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병사의 눈으로 본 군대 이야기 – 일본의 군대, 2005

일본의 군대10점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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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군대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 이론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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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레오 타입의 군대를 넘어서 일본 군대 바라보기</p>

</span>한국에서 일본의 군대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스테레오 타입에 있다. 학도병. 징용. 징발. 위안부. 등의
단어가 떠돌면서 일본 군대에 대한입체적인 생각은 불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영훈의 문제제기 등에 대해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 우리에게는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전후
정규군을 운영하지 않으면서 군대에 대해 입체적인 판단보다는천황의 군대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바라보기가 오랫동안 진행되었다.</p>

</span>문제는 이렇게 보는 시선이 굉장히 여러 가지를 놓친다는 것이다. 내가 여성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이군사주의그리고남성성의 렌즈를 통해서 군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이러한 부분에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입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천황의 권위를 중핵에 놓은 엄격한 명령복종관계, 총검돌격만능론으로 상징되는 극단적인 정신주의, 내무반에서 이루어진
사적 제재라는 이름의 처참한 린치, 국제적인 비난의 표적이 된 각종 전쟁범죄, 등등이 그 일반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p.22).
하지만 여기에는 군대 생활을 했던 남성들의구체적
서사가 생략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을 동시에 같은 군인으로 만드는 것은피해가해의 문제를
단순화시킬 우려를 낳는다.</p>

# </span>징병제에 대한 저항</p>

</span>일본에서도 징병제에 대한 저항은 초창기부터 강력한 편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사용하여 근시안이 되는 것 / 전혀 고장이
없는 눈을 근시처럼 호소하는 것 / 눈에 자극성이 있는 것을 넣어 안구를 충혈시키는 것 / 전날 밤 수면을 취하지 않고 다른 눈병이 있는 것처럼 호소하는 것 / 귓속
깊숙이 콩 종류를 넣는 것 / 고막에 새털 종류를 부착시켜 청력의 고장을 일으키는 것 / 강한 자극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 이명을 일으켜 고장이 있는 것처럼 호소하는 것 / 이를 고의로 뽑는 것 / 간장을 다량으로 마시고 심장의 고동을
높여 심장 외에 진병이 있는 것처럼 호소하는 것 / 신검 2~3
전부터 식사를 조절하여 신체를 쇠약하게 하는 것 / 손가락을 절단하는 것 / 항문에 옻을 발라 치질이 있는 것처럼 호소하는 것 / 신불(
神佛)에 징병을 면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p.24) 등의 별별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온라인이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돌아다니는면제의
테크닉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p>

# </span>군대와 근대화근대적 신체, 평등주의, 능력주의</p>

</span>하지만 다른 한 편 군대는근대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공간이었다. 군대에 가서 양복을 처음 입고, 사투리를
고치면서표준어라는 것을 사용하게 되고, 빵과 고기를 섭취하게 되었다. 양복과 구두를 신게 되었다. 농촌에서 살던 많은 민중들에게 군대는별천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근대화된 신체와 정신을 만드는 군대에
대해사람 만드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일본인들에게서도 나온다. “말하자면 군대는 인간수양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2년이나 3년이라도 전쟁이 있어 목숨을 잃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군대는 인간수양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
소작농 요코스카, p.26에서 재인용). 한국의군사주의가 세어서 남자들이 편입했다고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손쉽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
저항들과 부적응들이 있었다. 예컨대 군화를 신다가 발 뒤꿈치가 까지고 물집이 잡혀서 훈련소에서 결국
짚신을 신기거나 나막신을 신기는 경우가 생겼고, 빵보다 밥을 너무 선호해서 밥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이 있었다. 양복의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저자는이렇게 군대와
사회 사이의 도랑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근대화란 어떤 의미에서 사회와 군대 사이에 넓어진 이 도랑을
메워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p.62). 이를 위한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군대교육과 학교교육의 연결
강화이다.
“(p.63)라고 말한다. ‘군대식 체조가 학교에 도입되고(국민체조처럼) 운동회와 행진이 진행된다.</p>

</span>그리고 군대는 하층 계급 남성들에게 분명 여러 가지 기회를 제공했는데, 이것은평등주의능력주의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평등주의. “군대는 그 자체로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간접적인 방식으로 평등성을 가진 것이다. 군대 내부에서의 권위는 다른 집단에서의 권위보다도 보다 명확하고
보다 흔들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안 되었고, 또 보다 배타적인 모습을 가진다. 군대 내부의 계급제는 이것을 저촉하거나 제한하는 것 같은 다른 가치 척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계급만이 문제가 되었고, 다른 자연적 혹은 사회적 특권은 무시된다. 자신이 상관보다 부유하고 좋은 여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병사는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군대는 복종과 평등성이 조합된 최초의 사회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p.79) 농촌에서 구체제의
강력한 신분제를 체험한 이들에게 군대는 분명 평등하고 민주적인 공간으로 비추어졌을 수 있다.</p>

