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의 이론사 훑어보기 –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앨런 바너드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 6점
앨런 바너드 지음, 김우영 옮김/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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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2010년 지금. 문화를 번역한다는 것은? – 김현미,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2009/10/03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뿌리부터 말라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2009/09/2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내 말’ 찾기 두 번째: 『글 읽기와 삶 읽기』 1, 2권
2009/05/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뻣뻣한 정치학도, 인류학의 세계로 풍덩!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2003</a> </td> </tr>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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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쉽게 이해할 만한 교재가 한국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로저 키징의 <문화인류학>이나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들 몇 명이 쓴 <문화인류학 개론=""> 등의 책이 있지만, 전자는 절판된 지 한참 되었고, 후자는 한자가 많아서 최근의 학부생이나 연구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난적이다. 그나마 쉽게 읽을만한 책은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정도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나서 인류학 이론에 대해 좀 더 깊이 읽고 싶은 수준에서는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다. 그 외에 ‘일신사’에서 한경구 선생과 연동되어 나오는 일조각 출판사의 인류학 책 몇 권이 있는 것 같다. 개론 수준에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의 풀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더 문제는 이론과 이론이 형성되었던 사회적 맥락을 잘 훑어주는 책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font> </div> </div>

그러한 점들을 생각한다면 김우영이 번역하는 인류학 책들 –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인류학의 거장들=""> -과 한 권을 더 보태서 영국의 사회인류학에 대한 통사를 쓴 <인류학과 인류학자들=""> 같은 책들은 굉장히 보물 같은 책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논문들이 아니라, 일관된 서술로 한 권의 인류학사에 대한 통사를 쓰는 책들의 번역은 굉장히 소중해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은 절판되었다. 물론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font>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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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인 앨런 바너드의 관점은 ‘실용주의’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어느 순간 실용주의가 욕이 되었지만, 각 이론들의 난점에 대해서 명료하게 파악하고, 그 사잇길을 잘 잡아낸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그의 실용주의에는 장점이 많다. 책은 대체로 ‘논쟁’ 없이 평이하게 인류학의 각 이론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통시론, 공시론론, 상호작용론’이라는 눈을 통해서 이론들을 한 번 펼쳐놓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인류학자들의 성향이 대체로 나온다. 그러한 3가지 범주가 과연 현대의 포스트모던하고, 성찰적이며 전지구화를 다루고 있는 인류학을 포괄할 수 있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너드는 사실 알고보면 그러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이론들 역시 예전에 있었던 경향들의 반영일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전파론은 오늘날 모든 학파의 기본적인 인류학적 사고에 편입된 ‘문화영역’의 개념을 통해 여전히 살아 있다. 세계체제world-system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 이론은 전파론이 죽지 않았다는 또 다른 징표다“(p.107).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의 ‘사회’인류학과 미국의 ‘문화’인류학의 경향,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평가가 다른 이유 등을 찾아보는 것도 상당한 재미이다. 프란츠 보아스와 ‘구조기능주의’를 말하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지점 등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지점이다. ““첫째는 인간사회에 관한 이론적 자연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과학은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러한 과학은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그런 과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각양각색의 사회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현 시점에서 그런 과학의 발달은 비교방법을 점차 발전시켜 분석의 도구로 정교하게 가다듬는 작업에 달려 있다는 것이 마지막 논제다.”“(p.136) ‘상대주의’가 인류학의 본령이라는 생각들도 영국의 사회인류학적 경향을 따를 경우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다.

나한테 또 재미있었던 것은 내 지도교수 조한혜정 선생과 김현미 선생의 인류학자로서의 포지션을 체크해보는 것이었다. 예컨대 문화 vs 사회라고 할까? ‘문명’ 대 ‘자본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 식의 구도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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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너드의 그러한 절충주의가 칼을 뽑아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석주의에 들이대는 유일한 책의 ‘비판적 논평’을 읽을 때는 좀 갸우뚱했다. “내가 모든 해석주의자에게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그들의 거대담론이 진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들이 생각하는 인류학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민족지에는 진실이 없다면, 인류학은 해체되어 문학비평에 흡수되거나, 문학비평의 한 지류로 인류학 주제의 큰 부분을 차지해버린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로 편입되고 말 것이다“(p.306). 상대적 지식들의 산출되는 체계로 인류학을 전제한다고 해서 과연 문제가 되는 것일까? 게다가 ‘문화연구’을 ‘문학비평’이라 말하는 그의 기준은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 물론 ‘문화연구’ 안에는 ‘문화비평’이 존재하지만, 문학비평보다 문화연구는 큰 범주이다. 그리고 바너드 식으로 문제를 던질 경우 1970년대 CCCS에 의해서 제출되었던 문화기술지적 연구들을 다 부정하게 되는 셈이 되는 것인데..

요즘 문화연구가 하도 영국 내부에서 쥐어 터져서 그럴까?? 그래서 문화연구의 인류학적 위상을 좀 찾아보려 했는데, 별로 논문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의 인류학자들에 의한 ‘문화연구’ 경향과는 확실히 다른 지점이 있나보다. 그 지점이 궁금해진다. 뭐 사실 나 같은 경우야 문화연구가 망하면 인류학과 사회학의 통합하는 관점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는 입장이긴 한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좀 다른 감각의 ‘문화적 접근’이 피룡하지 않나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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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우영이 여러 책에서 선택하는 역어들 몇가지가 맘에 들지를 않는다. 
먼저 ethnography를 ‘민족지’라고 하는 것은 너무 후진 용어로 보인다. ‘문화기술지’나 차라리 ‘민속지’라고 하는 게 더 좋아 보인다.
또 reciprocal을 ‘교호성’이라고 하는데, 상호호혜성이라고 이미 많이 쓰고 있지 않나?

그 외에도 인류학계 내부에서 쓰지 않는 말, 대중적으로도 쓰지 않는 말들이 좀 많아 읽다가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중의 책들에는 좀 더 반영이 되었으면 한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어딘가에도 썼지만, 초심자가 읽기에는 머리가 팽팽돌 수 있다. 조금 낮은 난이도의 책은 <인류학의 거장들="">, 그보다도 쉬운 책은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이다.</font>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