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스의 책읽기 #24] 신자유주의가 궁금하다구요? 그럴 때 읽을 책.

친밀한 적8점
김현미 외 지음/이후
2009/09/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겪어서 쓴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 낮은산, 2009
2009/10/3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88만원 세대의 우정과 환대의 공간 만들기-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2009, 레디앙
2009/12/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신자유주의적 전쟁 – 피터 W. 싱어, 전쟁 대행 주식회사
2009/12/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저널리즘이 쓴 최고의 신자유주의 분석 –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2010/05/2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탈주, 코뮨 혹은 마을 그리고 약간의 공허함
2010/06/3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
2010/08/1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좌파 이론의 쓸모에 대해서 – 며칠간의 노-홍-한-레의 논쟁을 보고.

#
지난 번 이른바 ’20대 논객’들끼리의 신자유주의 논쟁을 읽었던 적이 있다. 이론적인 층위에서 지형들을 설명하는 leopord의 이야기가 있고, 거기에 나는 ‘구체적 현실’과 어우러지지 않는 진단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했었다. 이전의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와 미셸 푸코의 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야기했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해 논의하는 두 가지 차원의 이야기가 있다. 예컨대 경제정책의 합으로서의 신자유주의-1(편의상)이 있고, 문화적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방식으로의 신자유주의-2가 있다. 물론 이러한 기계적인 분할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논쟁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1과 신자유주의-2가 맑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토대-상부구조의 성격을 보여주더라도 신자유주의-2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은 반쪽 짜리가 되어버린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등장했던 ‘신자유주의의 몰락’이라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신자유주의라는 것에 대해 일면적인 이해였다. 따라서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몸과 주체성의 양식들은 ‘생략’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신자유주의가 ‘몰락’한 상태에서 더 이상한 형태의 국가가 한국에서 등장하고 있었다. <친밀한 적="">을 주관한 김현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외국의 학자들이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철저히 왜곡시킨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혹은 끝나야 한다고 선언하며 포스트신자유주의 사회를 상상하는 저작들을 발표하는 동안 우리는 ‘토건’과 ‘부자 감세’, 그리고 ‘복지 후퇴’를 경험하여 신자유주의적 발전 국가가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p.7). 그렇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p>

신자유주의-2에 대한 이야기들은 굉장히 한국에서 부족하다. ‘정치철학’을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많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명료하게 해설해주는 방식의 ‘개론서’는 더더욱 부재했던 것 같다. “이는 흔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에서 간과되기 쉬운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측면, 즉 신자유주의가 어떤 문화적 규범을 만들어 냈으며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과 정서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p.11).

#
이 책의 이야기들은 어찌보면 하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혹 세계화에 대한 비판서들과, 위에서 언급한 ‘정치경제학적’ 비판들로 주류를 이루는 신자유주의 비판서들을 읽었던 이들에게 이 이야기들은 ‘딴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즉, 사유화Privatization, 탈규제화Deregulation, 노동의 유연화Flexbilization of Labour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경제와 글로벌 자본, 초국적 기업Transnational Company(TNC) 등에 대한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책의 주제들은 다소 낯설 수 있다. 예컨대 서동진, 엄기호, 김현미, 조한혜정 등의 2000년대 이야기는 윤소영, 백승욱 등의 주장(신자유주의-1에 대한 세계체제론의 이해)이 하는 거랑 전혀 다른 이야기이니 말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이야기는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언저리 말고도 여성학회, 인류학회 등에서 많이 나온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어느 학회’인지는 별로 안 중요하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달리 읽어내는 지가 중요하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을 보자면, 전통적인 금융과 경제논리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보지만, 그것들을 조망하는 방법은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금융은 곧 생활 방식이며 일상에 새로운 변동을 초래하는 핵심적인 기제다. 시장은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되는
경제적 공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이 되었다. 불확실한 시장 안에 놓인 개인들은 자신의 미래나 가족의
행복이 경제적 기술을 스스로 얼마나 충실히 습득하고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p.51). “나아가 금융화된 일상에서 정확한 시간 분배, 분명한 계산, 부단한 자기 관리, 무한한 생산 증가와 같은
이상들은 직업적 성공 전략을 넘어서 일상과 가정 영역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는 가치가 됐다. 개인은 독립적으로 시장을 이해해야 하고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p.59).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신자유주의가 빠른 시간에 확산된 것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가 표방한 ‘자유’가 가진 매력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새로운 ‘자유’를 주장한다. 즉 개인의 선택의 자유, 정부로부터 간섭 받지 않을 자유,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추구할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역설했다
“(p.8). 즉,, 누가 시켜서만 신자유주의가 굴러가는 게 아니다. 어떤 자본주의 축적 체제보다 더 강하게 ‘개인들’을 꼬시는 체제가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다. 단순히 ‘민중에 대한 착취’만 부각시키면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주체’는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embodied 근대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초창기의 고전적 자유주의가 개인보다는 ‘그룹’으로서의 ‘계급’을 주체로 설정하는 방식으로 공장 단위의 타협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완벽한 ‘개인’을 불러낸다. 그것들은 각 개인에 대한 ‘권리 보장'(성원권, 인권)을 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에게 ‘개개인의 책임’을 묻기 위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늘 등장하는 ‘자유’의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최종지점이 신자유주의의 ‘소유자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개인들에게 사회복지나 보호와 같은 낡은 메타포에 기대기보다는 시장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책임지는 독립적인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 조직자본주의가 노동자를 관리되고 통제되는 수동적인 인간형으로 주조해 냈다면,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는 없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주인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p.68).

#
이후 책의 각 장은 각각의 이슈들, 예를 들어 이주, 전쟁, 외모, 감정, 생명 공학 등을 다룬다. 김고연주가 다룬 ‘외모’와 ‘생명 공학’ 그리고 정승화가 다룬 ‘감정’의 챕터들에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다. 예컨대 ‘외모’에 대한 장에서 다루는 ‘상품 페미니즘’이 그렇다. “하이힐은 곧 자신감 있고 적극적이며 능력 있고 아름다움을 아는 여성인 캐리의 캐릭터를 상징한다. 여기서
하이힐은 성적인 의미를 띄면서 현대판 전족으로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가부장적인 패션 아이템이라는 비판과는 완전히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p.150).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에게 불어넣으려 했던 임파워먼트의 정치학이 ‘자본주의’와 만났을 때의 양상에 대해 김고연주는 그 ‘효과’를 낱낱히 드러낸다. “사회적인 문제들을 개인적인 생활양식으로 바꿔 버림으로써 페미니즘의 탈정치화를 초래하며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개인주의 또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비판을 망각하고 상품 형태에 포섭되어 버리는 것이다
“(p.150). 프라다를 신는 악마는 그냥 ‘악마’일 뿐인 것일까? 재미있는 지점이다.

김고연주 박사

마지막으로 정승화가 ‘치유’가 신자유주의적 맥락에 의해 배치되는 것에 대해 외치는 일갈! “치유적 서사는 개인들의 정서적 안정과 행복을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문제로 바꾼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정의된 감정 상태와 동의어가 된다.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자아실현의 사회적 의미는
실종된 채 자아 성찰은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과 같은 의미가 되어 버렸다
“(p.179). 단순히 자기계발서 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며 비판하는 것과는 궤가 좀 다른 논의가 된다. 예를 들면 자기계발서 대용으로 소설책을 읽고, 치유의 대용으로 요가를 한다 할 때 그 두가지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문제제기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미 신자유주의의 특정 ‘이슈’들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신선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충분한 ‘개론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 이제 신자유주의에 복수하러 가볼까? 근데 “어디?”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