</span>그리고 능력주의. “진급의 밑바탕은 체력이다. 농촌에서 종일 노동을 한 소작인이
항상 우세하기 때문에 소작의 자부심을 강고하게 한다.”
“(p.81)  “소작 출신의
병사는 현역 만기 후 하사관을 지원하는 자가 많고, 1
지원병으로 입영한 지주의 자제도 동향 소작 출신의 하사관을 믿고 그 비호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주 ·
소작간의 상하관계가 역전되는 경우조차 있다는 것이다
“(p.82). 농촌에서의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던 농민의 2 3남들에게 군대는 분명 기회로 작동했던 측면이 있는 것이다.</p>

# </span>학력과 군대평등주의의 사각지대</p>

</span>평등주의가 능력주의가 작동한 것은 분명 맞지만, 다른 한 편에서 여전히학력의 문제로 인한 계급 갈등은 존재했다. 예컨대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입영 전의 학력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 병사 차원의 일이었고, 군대라는 조직 전체에서 학력은 커다란 의미를 가졌다. 정규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육군사관학교 · 해군병학교 등의 졸업 학력이 필요했으며,
직업 군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병역의 부담을 가능한 한 가볍게 하려고 하는 고학력자에게는 이미 말한 대로 1년 지원병 등의샛길
있었다
“(p.84). 이러한 양상은 사실 한국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강하게 관철된다. 장교는엘리트로서 충원되고, 병사는하위 계급으로 충원된다. 물론
여기에는직업군인징집병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병사들에서 장교로의 물꼬를 터주었던
부분을 보면 이러한 계급의 문제가 단순하지는 않다.</p>

“</span>소위 후보자 출신 장교라고 하면 이른바 병사로부터 성공한 장교를
의미한다. 물론 육군 현역 장교의 주류는 군 학교인 유년학교나 일반 중학교를 거쳐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사관후보생 출신자로, 그들은 병사의 신분을 체험하는 일 없이 장교가 된 엘리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후보자 출신 장교는 어디까지나 방류에 지나지 않았다.
(……)
소위 후보자 출신과 사관후보생 출신자 사이에는 진급 등에서 분명한 차별이 있고, 전쟁
말기의 극단적인 요원 부족 상태에서 소수자가 중좌까지 진급하는 데 그쳤다
“(p.100).
즉 하급 계급 출신의 농민 출신의 병사들에게 군내부의 요직과 상위 신분은 보장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p>

</span>다른 한 편 지적해야 하는 것은, 징병제에 대한 고학력자들의영리한 대응이다. 이는
지금의 한국의 군대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굉장히 적실 하다. “중일전쟁 이후의 전면전쟁기에는 (……) 그러나 그 시기에도
고학력자에게는 위험도가 보다 낮은 경리업무 관계의 장교 등을 지원한다고 하는 선택이 가능했다. (……) 그러나
단현지원은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주계 장교에 단기간 임용된다고 하는 점에서, 심하게 말하면 일종의징병기피적인 의미를 가진다
“(p.85). 예컨대 한국에서 SKY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한국에서 공군장교를 가듯경리 장교로 가서 자신들의 징병을 수행했다.</p>

</span>여기서 그것을 분석할 때의 이론적인 난점을 요시다 유타카는 정확하게 지적하는데, 나 역시
이 부분에서는 막힌다. “문제는 비교적
위험도가 적은 후방에 근무할 수 있는 고학력자일수록 전사율이 낮고,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일반
민중일수록 전사율이 높다고 하는 관계가 실제로 존재했는가, 또 가령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논증할까이다. (……) 여기서 애로가 되는 것은 일본의 경우 중일전쟁 이후 대량동원기의 체계적인
군사 통계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현실이다. 이것은 패전 직후 중요한 군사 관계 자료를 대량으로 소각했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지만, 본래 대량의 통계를 수집 · 정리해서
신뢰성이 높은 군사 통계를정비해 둘 능력과 여유가 일본의 군사관료 기구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p.87). 예를 들어 천안함 사태 때의 사망자를 준거로 하나의 논의가 가능하지만 전반적인 한국에서의
군대 보직과 군대 신분/계급과 학력 혹은 (사회) 계급의 관계를 명료하게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요시다 유타카는
우회적으로 이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한 방을 먹인다. “한편 본래 고학력자일수록 군무를 하는 비율이 낮다고 하는 관계가 성립한다면 종군자 중의 전사율 비교는 그다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도 덧붙여 두고 싶다
“(p.89). 애당초 군대
징집률이 낮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 한 방의 비수다. 문제는
자료가 없는 것일 뿐.</p>

