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2010/09/05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4] 신자유주의가 궁금하다구요? 그럴 때 읽을 책.
2009/09/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겪어서 쓴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 낮은산, 2009
2009/10/01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영화를 보다] – 개같은 청춘? 열어보자 청춘! 개청춘!
2010/08/16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레디앙] 20대 깨는 것은 한일 두 나라 똑같아
2010/08/21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2010. 8. 20. 29살 사가정 면돌이들과의 하룻밤.
2010/09/06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레디앙 – 진보, 야!] 면목동 중딩, 싸움을 못한다는 것의 의미?
2010/09/28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레디앙 – 진보, 야!] 추석, 면목동 29세 청춘들의 자화상
2010/10/26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비관조차 버거운 빈곤층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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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10점
엄기호 지음/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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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좀 전에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 2009)를 읽었던 적이 있다. 경계에서 유동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들을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발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낙관적이 되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들의 성급한 결론들은 그 책은 완전히 꺾어 버렸다. “</font>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세상은 꿈쩍하지 않나?” 라는 식으로 많은 이들이 접근하곤 하고, 이에 대해서 ‘성급한 대답’들이 도출되곤 한다. 투표 안 하는 20대가 문제이고, 가난하지만 보수정당을 찍는 가난뱅이들이 문제이고, 부동산 투기를 하는 중산층이 문제이고, 문제이고 문제이고… 모두 누군가의 ‘탓’이 되고야 만다. 하지만 모두는 각자에게 나름 ‘합리적인’ 대답들을 내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에 대해 해석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자명하다. 엄기호는 그것들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언어’로 만들고, ‘개념’과 더불어 읽어내는 사람이다.</font> </div>

엄기호의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그의 스승이자 나의 스승인 조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인 ‘인류학적 마음가짐’을 가지고 쓴다는 점이다. 섣부른 진단이 없기에 섣부른 낙관과 비관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책은 희망에 부풀어 있고 자신만만한 이들을 가라앉히고, 비관적인 사람들은 그의 책의 말미에 나오는 말들로 위안을 얻는다. 그게 가능한 것은 그가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도 역시 그러한 관점에 충실하다.</font> </div>

조금 더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20대들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들에 대해 이 책은 명확하게 철퇴를 때린다. 위에 잠깐 언급했지만 ’20대 개새끼론’과 ’20대 희망론’이 사실은 동전의 앞 뒷면임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다른 목소리로 안 읽으면 20대와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함을 밝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라 말할 수 있다. 덕성여대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문화인류학> 수업을 통해서 나누었던 학생들의 말들이 그의 글을 통해서 ‘책’이 되었다. 인류학에서 전통적으로 문제삼는 ‘타자’에 대한 재현, 즉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 엄기호는 정직하다. “</font>그들은 나의 지적 파트너였으며 도반(道伴)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물은’ 사람으로서의 나의 기록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언어로 그들과 만나려 했는가, 또 나의 언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들의 사유의 힘을 발견하였다.“(pp.239-240) 그와 나는 더불어 ‘진정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는 ‘진실’의 힘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font> </div>

그는 위에서 말했듯 그렇기에 젊은이들에 대한 섣부른 주장들에 대해 철퇴를 날릴 수 있다. “아무도, 다른 이의 삶을 모독할 권리 따위는 없다. 각자의 삶이란 각자가 던지는 질문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탈정치화’라든가 ‘소비주의적’이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판단의 언어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우리가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다. 질문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나 페다고지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곳에는 다만 날것의 폭력과 존재에 대한 모독만이 있을 뿐이다“(p.27). 이 문단을 통해 엄기호가 읽어낼 방향을 어렴풋이 읽어낼 수도 있겠다.

엄기호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그 충격은 새로운 사실들 때문에 충격적이지 않고, 도리어 우리가 너무나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눈 감고 살기 때문에 놓쳤던 생각들을 다 끌어모아 정리하는 것에 있다. 그러한 지점은 너무나 많지만 내가 주목했던 것은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눈’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1)먼저 이를테면 우리가 20대를 이야기할 때 그 ’20대’는 도대체 누구였는가? 우리가 들은 ’20대’들의 목소리는 어떤 20대들의 목소리였는가? 사실 목소리를 내고 그나마 바깥에서 받아들여준 목소리는 기성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학벌과 계급의 측면으로 놓고 보자면 ‘상층부’ 혹은 ‘몫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였을지 모른다. 그 마저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기 마련이다. 책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 김예슬’이 아니라 ‘덕성여대 xxx’가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정의감들은 그러한 측면에 눈을 감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가?

