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지식인에 대한 생각과 현장성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보편적 지식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 정의의 인간, 법의 인간으로 보편적 지식인들은 권력, 전제정치, 부의 남용과 오만함과 대치하여 정의의 보편성과 이상적인 법의 정당함을 대치시켰다.“(영문판, p.128)

‘구체적 지식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했다. 핵 과학자 등. (……) 그들은 석학 혹은 전문가로 불린다. (……) ‘천재 작가’의 시대는 끝나고 ‘절대적인 석학’의 시대가 등장했다. 그들은 더 이상 영원한 진리를 말하는 음유시인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전략가strategist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는 지금 ‘위대한 작가’의 소멸을 경험하고 있다.“(pp.127-129)</p>
지금 구체적 지식인들은 분명한 장애에 봉착하고, 분명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p.130)
그들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글로벌한 전략의 부재나 외부의 지원을 받을 전략의 부재 때문에 그들의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 여전히 많은 투쟁의 전개자들은 전체적으로 나이브하고, 구닥다리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싸운다. 예컨대 순수한 희생자에 대한 생각과 순수한 혁명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p.130)
결국 문제는 (비)진리를 (대항하여)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규칙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p.131) 
푸코가 말했던 ‘나이브’하고 ‘구닥다리’들에 대한 언급은 실제로 ‘좌파’의 ‘진영’ 안에서 ‘과학적 진리'(예컨대 ‘과학적 사회주의’)의 담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투쟁의 국면에서 잘 못 싸웠던 점에서 시작한다. 당장 감옥 체제를 깨부수기 위해 싸우고 있고, 협상장에 올라왔는데 협상장의 좌파들의 언어는 여전히 범죄자들을 ‘순수한 희생자’, ‘사법권력의 희생양’이라고 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범죄’와 ‘무죄’를 만들어내는 그 ‘규칙’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 혹은 ‘혁명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월하며, 그로 인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착각들. 그 ‘착각들’과 싸우느라 푸코는 그 ‘착각들’의 계보를 파고 있었다고 말하면 내 망상일까?
그렇다면 지금 ‘지식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 푸코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접근한다. 예컨대 지식인은 1)계급성을 자각하고 2)자신의 직무와 삶의 조건의 파악하고 3)사회 내부 정치의 특수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이야기하는 푸코의 맥락은 순전히 ‘싸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였다. 감옥에 대한 투쟁을 하고 이제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 편에서 ‘도덕주의적’인 담론을 말하는 인간들은 ‘사법 폭력’의 ‘순수한 희생자’ 죄수들을 말함으로써 그 바깥의 모든 죄수들에 대한 배제를 가중시켰고, 다른 한 편에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교의’에 충실한 자들은 구체적 판에서의 ‘전략/전술’에 무능했다.
결국 푸코가 계속적으로 진리에 대해 투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만들어내는 ‘규칙’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그러한 실천의 자원과 결부되어 있다. 예컨대 1980년대를 해석할 때 내가 학출 노동자들을 주목하는 것도 그렇다. 그들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끔찍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학출들이 공장에 들어가서 레닌주의 교의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몸을 ‘전태일’로 바꾸면서 ‘구체적 지식인’으로 변모했던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는 인간들이 없다.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이었지만, 그들은 구체적 일상에서 그것들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듣기’ 시작하고, 그 상황에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예컨대 인민노련의 정치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의에서 빠져나오면서 다른 방식의 정치학을 제안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 있었다. 
오히려 내가 볼 때의 문제는 그 학출들이 동구가 무너지자 순식간에 ‘전태일-되기’를 포기하고 그 공간에 황량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프로파간다의 ‘과격함’만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 현장에서 구체적 일상과 투쟁에 대한 ‘해석자’로 존재해야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자 노동자들은 이미 80년대에 학출들이 보았던 ‘이기적’인 존재 양식을 다시금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임금투쟁’의 이데올로기로, ‘정규직 노조’로 90년대에 확 바뀌어 버린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노동자들의 ‘당사자운동’으로 해결한다는 이야기나, 학출들의 ‘먹물’에 대해 지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현장에서의 탈각’이 아니었을까.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성찰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겠으나 내가 보기에 ‘포스트모던적 상황’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면, 학출들도 계속 그 상황에서 자신들의 몸을 바꾸었을 것이다. 근대적 혁명의 아포리아를 지적하는 것의 의미를 버틀러, 데리다, 레비나스 등을 통해 지적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한 ‘타자’에 대한 윤리나, 환대, 그리고 ‘목적론’에 대한 반성은 동시에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현장에서의 퇴각’이 만들어낸 괴리가 지금 ‘먹물’들과 ‘현장’의 간극을 끝까지 밀어붙인 건 아닐까.
(물론 이 ‘현장’이 바로 공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 언급된바와 같이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구체적 상황들도 현장이 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지향을 위한 공간들, 장소들 모두가 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푸코의 <권력/지식>을 읽으면서 다시금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