# </span>짧은 군축의 시대, 그리고 전쟁의 시대</p>

</span>분명 초기 도입 때부터 누적되어왔던 일본 군대의모순들‘.
이 글에서는 모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컨대정신주의전범령등의 문제가
존재했다. 병력 위주에다가까라면 까식의 상명하복의 질서, 상관책임제 등을 통해서 실질적인 전력과
상관없이 군을합리화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군대 내부의
문제제기들이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는 심지어진보적인 군인들도 등장했다. 육군 소장이었던 코노는재향군인과 소작쟁의를 하는 농민의 입장은 자연히 별도의 것으로, 군대
교육에서병졸은 장래 소작이나 노동쟁의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가르칠 만한 처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재향군인의 소작쟁의나 노동쟁의에의 참가를 시인했다
“(p.138). 물론 그는 점차 군대 내에서 수세에 몰리고 예편하여 아사히 신문의 기자가 된다.</p>

</span>그나마 큰 군 개혁의 흐름, 즉 군축이 우가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참조해야 하는 점은 군축이 단순히 군의 양적 질적 축소/저하가
아니라첨단군으로 진행하는 도정에서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군의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군 바깥의 사회에서는 교련이 도입되고, 청년훈련소가 설치된다. 한국으로 치면 청년훈련소는 지역에서의 군사학교
같은 곳이다.</p>

</span>하지만 그 나마의 흐름도 중일전쟁이 돌입되고천황의 군대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모두 끊기고, 군대는 우리가 기억하는 일본군의
이미지처럼 무지막지하고 칼을 차고, 정신병자 같은 모습으로 재편된다.
황군의 태도 등을 담은군인칙유의 암기가
상시화되고, 어떤 소위는 자신이 군인칙유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 수치심에 자살을 하기도 한다.</p>

</span>마지막으로 요시다 유타카는 예비역 · 후비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예비 · 후비역
병사는 연령도 높고 가정을 가진 기혼자가 많다. 이른바장래의
염려를 끊지 못하고 생활을 질질 끌면서 전장에 동원되어온 사람이다.
그런 만큼 체력도 떨어지고 전의도 결코 높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각 부대에서는전쟁에서 병사는 젊을수록 정신력이 있다. 예비역이나 후비역은
전투기술은 우수해도 연령이나 기타 관계상 정신력이 박약한 감이 있다. 오히려 미교육이라도 젊은층을 우수하다고
할 만큼 지휘도 용이하다라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미교육병이라도 보충병역의 젊은 병사 쪽이 낫다고 하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군 중앙의 대세가 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예비 · 후비역병에게 모순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쟁 목적이 불명확한 채로 전쟁이 장기화하는 데 따라 그들은 자포자기적 충동에 몰려 군기를
근저로부터 흔드는 존재가 되어갔다
“(p.201). 태평양 전쟁 당시 우리가
떠올리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전의에 불타고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신앙
군인들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많은 수를 구성했던 예비역 · 후비역은
군대를 질척거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딸린 식구야말로
얼마나 큰 그들의 책임이었는가.</p>

</span>또 다른 한 편 지역사회와 군대의 유리가 일본군의 취약성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중일전쟁의 초기까지는 전지를 향하는 향토부대를
지역 민중이 열광적으로 환송하고 지방 신문이 향토부대의 전투 활동을 화려하게 보도하는 것에 의해 전선과 지역 사이에 강한 일체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축제의 요소를 가지고 있던 환송행사가자숙을 강요받고, 이에 더하여 보도 통제의 강화에 의해 지방 신문이 구체적인
정보를 전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일체감은 급속하게 엷어져갔다
“(p.216).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인 남성들의불안함이라는 것의 근원에는
이러한분리의 감정이 강하게 작동하지 않았을까.</p>

</span>여기에서 루스 베네딕트가 말했던 기리, 기무 등의 관념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늘 불안정했고, 여러 측면에서 도전받고 있었으며일본인의 속성이라 말하기에 어려운 지점들을 분명하게 포착된다. 그리고 이제서야
가미카제에 타려는 남성들의불안한마음을 읽고 군대 체제가
얼마나 강력한훈육 기제였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전후에 갑자기 사람들이 군대에 대해 비판적이 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이미 잠복해있었던 불만들이 터져나온 것이었다.</p>

# </span>일본의 군대를 통해 한국 남성들의 군대 경험 생각하기</p>

</span>일본의 군대를 통해서 지금의 한국 군대의 궤적이라는 것을 아련하게 나마 추적할다른 렌즈를 발견할 수 있다. 제도의 눈 혹은 구조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그들이
술회하는 구체적인 자기 서사들, 그리고 거기에 가장 밀접하게 달라붙어 있었던 상황들을 통해 보는 것은
분명 대안적인 시선을 가능하게 한다.</p>

</span>추상적인 군대의폭력성에 대해 제기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군대에 대한 남성들의경험을 통해 구성하는 것의 중요성.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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