾아뵙고 귀한 말씀을
들어보고 싶었어요
“(p.13). 마치 ‘큰 스승’이 있다면 지금의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이라는 논법에서 이미 본인이 다른 글에서는 누차 강조했던 ‘비판의식’은 어디에 갔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주체적 사고’는 어디에? 물론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든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선생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밝혀지지만 그가 지칭하는 ‘선생님’은 단순히 그보다 나이가 많고, 이미 알려진 ‘명사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 같다. </p>

그리고 그가 만났던 ‘선생님’들은 절대다수가 철저히 ‘훈장질’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태도’의 문제로 그들을 오롯이 평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외려 구체적으로 그것들을 따져묻는 것이 ‘비판적 독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처음 만난 시인 김선우는 “386세대는 길거리에서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싸웠지만 지금은 싸울 수 있는 조건이 훨씬 좋아졌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적으로
싸울 수 있는 토대가 생겼어요. 토대가 생겼는데 왜 활용을 못해, 왜 활용을 안 하지? 안타까워요
“(p.27). 물론 386세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인의 통상적인 대꾸는 “선생님, 잘 배웠습니다.” 식이다. “어느새 촛불시위는 끝났고, 전과 별로 다르지 않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왜 세상의 엉망은 쉽게 변하지 않는 걸까요? 선생님과 만나며 사회의 부조리함에 저의 무관심과 침묵이 있었다는 걸 새삼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p.35). 그의 반성의 골자를 보자. ‘무관심’과 ‘침묵’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에 대해 진단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들이 대체로 어디를 향해, 무엇을 겨냥해서 돌아오는가? 김용민의 ’20대 개새끼론’에는 충정이 있다. ‘무관심’과 ‘침묵’을 뚫으려는 의지가 있다. 하지만 “왜 ‘무관심’과 ‘침묵’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략된 체, 결과로서의 ‘무관심’과 ‘침묵’에 대해 질타하거나 성찰하자는 태도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행동들은 늘상 ‘무지한 대중’에 대한 비난으로 귀결되곤 했다. 난 그걸 이인이 모르고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만약 그걸 몰랐다면, 그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 어쩌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대화의 결들에서 많은 선생님들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에 찌들어간다”는 식의 도덕적 담화였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마치 IMF 터지고 나서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 나서야 그런 시대가 온 것 같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은 내 부모가 20대였던 60년대에도 이미 늘상 주장되던 것들이다. 전혀 새롭지 않다. “박남희: 교육이 바뀌길 바라죠. 교육이 바뀌면 다른 것도 바뀌어요. 교육 시스템이 목적 지향으로만 나가고 있어요. 교육 철학이 부재한 교육이죠“(p.96). 박남희의 이런 주장은 어떠한가? 마치 ‘에센스’를 채우면 지금의 문제가 손쉽게 해결될 것인데, 그게 ‘부재’했기 때문에 작금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손쉬운’ 진단들이 판을 친다.

애당초 이인은 논쟁에 대한 정리나, 어떤 입장에 대한 나름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계획이 없는 듯하다. 그 절정은 이택광-조정환 논쟁에 대한 평이다. “어떤 주장이 더 맞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다만, 한가지로 모이는 게 있습니다. 촛불은 그저 몇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한 게 아니라 현대사에서 커다란 사건이라는 거죠. 촛불이 어떤 의미였는지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p.147). 정말 ‘이게 뭔가요?’싶다. 그냥 말을 하지 않고, 수도원에 가서 신부님과 수녀님들만 만나고, 좋은 암자에서 은거하고 계시는 선승과의 대화만을 가지고 책을 쓴다면 이런 식의 비판은 바로 ‘비난’일 테고, 난 이런 식으로 그의 글에 대해 꼬집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은 한국사회 ‘논쟁’의 최전선에 있는 경우도 있고, 그들의 첨예한 입장 차이가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구체적으로는 엄청난 차이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인은 “그들 모두 훌륭한 선생님들이십니다.” 식이다. 뭐든 뭉뚱그려 많이 알면 장땡이라는 것인가?

그런 태도는 구본형과 김미화의 말을 들을 때도 나타난다. 먼저 김미화의 말. “우병률씨의 <딜리셔스 샌드위치="">를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기 집, 아파트 한 공간에서도
이룰 수 있다는 게 나와요. 젊은 친구들이 너무 겁내지 말고 새로운 창의력으로 신선한 사업을 구상해보면 좋겠어요. 부모님이나
친구나 친척 눈치 보지 않고요. 사실, 볼 필요도 없어요. 내 인생인데</span>“(p.219). 참으로도 우아한 발상이다. ‘아파트 한 공간, 자기 집’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인 것이 현재 젊은이들 ‘평균’의 상황인데, 여기에서 ‘내 인생’을 이야기할 때 이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괜찮다. 하지만 구본형의 경우를 보자. “기업들이 사람 뽑는 기준을 바꾸고 있어요. 이런 초점으로 기업의 인사 정책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에 꿈을 크게 갖고 마음가짐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고 봐요“(p.251). 끝없는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꿈을 갖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이 “구본형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일자리도 문제지만, 젊은이들에게 꿈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p.257) 하고 ‘결과’에 대한 문제제기만 할 따름이다. ‘왜’는 여기에서도 생략되고 만다. 도대체 이 인터뷰집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바는 뭔가 하면서 상심하게 만들고야 만다.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다시 자기계발서의 레전드인 구본형을 ‘선생님’으로 모시는 이유도 모르겠다. 범인들은 모르는 ‘선수들’ 혹은 ‘신선들’의 리그는 다르기 때문일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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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결론을 보면 무릎을 탁 치며. “역시!”하면서 책을 집어던지게 된다. “더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수도승처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몸과 삶을 바꾸면서, 더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면서 책을 펴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생각한 것들을 사람들과 나눈다는 마음으로 블로그를 하고
있고요. 모든 게 다 그렇듯 블로그란 매체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한계를 잘 알지만 그럼에도 될성부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늘도 글을 쏘아올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제 글이 누군가의 가슴을 다독여주고 달구길 바라면서요
“(pp.390-391). 걍 열심히 마음 공부를 하시라는 말을 하면서 이 책을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않고 조용히 숨겨두겠다는 결심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문제가 ‘소통’의 부재에서만 발생했다면 난 이인에게 무릎을 꿇고 마음공부를 함께 하겠다고 말을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임지현과 한완상, 그리고 고미숙, 고병권의 말에서 건질 게 많았지만, 사실 그건 다른 그네들의 책을 봐도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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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이 책을 읽은 젊은이들이 어떤 다른 ‘호기심’ 혹은 ‘동기부여’를 받게 될까? 그렇게 되지 않는다에 90% 확률로 걸겠다.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이 책의 ‘청춘대학’을 다니면 겪게되는 것은 자신이 ‘허당’이 되었다는 자책일 뿐이다. 덩달아 ’20대 저자론’이라는 담론의 밑천이 이제 다 된 거 아닌가 싶다. 자기 연구 없이 계속 ‘저널리스트’ 혹은 ‘블로거’ 또는 얼뜨기 ‘비평가’로 엉거주춤 있을 때 그들에 대해 자꾸 ‘예찬’으로 낚아대는 좌파/진보 미디어에 대해 열받기 시작한다. 이제 정말 ‘허당’들을 가려낼 때가 된 것 같다.

그래 떠올랐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못 죽이는 ‘허당’들의 책을 돈주고 살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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