2)두 번째로 이야기해볼 것은 ‘도덕의 정치’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주의적 관점’들. 예컨대 정치인에 대해 우리는 그것의 ‘정치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치인을 욕할 때 그의 정치적 책무에 대해 묻지 않고, 대신 그의 선과 악에 대해 질문한다. 따라서 정치인들을 “나쁜 새끼”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서 악의 무리를 소탕하자는 방식의 이야기가 내려진다. 문성근의 ‘민란’ 프로젝트가 바로 그러하다. 노무현의 ‘진정성’이 ‘조중동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국개론'(국민이 개새끼다)라는 방식의 대화도 바로 그러하다. 한나라당(민주당)을 혐오하는 나이든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대화가 바로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들은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까? “도덕이 반윤리를 승인하며 바로 이것이 현실 정치의 역할이다. 인간을 서열화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로 갈라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다. 무감각해질 수 있다“(p.261). 이러한 ‘잔인함’은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 진단’을 내려버리는 것에서 온다. 문제는 그러한 ‘도덕적 진단’의 배경에 깔려있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너무 손쉬운 믿음들임을 엄기호는 지적한다. “정치의 끝에서 윤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멈추는 지점에서 우리는 정치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분류하고 그 분류표에 따라 어떻게 취급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새로운 정치는 이렇게 분류표에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사유는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되묻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이다“(p.237). 엄기호는 그러한 믿음들의 ‘분류표’에 질문 던지기를 청한다. 손쉬운 판단을 멈추고 다시금 ‘정치적인 것’을 구성해야한다는 요청도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가능하다.

3)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그의 ‘질문의 공유’라는 주장이다.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가 오래 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좌파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에서 입장의 동일함을 찾으려다 결국 돌아서고 찢어지는 것 말이다“(pp.241-242). 쉽게 말하자면 같은 것들을 함께 묻고 다른 대답들을 가지고 또 다른 질문을 구상하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대답’을 통해 같은 결론을 공유하는 강경하고 단단한 조직만을 선호해왔던 것이 사실 아닌가. 엄기호는 여기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다.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의 질문이었지만, 이를 엄기호는 좀 더 강화한다. “</font>그렇기 때문에 나는 교실에서 정답이 아니라 낯선 질문, 이질적인 대답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이런 낯선 질문이야말로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을 전해주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p.243). ‘이질적인 대답’과 ‘낯선 질문’에 대한 환영. 그리고 그 ‘낯선 질문’들을 공유하면서 다른 상상력들을 만들 여지가 생겨난다.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font></font> “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세상은 꿈쩍하지 않나?“를 넘어서서 다른 ‘정치’를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낯선 질문’들은 늘 여성주의와 인문사회과학의 질문이기도 한 ‘성찰’이라는 문제에 대한 힌트를 준다. 지금까지 도전받지 않는 낯선 질문들을 통하여 자신의 문제들을 달리 읽어보는 것. 지금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div>

언급한 3개의 질문거리 말고도 이 책에는 읽을꺼리가 너무 많이 있다. 그것들을 이 글에서 다 언급하기는 힘들 것 같다. ‘낯선 질문’들이 많다는 것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사실은 우리가 자꾸만 귀를 닫고 눈을 감아버린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차원을 다시금 묻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엄기호의 글은 잘 읽히고, 많은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이는 ‘현학’을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입혀지는 고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개념을 익힐 때도 이런 식으로 익힌다면 우리에게 철학책이 늘 ‘수면제’는 아니련만.

책을 읽으면서 고마웠고, 계속 ‘우정과 환대’라는 고민 자체를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동기를 잡게 되었다. 조한의 말 처럼 “겉도는 말, 헛도는 삶”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하나의 통로에 대한 힌트가 여기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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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덧붙여서 할 말이 생겼다. 목수정의 책(2010/10/09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야성의 사랑학. 성해방과 자유.)에서 작업거는 남자애들이 사라진 이유를 엄기호의 책에서 찾아보면 좀 더 명확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럼. 목수정보다 ‘현장감’이 엄기호에게서 더 잘 발견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아, 나도 프랑스에서 ‘제 2의 68’이 터졌으면 좋겠다!! 한국에는 일단 ‘감’이라도 좀 잡고 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