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2.0 시대 – 디지털 거버넌스와 민주주의

조화순 - 디지털 거버넌스, 책세상, 2010. 9
 2008/07/2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미디어 2.0 – 웹 2.0 시대의 미디어의 역할에 관해서
2008/07/1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한국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 강원택(2008)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보화’의 파급에 대한 논의들이 엄청나게 몰아붙였다. 이는 ‘세계화’ 혹은 ‘지구화’에 대한 논의들과 짝을 이루면서 21세기의 중심 질서에 대한 논의와 맞물려 있었던 편이다. 요즘은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나 ‘정보화’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편이지만.

논의는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정보화의 물결이, 그리고 세계화의 물결이 과연 기존의 질서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국가가 과연 세계화/정보화에 의해 약화될 것인가, 혹은 여전히 강한 주체로 남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질문은 그 자체가 야바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경험적으로 국가는 10년 넘게 아직 너무나 ‘짱짱히’ 살아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국가와 정보화/세계화라는 것의 관계를 길항관계/제로섬 관계로 설정하는 것 자체에 들어있는 편향이 있다. 헬드의 말처럼 하면 기존의 질서는 ‘변형’ 혹은 ‘전환’되고 있다.

기술결정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이버 공간에서의 유토피아적 전망 혹은 제레미 리프킨 등이 가지고 있었던 디스토피아적 전망. 다른 한 편에서 이른바 ‘국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비관주의적 견해와 국가 필요성의 도출 정도가 이론적으로 제출된 것 같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는 ‘혁명’의 전망을 네그리 같은 경우는 정보통신혁명과 연동하여 사유하기도 하였다. 훈육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 진행되는 도식에 있어서 정보화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연동이 만들어내는 ‘제국적’ 질서에 대한 사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너무나 로컬한 맥락과 결부되어 움직이고 있다. 사스키아 사센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이유다. 정보화와 전지구화에 의해 등장하는 새로운 흐름들은 더욱더 기존의 맥락에 의해 강화되거나 깎이고, 반대로 새로운 흐름들이 기존의 맥락들을 재구성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냥 논리적인 차원이고, 사회과학의 논의들은 더 구체적인 층위의 ‘분석’을 해내야 한다.

물론 그러한 논의와 상관없이 무엇이 ‘새롭게’ 등장했는가에 대한 논의는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WWW’과 인터넷이 우리의 몸의 리듬 자체를 바꿔놓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적인 도입들 – 예컨대 블로그와 인스턴트 메신저, 아이폰과 아이패드, 트위터 등 – 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는가,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소통의 방식들을 어떻게 바꾸며 그것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혹은 방향없이 진행되는가에 대한 질문들 말이다.

2007년을 경유하면서 나왔던 ‘웹 2.0’의 전망들이 있다.  ‘참여, 개방, 공유’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설파되던 시절. 한국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시절이었다. 블로그의 트래픽과 메타블로그들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적 전망’이 제출될 것만 같았고, 2008년의 촛불에서 나타났던 ‘디지털 민주주의’와 실시간의 플래시몹과 같은 소통의 방식들, 그리고 ‘집단 지성’은 마치 거대한 흐름으로 기존의 흐름을 꺾을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그러한 측면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편이다. 하지만 기대만큼 미치지는 못했다. 웹이 처음 도입될 때의 기대들이 점차 상거래와 스팸 메일 등에 의해 꺾였던 것처럼, 지금의 트위터를 보라. 거기에는 분명 가능성들이 존재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형태의 오작동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구닥다리’ 주체들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예컨대 다시금 ‘국가’를 소환하고, ‘사회’를 소환한다. ‘규제’의 이름이 등장하고 ‘조정자’로서의 행정부의 역할이 강조된다.

조화순에 책에서도 역시 다시금 ‘구닥다리’ 주체들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 까닭들이 나온다. “인터넷이 하향식으로 명령을 집행하는 기존의 통치 시스템의 문제점들을 수정해나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기존
정치 시스템에서 큰 변화를 관찰하기는 어렵다. (……) 현실 국제정치에서는 패권을 가진 국가가 여전히 인터넷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중국처럼 국가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네트워크를 통제하고 정보를 검열하려 드는 경향이 존재한다
“(p.12). 뒤의 부분은 이러한 상황에서 더 골때리는 ‘구닥다리’ 주체들의 행태가 나오는데. 이를보면 풀어야 할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질서의 ‘재조정’이 강제되는 상황에서의 ‘권력관계’ 호은 ‘사회적 관계’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권력은 비대칭적으로 재편되어있고, 푸코식으로는 편재되어 있으나 ‘지배’의 메커니즘이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재편을 위해 ‘새로운 주체’들의 가능성을 조명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프로슈머의 가능성을, 집단지성의 가능성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가능성을, 또는 파워 블로거의 가능성을, 트위터러들의 가능성을 말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좀 더 정교하게 가야 한다. ‘영웅담론’ 만들듯이 하는 식으로는 그것들은 곧 이어 기성의 권력 기제에 편입되고 만다. ‘트위터러’가 되고자하는 정치인들의 행렬을 보라. 게다가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배제’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었을 때의 사회적 ‘비대칭적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디지털 거버넌스’라는 언어를 통해 새로운 체제regime을 만들어내는 시도로 대응하려 한다. “디지털 거버넌스는 시장이나 위계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조정을 꾀하는 것이다. 디지털 거버넌스 내에서도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행위자이며 사이버 공간을 관할하는 여러 도전 세력들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행위자이다
“(p.140). 뭐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국가’, ‘어떤 행위자’, ‘어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엄밀한 규정의 문제가 된다. 이러한 정보화에 대한 논의는 종종 국제정치학에서의 ‘신자유주의 제도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들이 국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 가정들은 생략된 채 우리는 그 프레임에서 놀 때가 있다. 예컨대 국가의 ‘역할’을 적절한 제도화를 통한 규제/조정의 주체로만 설정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의 문제나 내부적인 사회적 구성(계급 구성 등)이 생략된다. 게다가 잘 생각해보면 ‘어떤 국가’냐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는 ‘제도화’의 수준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권력관계’를 포함한 다양한 층위의 가정들에 대해 검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와의 연동을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몸이 ‘신자유주의’화 되고 있지 않나.

게다가 초국적 기업, 초국적 시민운동, 글로벌한 차원에서의 국제 기구들을 생각해 볼 때 어떤 ‘모양’으로 국가가 주조되는 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한 편 배제된 주체들의 목소리를 통해 정치학의 논제를 팽창시켜 터뜨려버려야 한다. 몫이 없는 자들의 눈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늘 ‘하모니’를 추구하는 상태에 대한 가정을 터뜨려버려야 한다. 늘 정치학에서 ‘다이내믹스’ 혹은 ‘동학’을 강조하지만 그것들이 작동하지 않을 때 보통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구조-기능주의적인 ‘가정’이 숨겨져 있다. 갈등론적인, 좌파 정치학적인 태도를 견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애당초 ‘디지털 거버넌스’가 말했던 민주주의적 전망을 더욱더 발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은 ‘무엇’이 등장했고, ‘어떻게’ 진행했는지에 대한 시작과 결과에 대해 개괄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여기에서 논의를 멈출 수는 없고 더 구체적을 들어가 논의를 팽창시켜 터뜨릴 때이다. 그리고 다시금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를. 글로벌-로컬을 횡단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글로벌한 전망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