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과 구체적인 자기 이야기를 찾기 – 리처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2009

뉴캐피털리즘10점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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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 읽기 #1]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그리고 미라이 공업 上
2010/06/3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
2010/07/01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헨드릭스의 이론 공부 #1]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
2010/08/1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좌파 이론의 쓸모에 대해서 – 며칠간의 노-홍-한-레의 논쟁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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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두에서도 이야기하지만, 세넷은 1968년의 신좌파였다. 인간의 ‘영혼’을 굳혀버릴 것 같은 관료제와, 구좌파들이 신봉했던 현실사회주의 모두를 거부했다. 그리고 관료제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현실사회주의도 붕괴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해졌을까? 그가 만난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신경제의 ‘인간성이 파괴된’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는 도대체 왜 도래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며, 이 바깥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제도 속에서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결집할 수 있는 가치나 관행은 과연 무엇일까? 신좌파 세대는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하기에는 상상력이 모자람을 절감했다. 왜 거대 제도가 해체되고, 작은 공동체가 필요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 상상력의 결여야말로 신좌파들이 진정으로 해결하기 어려워한 문제였다
“(p.6).

분명 신좌파들이 잘했던 것들이 있다. 예컨대 작은 지역에서의 풀뿌리 운동을 주창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협동조합 운동 등을 통해 좌파의 ‘상상력’을 향상시켰던 지점에 대해 신좌파는 분명 온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런던의 켄 리빙스턴 등에 대한 이야기도 ‘신좌파적 기획’과 함께 보지 않고, 녹색-생태주의-와 함께 보지 않는다면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공동체들의 이야기는 다른 한 편에서 무기력했는데, 커다란 자본주의의 전환 그 자체에 대한 무기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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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넷은 후기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어떤 ‘문화적 기반’을 통하여, 그리고 어떠한 ‘제도적 기반’을 통하여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본다.

크게 두 개의 세계가 세넷의 논의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혼합경제’가 실제로 작동하던 시절의 ‘사회자본주의'(독일의 표현으로 하면 사회적 시장경제) 혹은 사회민주주의의 세계가 있고, 이는 세넷이 한참 젊었을 때 ‘신좌파’로써 공격했던 세계이기도 하다. 다른 한 편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작동하는 신경제의 시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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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회자본주의의 시대를 살펴보자. “시간은 장기적이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늘어나며, 무엇보다도 예측할 수 있는 ‘합리화된
시간rationalized time’이다. 사회자본주의의 관료제가 부여한 시간은 제도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규율에도 영향을 주었다.
합리화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서사적으로narrative’ 생각할 수 있었다. 삶을 서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했는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p.34).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서사’를 점검할 수 있고 그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자본주의의 시대는 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신좌파들이 저항했기 때문 만은 아니다. 조금 길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기업의 권력이 경영진에서 주주에게로 옮겨졌다는 점이다. (……) 초기 기업 경영자들은 예전부터 익숙한
투자자들을 다루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여겼다. 기관투자자든 개인투자자든 대체로 기업 경영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이들 투자자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해마다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특이한 옷차림의 할머니 주주나 까다로운 채식주의자
주주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영자들은 이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됐다. 투자자들이 기업
경영에 대한 적극적인 심판관이 되어버린 것
이다(pp.50-52).

두 번째 변화는 바로 이러한 권력의 이동이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된 투자
자들은 장기적인 경영실적보다는 단기적인 성과를 원했다. 그들은 미국의 경제학자 배넷 해리슨Bennett harrison이 ‘성마른
자본impatient capital’이라고 불렀던 단기주의 투자전략을 짰다. 주식 배당금보다는 주가가 투자의 결과를 재는 잣대가
됐다. (……) 미국 연기금의 평균 주식 보유기간은 1965년 46개월에서 2000년 3.8개월로 크게 줄었다.
(……) 특정 기업이 제도적으로 견실하다는 것은 투자자들의 요구에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기업이 안정적이라는
평가는 그 기업이 취약하다는 것으로 해석됐다(pp.53-54).

