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사랑학. 성해방과 자유.

야성의 사랑학8점
목수정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2008/08/2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발칙한 좌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2010/10/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어느 좌파 인텔리 남자의 연애 판타지 – 그 남자, 영풍문고를 가다.

목수정의 글을 좋아한다. 어딘가 깊은 곳을 울리고, 묵직한 한 방을 반드시 날려버리지만, 그녀의 글의 유려함은 그러한 깊은 지점을 잊게 만든다. 빨려들어가듯 다 읽고 나서, 묵직함을 느끼는 것이랄까.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 속까지 정치적인>을 처음 읽으면서 ‘발칙함’에 꽂혔지만, 언젠가 그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묵직함이 더 컸던 기억도 있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10점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레디앙

<야성의 사랑학="">이란다. ‘야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신비함이 책을 뒤덮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잃어버린 어떤 감각으로서의 야성.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첨예한 지점 ‘사랑’. 바로 ‘사랑’에 대해 목수정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책의 시작은 왜 ‘작업거는 남자’가 사라졌냐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p>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신들의 가슴을 불시에 두드리는 여인에게 다가가
차 한 잔 할 수 있냐고 청하는 남자들의 부재“(p.8).

목수정이 사용하는 설정은 아무래도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나온 ‘성 억압’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섹스가 억압되고,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들과 국가에 의해 통제됨에 따라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이 확산된다는 가설. 라이히의 도식의 이데올로기로 유교와 가부장제,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소환된다. 그 설명의 대상으로 내 또래가 설정된다. ‘불안이 잠식한 영혼들’에 대한 모사가 나타난다. </p>

내 존재가 어디 서 있는지, 어디 서 있게 될지 알 수 없는 혼돈과 불안,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포연만 가득한 몇몇 가진 자들의 세상에서 새파란 젊음이 갖는 막막함은 생명의 자연스런 요동을 가로막는다. 깔깔거릴 일만
있던 유아기를 지나 나를 둘러싼 세상에 의식이 눈뜨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들은 경제적인 불안이 삶을 어떻게 좀먹어 들어가는지를
혹독하게 학습했던 세대다
“(pp.42-43). 결국 낭만적 연애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있는 자’만이 되어버린다. 모두는 너무나 바빠지고, 자신의 가치를 ‘스펙’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수량화할 수 있게 교환가치를 획득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성의 사랑’이 복원될리 만무하다. ‘사랑의 부재’가 떠다닌다. 그나마 부지하고 있는 사랑의 성립조건인 둘의 ‘독립’조차 지독한 고용불안의 사회는 30살 남짓으로 몰아버렸다. 섹스리스 부부가 속출하고, 여기에는 불안이 있다.

거기에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 유교와 결탁하여 더 강하게 ‘여성억압’의 기제로 작동한다. 목수정은 급진주의-페미니즘의 가설들과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 사이를 손쉽게 넘나다닌다. 결국 계급적 억압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점. “고학력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여성들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저임금,
비정규직들이 주종을 이루며, 오로지 성산업계에서만 여성들에게 넉넉한 임금을 제공한다면, 기꺼이 자기 영혼을 팔아 빵을 사고,
명품백을 사고, 성형수술을 하는 여성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 소비할수록 우리의 존재는 축소된다.”
“(p.159) 그리고 젠더가, 가부장제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주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부장제를 단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물 수 있는 공통의 이해를 통해 풀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한다. “한국여성들도 연예인 속에서만 매력남을 찾지 말고,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남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매력을
기르고 소통의 능력과 감수성을 연마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싶다. 그들에게 그런 면이 부족하다면, 그들의
부모와 이 사회가 사내다운 사내를 만든답시고 해오지 않았던 감수성과 소통을 위한 교육, 자신만의 미감을 키우고 취향을 가꾸도록
하는 노력을 그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있는 여자들이 팔 걷어붙이고 해주어야만 한다
“(p.51).

그리고 그 과정을 ‘야성의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완전한 야성의 즐거움을 누리던 벌거벗은 시절로 돌아가 보자. 엄마가 우리의 보드라운 살결을 입술로,
손가락으로 애무하고, 우린 그녀의 젖꼭지를 이발도 없는 허술한 입술로 쪽쪽 빨아 대며, 온몸에 만족을 가득 채우던 그 시절.
엄마의 포근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며, 생글거리는 엄마의 미소가 눈부시던 아침의 햇살 아래 나를 맞이하던, 그 완전한 행복의
시절로 돌아갈 순 없는가, 정녕. 물론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인 이유이기도 하다
“(p.113). 성적인 것이 수면위로 올라오고, 우리는 강렬하게 섹스를 열망하고, 사랑을 열망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순들이 전면화되고, 그것들을 통해서 다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봉인되거나, 기존의 질서를 위해 봉인되는 것에 목수정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성이 전면에 드러났던 사회, 그래서 그 자극과 갈등이 더욱 도드라졌던 사회에서는 제2의 성을 가진
사람들의 차별에 저항하는 의지도 강렬했고, 결국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제도적 차원에서나마 평등에 다가서는 실천이
가능했다
“(p.172).

그녀가 청하는 사랑에 강렬하게 감전되고 싶다는 생각이 온 마음에 뻗친다. 역동적인 사랑. 아니 사랑 그 자체만으로 원래 역동적이었을지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젓가락질을 하던 손은 연인의 등을 피아노 건반처럼 명랑하게 두드리고, 그의
머리칼을 깊숙이 쓰다듬고, 얼굴로, 목덜미로 미끄럼을 타면서 생성되는 전율을 서로의 몸에 전한다. 말을 하고 밥을 먹던 입은
연인의 입술을 탐스럽게 빨아들인다. 엄마의 젖꼭지를 빨아들이던 20년 전의 그날처럼. 엄마의 젖꼭지도, 우리의 입술도, 붉은
색깔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우연이다
“(p.23).

그런데 읽을 때의 꽉 차오르는 어떤 욕망들은, 다 읽고난 뒤의 무기력과 조우하여 갈증을 빚고, 헛헛함을 남긴다. 가을이 되긴 했나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해 요즘 내가 시큰둥 해져서 일까. 더 많은 자유 말고 더 좋은 말이 뭘까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거나 ‘섹스’가 과자 이름으로 들리기 이전에 나도 야성의 사랑을 하고 싶다.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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