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자의 글쓰기, 어떻게 할 건가? – 하워드 S. 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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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의 글쓰기 – 10점
하워드 S.베커 지음, 이성용ㆍ이철우 옮김/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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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리스트’라고 이름 팔아서 나름 여기저기 칼럼도 쓰고, ‘대학원생’이라서 논문과 쪽글을 써야하며, ‘사회과학 저자’로 책도 쓰고 있는 처지다. 매번 ‘글쓰기’ 그 자체가 문제가 된지는 깨나 오래된 일이다. 처음 칼럼을 썼던 의 ‘헨드릭스의 책읽기’의 첫 글이었던 김주완의 <대한민국에서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에 대한 독후감은 정말 엉망이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왜?’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해 본 적은 없었다.</font>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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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분류로 글쓰는 사람을 이태백 형 필자와 두보 형 필자로 나눠볼 수도 있다. 요즘의 시인으로 치자면 매번 노벨 문학상에서 떨어진(죽을 때까지 절대 노벨상을 탈 리 없는) 고은 시인 같은 경우가 이태백 형 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들을 줍듯이, 생각이 정리되면 일관되게 콸콸콸 글이 쏟아지는 경우라 말할 수 잇다. 두보 형 필자는 써놓고, 다듬고 또 다듬고 또 다듬는 그러한 필자다.

나는 매번 내가 ‘이태백’형 필자라고 생각해왔다. 글 쓰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고, 책 읽는 속도도 나름 ‘상위 1%’라고 생각해온 바라 더 그랬다. 문제는 그 글이 ‘어떤’ 글이냐의 문제다. 매번 내가 빨리 써온 글은 ‘쪽글’, 즉 A4 2~3장 내외의 글이었다. 그리고 그 ‘문체’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 글. 엇 비슷한 스케일이어도 신문과 여러 매체에 기사를 싣는 것은 전혀 다른 노력을 필요로 했다. 계속 ‘퇴고’해야 했다. 손 보고 손 보고, 읽어보고 또 손 보고. 그리고 ‘잘 읽혀야’ 한다는 점을 계속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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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커는 전형적인 ‘두보형’ 필자이다. 책을 읽기 전에 ‘두보형’ 필자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굉장히 피곤하게 매일매일 시달리면서 글에 매달리는 그러한 작가 혹은 시인 혹은 사회과학자. 하지만 베커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생각이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뭔가를 써야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되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그들은 두 가지를 두려워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자신의 사고를 조직화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고, 두 번째는 글쓰기가 매우 당황스러운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켜서 자신을 미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들이 좀더 감정적으로 말한 것은 두 번째 두려움이었다. 즉 자신이 쓴 글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고, (불특정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p.24). “나는 수년 동안 강의보다 연구에 종사했기 때문에, 기존의 프로젝트를 끝내기 전에 항상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항상 여러 프로젝트의 글을 동시에 작업해야 했다. 예를 들어, 새로운 프로젝트의 최초의 초고, 좀 오래된 프로젝트의 먼저번 초고에 대한 퇴고, 그리고 출판 준비에 들어간 최종원고 마무리 등의 작업을 동시에 했다. 이런 식의 작업은 생각보다 쉽다. 항상 가장 쉬운 것부터 작업함으로써, 한 프로젝트의 작업이 꽉 막혔을 대에는 하기 쉬운 다른 프로젝트의 작업으로 이동할 수 있기문에,실상 글쓰기 과정의 모든 단계가 훨씬 수월해진다“(p.163). 그의 테크닉들의 효과는 ‘작문’에 대한 이론들에서 ‘경험주의적 검증’을 통해서 검증된 바 있고, 실제로 글을 쓰고 매번 고민하는 사람들은 베커의 말을 들으면서 끄덕거리게 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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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글쓰기의 전략’으로 베커를 읽는 것도 유익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지식의 유통’이라는 차원에서 베커를 읽는 것도 동시에 중요해 보인다. 예컨대 논문을 쓰는 것과 책을 쓰는 것의 뉘앙스 차이/ 논문을 읽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의 뉘앙스 차이를 떠올릴 수 있다. ““즉, 저술가는 똑똑한 사람이고, 내가 저술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저술가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 예를 들어 만약 <미국 사회학회지="">의 논문을 접하면, 그것은 훌륭하고 중요한 논문이라고 간주한다. 그 잡지는 이미 자격을 검증받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논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font></b>“(p.59) 이러한 ‘고상한 척’이 벌어지다보니 학생들도 따라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학술지에서 많이 쓰이는 최악의 문체를 보고 따라하며, 그러한 문체의 남용이 평범한 사람의 말과 자신들의 글을 구별시켜 준다는 사실을 배운다“(p.76).</font></font></font> </div>

