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데이비드 하비! –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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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 10점
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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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5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4] 신자유주의가 궁금하다구요? 그럴 때 읽을 책.
2010/10/17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신자유주의에 대한 짧은 인터뷰 – 김현미
2010/04/1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록펠러에서 빌 게이츠로, 단병호에서 이랜드 아줌마들로
2010/07/01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헨드릭스의 이론 공부 #1]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
2010/08/1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좌파 이론의 쓸모에 대해서 – 며칠간의 노-홍-한-레의 논쟁을 보고.

David Harvey – Wikipedia</span></div>


# 하비에 대한 잡담들
수업시간에 지주형 선생이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하비는 뭘 연구하든지 그 분야에서 한 바탕 시끄러운 소동을 몰고다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초창기 실증주의적 지리학 연구방법론을 택했을 때 영국의 지리학계가 시끌시끌했다고 한다. 캠브리지를 마치고 존스 홉킨스에 갔을 때까지 그는 ‘좌파’는 맞긴 했는데,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난데 없이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언젠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68년에는 뭘 하셨나요?”라고 묻자, 자기는 그 때 페이퍼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존스 홉킨스의 초창기에 그는 ‘정의Justice’와 지리를 엮으려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좌파들의 대가들이 신자유주의 도래가 진행되고 있던 1980년대 픽픽 쓰러질 동안 다른 방향에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가가 되고 만다. 1982년 <자본의 한계="">를 출간하고 ‘공간’이라는 것을 좌파 이론에 새겨넣기 시작했던 하비는 기존의 사회과학자들과 전혀 다른 이론가였다.</span> </div>

게다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지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굉장한 것이 되었다. ‘세계의 지성’. 예컨대 1990년대의 판도만 보자. 에릭 홉스봄이 아직 아티클을 그런 대로 쓰고 있을 때고 부르디외도 살아 있었을 것이고, 여전히 들뢰즈가 살아있을 때였으며 데리다의 미국 발음 연설이 날리던 시절. 하비의 역할이란 약간 ‘후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별로 현란한 레톨릭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정말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쉽게 마르크스를 가지고 세상을 설명한다. (Reading Marx’s Capital with David Harvey 를 보라!) 그러니 좌파 지식인의 아이콘이 되었을리 만무하다. 사실 ‘아이콘’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자면 2010년 지금 지젝이나 랑시에르 바디우에 하비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좌파 지식인으로 ‘분석’을 하겠다는 사람 앞에서 하비의 이름은 얼마나 넘기 힘든 산인가? 그 정도 급으로떠오르는 사람은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 정도 인 것 같다.

# 하비의 출세작 –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이번에 읽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사실상 하비의 ‘출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부분의 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문학’이나 ‘철학/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비의 강점은 그것들을 추동한 사회적 전환을 살핀다는 점이다. 상부구조와 토대에 대한 설명에 있어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 연관을 통해 빽빽하게 분석해낸다. 그러면서도 문체는 차분함을 잃지 않고 평이함을 크게 잃지 않는다. 굉장한 책이다.</font> </div>

지주형 선생이 물었을 때 하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가장 쉽게 썼다고 했단다. 그 동안 읽었던 책들의 총정리라나 뭐라나. 책의 제목은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에 대한 패러디인 것 같다. 이미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조건을 살펴보겠다는 이야기로 내게는 들렸다. 그리고 하비는 마르크스주의자니까 철저하게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추적하리라는 생각이 든다.</font> </div>

#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책의 질문은 간결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포스트모던 문화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 1970년대 초반 이후 사회생활이 급변했는가? 아니면, 이는 으레 그래 왔듯 고급문화에서 또 한 번의 변형이 일어난 것이든지,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생활엔 아무런 영향이나 동조도 일으키지 못한 채 벌어진 학문적 취향의 변화일 뿐인가?“(pp.23-24) 문학이나 미학의 측면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읽는 것과 사상사의 측면에서 읽는 것들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질문 하나는 그것들의 우리의 일상everyday life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냐는 것이다.