쇠창살에 대한 세 번째
도전은 통신과 제조부문의 새로운 기술 발전에서 비롯된다. 통신은 지구촌을 실시간으로 연결해놓았다. (……) 1960년대
미국 자동차산업의 경우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자동차 판매 현장에까지 전달되는 데 평균 다섯 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한 소요 시간이
요즘은 2주 정도로 줄었다. (……) 조직의 지휘계통을 따라 명령이 수정되고 해석되던 데서 새로운 형태의 중앙집중화로
대체된 것은 정보 혁명의 결과 가운데 하나다(pp.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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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읽었던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의 리뷰에서도 밝힌바 있지만, 관료제가 깨진다하여 ‘수평한 조직’이 도래한다하여, 권력의 위계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외려 중간관리자층만 해체되고, 권력 최상층부의 감시기제와 통제기제가 더 강해지는 것이다. 푸코의 ‘파놉티콘’이 바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조직을 세넷은 MP3형 조직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말 탁월한 어휘 선택인 것 같다. “새로운 조직은 MP3 플레이어처럼 작동한다. (……) 유연한 조직은 주어진 시간에 처리가능한 많은 업무 가운데 몇 가지만 취사선택
해 집중할 수 있다. 이는 기존 기업들이 정해진 공정에 따라 정해진 방식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 MP3 플레이어의 경우 듣고 싶은 노래의 순서를 그때그때 바꿀 수 있다. 유연한 조직이라면 생산 공정의 배열을
마음대로 재조정할 수 있다. (……) 정해진 역할을 정해진 순서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에 따라 융통성 있게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정해진 순서대로 공정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사고방식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건너뛰기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p.62). MP3의 플레이어를 모두 한 번씩 누르지 않고, 유저만 누른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조직에 대한 이해가 더 쉬워질 것이다. 게다가 유저는 늘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예컨대 컨설턴트 회사를 생각해 보면 된다. </p>

원칙적으로 컨설턴트들은 객관적인 자문과 전략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은 조직의 구석구석을 돌며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 대부분 막 MBA를 딴 젊은이들로
이뤄진 맥킨지의 컨설턴트들은 방송사에 대해 공부해가며 BBC의 구조조정에 관여했다. (……) 맥킨지 자문팀은 이러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무감각했을 뿐 아니라 조직의 변화로 인해 BBC 종사자들이 겪을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없었다.
(……) 맥킨지 사람들은 자문료를 챙기고 떠났지만 BBC의 조직은 혼란에 휩싸였다. BBC 내부에서 사회적 거리가 확대된
것이다. 변화의 와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면서 BBC 직원들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빠른 속도로
증폭됐다
“(pp.70-71). 투자자문회사 외에도 몇 몇 신용평가회사가 어떤 ‘구조조정’들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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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인 ‘몸’을 갖게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세넷은 이것들을 ‘장인정신’의 쇠퇴와 연동해서 살펴본다. “어떤 일을 잘하는 방법을 알게 될 수록 그 일에 대한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기간에 일을 처리하고 다시 다른 일로 옮겨가야 하는 조직과 제도 아래에서는 어떤 일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첨단 조직들은 이른바 ‘한우물파기’를 반기지 않는다“(p.127). 책의 표지에 써 있듯 ‘표류하는 개인들’이 넘실거리는 것은 어쩌면 사필귀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기술ability와 역량competency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창조적creative이네, 잠재적potential이네 하는 말들의 용법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깊이 이해하는 사람보다 즉각즉각 빨리 파악하고 빨리 적응하는 사람을 요구하는 것의 문화적 의미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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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 편, 십 몇 년 동안 ‘원 스탑 서비스’라는 말, 그리고 ‘정치’의 ‘비효율성’에 대한 비난들이 떠돌아 다녔었다. 이러한 말들이 내포하는 바에는 시민이 ‘소비자’가 되고, 정치인들이 ‘기업가’가 되어버리는 상황들이 있었다. ‘CEO 대통령’도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정치적 상상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경제적 현실 세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필요가 있다.
경제와 정치를 구획하는 이같은 고전적이고 부정적인 명제는 오늘날 다시금 방향을 바꾸고 있다. 요즘에는 소비 그 자체의 의미 때문에
이론보다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커졌다. 요컨대, 소멸하는 열정consuming passion에 대한 얘기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소멸하는 열정이란 너무나도 강렬해 스스로 불에 타스러지는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좀더 평이하게 풀어본다면 물건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소진되는 것을 말한다
“(p.164). 사람들은 정치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책의 ‘소멸’이라는 말보다 ‘소비’라는 말이 더 강렬해 보이고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처럼 ‘문화산업’ 따위의 논리를 통해 기업가들에게 대중들이 속는다거나, 정치인들에게, ‘조중동’ 같은 매체에게 속는다는 식의 단순논리로 접근할 수도 있는데. 세넷은 그에 대해 명백하게 반대한다. (이는 어쩌면 푸코가 말했던 ‘자기에의 배려’ 혹은 주체화에 대한 생각들을 세넷 역시 내포함을 보여준다.) 요컨대, 사람들은 갇혀 있고,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 무언가를 꿈꿈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낄 때 역시 자유를 느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알고, 직접 사용하며,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정신적으로 초월할 때 사람들은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까? 자멸하는 열정은 어쩌면 자유liberty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p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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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결론부를 읽다보면 세넷이 얼마나 ‘인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믿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는 것만 같다.