사실 한국에서 80년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정통성’ 논쟁이었던 <사회구성체 논쟁="">과 관련된 문헌들을 읽어보라. 헤겔적인 어투와 알튀세르적인 어투, 그리고 레닌의 어투, 스탈린주의의 어투가 뒤범벅이 된 데다가, 종종은 주사파의 어투까지 뒤섞여서 도대체 ‘내공’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들이었다. 이러한 ‘어투’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인텔리에 대한 페르소나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가오’를 형성했다. (물론 당시 PD/CA 인텔리들의’구체적 정세 판단’은 초보적이었음에 트림없다. 요즘의 ‘이론-오타쿠’들과 크게 차이는 없어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최악의 문체’였음에 틀림없다. 입으로 읽어보라. 번역투와 수동태와 이상한 선동투의 결합, 이게 ‘한글’인가? 결국 ‘현장’에서 <현실과 과학="">이나 <사사방>을 집어들고 학습하던 ‘학출’들은 현장에서의 ‘언어’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소통’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유통’에 대해서 베커가 지적하는 지점은 온당하다. 베커는 논문을 쓰면서도 늘 ‘책’으로 만들어서 대중과의 ‘지식의 유통’의 접점을 만들었다. 그 ‘소통’은 그의 명쾌한 언어를 읽다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font></font></font></font></font> </div>

그리고 우석훈 식 글쓰기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에서 평가해볼 수도 있는데,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아닌 초창기의 (출간도 전의) <청년을 위한="" 경제학="" 강의="">에 나왔던 우석훈의 생태경제학에 대한 논문을 읽어보라.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 우석훈의 문체가 아니고, 여기에서는 파닥파닥 뛰는 젊은 ‘좌파 사회과학자’의 전형적인 문체가 나온다. 그걸 내려놓아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들과 베커의 전략이 내게는 같이 보였다. ‘책’의 세계는 ‘논문’의 세계와 다르다. 논문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팔아먹겠다는 기획은 아무래도 확실히 달라 보인다.</font></font></font></font></font>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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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커의 <사회과학자의 글쓰기="">를 읽으면서 계속 좋은 것이 그가 대학원생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 것이 가장 적실하고, ‘어떤 조언’을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단순히 ‘희망 고문’이 아니라, 사회과학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나온 이론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font>마지막으로 사회학의 위대한 자유의 메시지를 우리 자신의 학문적 상황에 적용하라. 당신에게 있는 문제는 전적으로 혼자서 초래한 것이나 한심한 개인적 결함의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 삶의 조직체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하라. 그리고 나면, 당신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고통을 증가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p.251). 게다가 어떤 측면에서는 ‘영업 비밀’도 서슴지 않고 말하는 베커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위대한 대작을 쓰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명료하게 납득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진술하는 좋은 산문을 목표로 삼는 것이 더 나은가? 과학은 뛰어난 산문표현을 필요로 하는가? 학술지의 보편적인 문체로 쓰여진 글이 대작이 될 가능성은 있는가? 작품에 대한 지나친 열망은 현상을 자세히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 디킨스, 태커리Thackeray, 엘리어트Eliot, 트롤프Trollope 등은 전반부의 연재물이 팔리지 않으면 후반부를 쓸 수 없는 삼류 잡지에 글을 투고하는 상황에서 대작을 썼다“(p.200). </div>

미국 사회과학계가 한 동안 맛이 갔던 것들은 사실인데, 그럼에도 계속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계속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인 ‘사회과학서 시장’ 덕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베커의 조언을 듣고 좀 다른 방식으로의 글쓰기를 생각하고, 당장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연습들을 하게 되었다. 우석훈의 표현대로 하면 ‘습작’의 중요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둘의 이야기가 묘하게 겹치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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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뒤의 <옮긴이 후기="">는 읽지마라. 쓰레기다.</font> </div>

그리고 문헌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창조적 오역’에 대해서 말하는 베커를 보면서 나는 조한을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원래 형태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저자가 인식하거나 알아보지 못하게 변형시켜 사용할 것이고, 원저자의 제자들은 내가 그들 스승의 생각을 해석하는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p.220).

하워드 베커의 생김새가 스티븐 J. 굴드처럼 퉁퉁한 아저씨일 것 같았는데, 늘씬하고 미남형에다가 음악도 잘하는 집안의 남자라니. 참, 문투의 소탈함이 더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