몇 가지만 짚고 가자면 ‘포스트모던’이 모더니즘과는 단절적인 것으로 느껴지곤 한다는 거다. 료타르나 들뢰즈를 읽으면서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아지는데. 그렇다면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단절’되는 무언가인가? 하비는 그 위치에서 보들레르를 들고 온다. “‘모더니티의 한쪽은 찰나적·일시적·우연적 측면이며 다른 한쪽은 영원불변한 측면’“(p.27) – (포스트모던이 사실은 모더니티의 다른 한 측면의 강조는 아닐까?) “모더니티는 그 이전의 모든 역사적 상황과 가차 없는 단절을 뜻할 분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단절행위와 분절화 과정을 그 특성으로 삼는다“(p.29). 즉 포스트모던의 어떤 경향들은 모더니즘과 같을 수도 있다. 하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떨어진 게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1차대전 이전에 등장한 모더니즘은 새로운 생산조건(기계, 공장, 도시화)과 자본순환조건(새로운 교통, 통신체계), 소비조건(대량시장과 광고, 대규모 유행의 등장)에 대한 반작용에 더 가깝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선구자는 아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p.42).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화를 낼 수 있겠지만, 이게 사회과학 분석하는 사람의 정밀한 진단이다. 그런데 정밀한 진단없이 한 동안 ‘문화의 시대’를 겪고나서 맞닥드리는 현실은 바로 이런 거다. ““마땅한 공감이나 진지함을 갖추고서 이면을 들여다보며 본질적 의미들을 가늠해 보기 위해 우리는 이 껍데기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주목해야 할는지?”라는 문제의식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끝없는 분절화나 순간성에만 매달린 나머지,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해버린다(p.86). 많은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상품화나 상업화, 시장에 너무 손쉽게 투항하고 있다는 협의를 떨쳐버리지 못한다(p.87). 이로부터 포스트모던 운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점이 발생한다. 즉 “포스트모던 운동이 일상생활의 문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어떻게 이와 통합되는가”라는 문제이다(p.87). 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생산품이 상품화된다는 생각(그 사실 자체는 아니더라도)에 깊은 거부감을 보였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감하고도 노골적으로 상업화의 길을 가며 대중문화와 손을 잡았다“(p.90). 결과적으로 댄디즘의 상업화만 추동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복잡한 분업, 판촉행사 그리고 마케팅 기획으로 매개되는 생산과 소비의 조직화된 시스템을 통해 문화가 생산되고 심미적 판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본(종종 다국적 자본의) 순환이 전체 시스템을 지배한다“(p.398).
# 유연적 축적과 시공간적 압축
하비는 이러한 세계의 도래를 정치경제적 분석, 즉 역사 유물론의 분석으로 설명한다. 아글리에타의 조절이론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축적체제'(포디즘-> 포스트포디즘)를 통한 설명을 한다. 케인즈의 시대였던 황금 자본주의 시대의 ‘포디즘’ 체제가 복지국가-조합주의국가 등과 맞물려 있다는 정도로 간략하게 줄이자면, 그 이후의 세계는 ‘유연적 축적’의 세계였다. “유연적 축적은 포디즘의 경직성에 정면 대응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노동과정이나 노동시장, 제품, 소비패턴의 유연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혀 새로운 생산부문의 출현, 금융서비스 공급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시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업적 · 기술적 · 조직적 혁신의 엄청난 강화.” 그리고 그 결과는 전지구적인 ‘시공간적 압축’이었다(이 개념은 이제 아무나 전지구화/세계화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없이 쓰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시·공간 압축’이란 개인적 의사결정 및 공공 의사결정에 드는 시간 지평이 축소되는 한편, 위성통신과 운송비용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의사결정이 훨씬 멀리 있는 여러 지역으로 즉시 전파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p.186).

그런데 이러한 유연적 축적의 세계가 온 것은 자본의 ‘위기’가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본 생산양식의 본성 때문에 그렇다. 이에 대한 하비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1)자본주의는 성장중심적이다. 위기는 성장의 결핍. 
2)실질적 가치의 성장은 산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노동통제가 있어야 자본가의 이윤이 보장된다. 
3)자본주의는 언제나 기술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역동적이다.

이러한 위기가 오면 부르주아들은 자본주의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다음 선택지를 취한다고 한다.

1)평가절하: 직접적인 파괴와 함께 진행되기 마련인, 상품 및 생산 용량, 화폐가치의 평가절하. 자본 설비(특히 공장이나 기계)의 가치를 ‘인하’시키거나 ‘말소’시키는 것. 노동도 마찬가지(착취율 제고, 실질소득의 삭감, 실업, 산업제해의 증가, 보건 불량 및 생활기대치의 하락)
2)거시경제적 조절 – e.g. 케인즈주의.
3)과잉축적의 흡수: 1)시간적 이전 – ‘의제자본 창출’. 장기적으로 투자 규모가 확대되고 의제자본 창출 속도도 더욱 빨라져서 계속적인 이전이 가능해야 함. 2)공간적 이전 – 지리적 팽창. 제국주의. 아웃소싱. 초국적 생산 네트워크 3)시·공간적 이전 – 시간적 전략과 공간적 전략의 결합. e.g. 남미에 차관을 빌려 주기.