병렬 노동조합의 건설(“대안적인 병렬 노동조합들은 은퇴하기엔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알선 하는 등 노동자들의 경험이 서사적으로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둔다“(p.219)) – 이는 마치 청년유니온의 정책적 구상과도 비슷하다. 일자리 나누기, 기본소득(!)을 통해 사람들이 길게 보고 인생 설계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을 통해 잃어버린 (관료제의 혁파에 따라) ‘사건과 경험의 축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하나.

개인의 유용성 발휘를 위해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늘리는 것 둘.

마지막으로는 다시 ‘장인정신’의 재확립을 요청한다. “장인정신은 새로운 문화가 빠뜨린 기본 덕목을 가지고 있다. 이상적인 노동자, 이상적인 학생,
이상적인 시민의 자질이 지니지 못한 미덕, 즉 헌신commitment이 바로 그것이다. (……) 누군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틀림없이correct나 올바로right란 단어를 쓸 수 있으려면 자신의 바람이나 외부에서 받을 보상 따위와
무관하게 별도의 객관적 기준이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뭔가를 제대로 해낸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인정신의 요체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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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은 빽빽하고, 하나하나를 놓치기 싫을 만큼 중요한 내용들이 잘 모여있다. 하비나, 푸코 등을 산발적으로 읽다가 세넷을 읽고나면 최근의 지형에서의 이론적 논의와 구체적인 연구의 집약을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장점이다. 지난 학기 청강했던 서동진의 <문화경제학>의 얼개가 나는 푸코의 논의들이 축이라고 생각했는데, <뉴캐피털리즘>을 읽다보니 세넷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물론 세넷을 읽지 않아도 그 정도의 감각은 유지하고 있는 선수들이긴 하지만. </p>

나는 계속 ‘창의 노동’, ‘비물질 노동’ 등의 개념들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몇 군데의 대안적인 공간들에서의 ‘노동의 유연화’ 문제를 고민하는 중이다. 대안적인 공간에서 적절한 노동형태를 생각하다보면 한 축에서는 ‘자유로운 노동’과 탈규율화된 노동이 떠오르는 반면 다른 한 축에서는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유연 노동’과 얼마나 닮아있나라는 고민들을 하게 된다. 세넷은 그렇다고 해서 다시 기존의 질서로 손쉽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그럴 경우 현재의 ‘유연화된 노동’에 ‘장인정신‘을 씌우던지, 혹은 기본소득을 주어 아예 노동 자체를 ‘유희’ 혹은 ‘실패’해도 되는 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긴 할 거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창의’적인 어떤 것이 가능할까가 다시 고민이 된다. 쉽게 말해 난 이 주제에서 계속 빠져서 고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서사‘를, 즉 구체적인 자기 이야기를 찾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 게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 ‘개인의 서사’들을 엮는 것들도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사실 ‘주체화’라는 현대정치철학의 기획과도 맞물려 있다. 물론 세넷의 책은 어쩌면 ‘제안’을 하는 책이라기보다는 ‘분석’을 명료하게 잘 보여주는 책이고, 이런 책은 읽기만 해도 정보가 늘어난다. 좋은 책이다. 꼼꼼하게 구체적 사례를 드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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