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23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황금의 지식시대를 넘어서! – 천정환, <대중지성의 시대=""></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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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말고 ‘근처’의 이야기를 하는 김선주의 글에서 빛났던 것은, ‘구체적인 일상’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글을 쓰면서 지켜온 원칙이 있다. 나의 일상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이 아니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을 억압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p.377). 요컨대 ‘이건 내 이야기다’라고 말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가지는 힘. 나도 그걸 굉장히 지지한다. 그녀의 러브호텔에 대한 이야기가 압권이다.
“러브호텔이라니…… 거참, 뭐랄까 싱숭생숭해지고 야릇하게 흥분되고 뭔가 불순한 것 같고, 예순 살 전후의 중늙은이 네 명이 러브호텔에 들어간다니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은근히 호기심도 발동했다“(p.327). “맞다. 호텔이란 잠도 자고 러브도 하고 회의도 하고 쉬기도 하는 곳이지 러브하는 곳, 자는 곳, 부부가 가는 곳, 연인이 가는 곳, 관광객이 가는 곳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p.329). 스스럼 없이 뛰어들어보면서 하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성찰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난 ‘면벽수련’을 지지하지 않으니까.
동시에 ‘맹물’처럼 절대 그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두다에게 ‘선생’하면서 다 들어야 한다는 ‘선문답’을 하지 않고 틀리더라도 일단 베어버리는 그녀의 문투가 더 좋은 것이다.
“누가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가. 죽은 권력에 난도질을 하고, 시정잡배로, 길거리 건달로, 그가 사는 흙집을 아방궁으로 묘사하며 모욕했던 언론이 제일 먼저 나서서 화해와 용서를 말한다. 죽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는 짓이다. 화해를 먼저 청하는 것은 속이 뜨끔한 세력들이다“(p.91). ‘화해’의 ‘전제’가 생략되고, ‘배움’의 ‘전제’가 생략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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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내가 이 책에서 그녀의 다른 부분의 이야기는 다 동의가 되었지만, 또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98% 정도 동의가 되었지만. 2% 정도 잘 동의 안 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곳이다.
“요즘 세대들은 이러한 것들에 무감동하고 무감각하지만 실은 요즘 젊은 세대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하나도 거저 얻어진 것이 없고 모두 투쟁과 희생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p.169).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가 페미니스트들한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리나
자유에 대해 무심하다.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번쯤은 그것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대를 무릎쓴 투쟁에서
얻어졌으며, 거기에는 그런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p.170).
난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김선주가 책에 씌여있는 내내 신경쓰려는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상황과 완전히 배치된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지적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70년대에 여성으로 부딪혔던 문제들과, 80년대에 부딪혔던 문제들, 그리고 90년대, 2000년대를 경유하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는 ‘연속성’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 ‘단절’의 지점들이 분명 존재한다. 예컨대 ‘간통죄’를 ‘입법’시키려 했던 것이 여성 운동의 목표였던 시절에서 ‘폐지’가 목표가 되는 시절로의 변화가 분명 존재한다. 내가 보기에 ‘각 시대의 여성들’은 각 시대의 문제로 싸우기 마련이다. 게다가 싸우지 못한다고 한 들 거기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고, 어떤 문제를 풀려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맥락’을 건드려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김선주는 그 지점을 놓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잇는 권리나 자유에 대해 무심하다.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의 발언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힐난’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나름’의 ‘일상투쟁’에 서 있는 여성들을 주저앉히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말하려면. 나는 일단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빚’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며, 계속 계보를 타고 올라가다보면 단군에데고 ‘빚’을 지고 있다. 일련의 경로는 상승하여 ‘정통’에 대한 신기루를 만들어낸다. 맑스가 말했듯이 옛 귀신들이 지금 세대의 가슴팍을 쥐어누른다. 나는 ‘역사’에 대해 낙관하기 때문에, 혹은 부채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답답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예전의 역사를 통해 그랬던 사람들과의 ‘공감’을 느끼는 것일뿐 그들에게 어떤 부채를 느껴야 하는 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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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이야기는 김선주를 만났을 때 어떤 자세로 만나고 싶은가와도 직결되는 것 같다. (혹시 만날 수 없을 수도..) 나는 그냥 다리 꼬고 옆에서 하고 싶은 말 편하게 할 수 있는 ‘동료’로 그녀를 만나고 싶다. 무릎 꿇고 경직되게 ‘사사’받으려는 자세가 좋은지 전혀 잘 모르겠다. 난 그녀에게 ‘빚’을 잘 모르겠고, ‘우정’이라면 만들고 싶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건 또래의 내 지도교수에게도 마찬가지.
그녀의 문장은 그녀가 좋아했던 세대의 케루왁, 사르트르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재떨이를 닦으면서 아빠를 생각할 때 나오는 문장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문장을 읽고 있는 것에서 ‘구름’을 발견하지 않고 굳건히 딛고 있는 ‘땅’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늘 조금은 떠오르고 싶은 ‘로맨티스트’로서의 그녀의 감성들은 앉아서, 혹은 서서 날아다니는 것의 심상을 떠오르게 한다. 아. 1200자의 예술. 어쩌면 그게 적절할 지 모르겠다. 싸우면서 한 합의 예술을 만드는 예술가.
그녀의 ‘김선주 학교‘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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