이러한 상황에서의 대응이 ‘유연적 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1)절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작업시간의 연장), 2)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기술의 개발 등을 통한 노동 강도의 증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여기에서는 투쟁들이 있었지만, <빌리 엘리어트=""> 같은 영화를 떠올려볼 때 얼마나 강경하게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이를 진압했는지는 큰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의 말을 따르자면 ‘쇼크’를 줘서라도 진행했다.</font> </div>

1984년. 영국 광부 노동자들의 투쟁

# 포스트모던의 시대
하비는 포스트모던 사조의 변화를 설명하지만, 그것들은 엄격하게 ‘대중 문화’라는 키워드로 분류되고 ‘산업’과 관련되어 분석된다. 소비영역이 엄청나게 발전하고,똑같은 옷, 똑같은 차, 똑같은 냉장고, 똑같은 TV를 가지고 있던 ‘대량생산 대량소비’와 ‘소품종 대량생산’의 세계가 끝이 난다. 하지만 그것이 ‘다품종 소량생산’은 아니고, 정확하게는 ‘다품종 대량생산’의 시대를 만들어낸다. (규모의 경제가 끝이 나고 ‘범위의 경제’가 이긴다는 것이 하비의 주장인데, 글쎄? 여전히 진입장벽 때문에 거대 생산 자본의 힘은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재화의 소비에서 소비의 소비로의 전환되었다는 하비의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포스트모던한 사고방식과 정서, 행위 방식들이 모두 자본회전방식의 가속화라는 것이 하비의 주장이다. 즉흥성(volatility)과 순간성(ephemerality)이 강조된다. 그리고 통신비용과 통신시간의 감소로 인해 공간적 조정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천안에서 서울역까지의 거리보다 서울역부터 신촌까지의 거리가 더 멀다는 말을 떠올리면 된다. 이러한 경향은 더 확장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73년 초에 절정에 이른 과잉축적의 위기는 바로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시 · 공간 경험들은 변화했고 과학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연계에 대한 확신은 무너졌고, 사회적 · 지적 관심의 주요 초점으로서 미학이 윤리를 압도했으며, 이미지가 서사(narratives)를 지배하고, 일시성과 분열이 영원한 진리와 통일된 정치에 우선하게 되었다. 그리고 설명은 물질적 · 정치경제적 토대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문화적 · 정치적 실천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이동하였다“(p.380). 하비가 독특한 것들은 포스트 모던을 설명함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이론이야 말로 여러가지를 잘 볼 수 있게 해준다고 강변하는 태도에 있다. 예컨대 마샬 버만과도 비슷한 입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역사적 스케치는 이런 종류의 변화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가장 최근에 일어나는 그러한 현상들도 분명히 역사 유물론의 틀 안에 있으며, 심지어 마르크스가 제안했던 자본주의 발달에 대한 메타서사로도 이론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p.380).

# 지금 여기, 투쟁의 조건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에서 발견한 디스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금융투기 및 의제자본의 형성(대부분 실물경제 성장과 무관하다)과 더불어 이와 같은 “카지노 경제의 출현”은 개인적인 부의 증대를 위한 여러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 도시가 카지노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렸으며 수많은 대도시들이 갑작스레 새롭고 강력한 사업을 거느리게 되었다. 사업서비스와 금융서비스 붐의 이면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고 상징자본과 패션, 디자인, 도시생활의 질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완전한 새로운 여피문화(Yuppie culture)”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풍요로움의 반대편에는 무주거 노숙자, 권한 박탈, 빈곤이라는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것들이 많은 중심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타자성(otherness)’은 전후 시기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앙심을 품고서 형성되었다. 뉴욕 무주거 노숙자들의 “잊혀진 목소리”와 “잊을 수 없는 꿈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p.387) 이 부분에서는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이 떠오르기도 한다. “</font>오늘날의 의사결정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인가? 오늘날에는 번민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다“(p.356) (2010/09/25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장인정신과 구체적인 자기 이야기를 찾기 – 리처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2009)</font></font> </div>

하지만 하비는 여전히 담담하면서도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책의 출간 이후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의 작업은 여전히 계속 진행된다.) “고전주의로 되돌리려는 이들도 있고 모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시대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통해 당대의 충만함’을 획득한다고 판단된다. 전적으로 동감이다“(p.414).

여전히 “지금, 하비”의 필요성이 줄어들지 않는 것만 같다. 그건 그가 담론의 세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고, 분석을 계속 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지식이 계속적으로 ‘현장’에서의 마주침(노동자 교육)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공간적 사유’라는 것들을, 기존의 ‘시간 중심적’ 헤게모니로 편성되어 있는 이론들은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비의 다음 책들을 주욱 읽어봐야 겠다.

지주형 선생의 말마따나 이 책은 정말 ‘토털 크리틱’의 요건을 충족하는 것 같다. !

출처: U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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