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인류학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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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인류학자들 – 8점
애덤 쿠퍼 지음, 박자영.박순영 옮김/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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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뻣뻣한 정치학도, 인류학의 세계로 풍덩!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2003</a>
2010/03/0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여성
2010/08/02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16]루스 베네딕트가 본 일본, 그리고 지금
2010/11/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인류학의 이론사 훑어보기 –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앨런 바너드 </td> </tr>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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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에 대한 내 오해. 인류학을 배우기 전에는 인류학이 문화를 연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문화연구를 배우기 전에는 문화연구가 예술을 다루는 사회학인 줄 알았다. 그래서 위에 언급했던 독후감처럼 ‘인류학의 세계로 풍덩!’ 하면 마치 문화를 아는 것처럼 생각했던게 겨우 1년 반 전의 내 모습이다.

지금은 문화연구와 인류학의 지도를 조금 그릴 수 있게 되었고, 문화연구와 예술사회학이 어떤 부분에서 만나고 어떤 부분에서 만날 수 없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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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쿠퍼의 <인류학과 인류학자들="">은 영국의 사회인류학을 다룬다. 위에 언급한대로 ‘문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영국의 인류학은 대체로는 뒤르켐적인 관심이 있고, 이는 어떻게 사회가 조직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문화인류학이(요즘은 아니지만) 대체로 종교나 상징, 가치체계 등을 다룰 때 사회인류학은 출계(어떤 방식으로 혈족과 친족이 구성되는지)/결연, 노동분업, 정치 등에 관심을 가진다. 주제는 딱딱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그의 ‘가십’을 다뤄내는 말투는 요즘 말로 ‘쩐다.’</font> </div>

‘참여관찰’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말리노프스키의 관찰하는 것에 대한 묘사를 보자. “6시에 일어났다(5시 30분에 깨서). 별로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을을 순회했다. 토마카푸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신성한 작은 숲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진창이다. (……) 물이 나를 유혹했다.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왜일까? 나에게는 에너지와 앞장서는 정신이 부족하다.“(p.48)

그리고 확고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래드클리프-브라운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는 대학의 보수적인 생활과 쉽게 조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극적인 사람이었다. 종종 황당한 성명들을 내놓았고 모든 주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p.99)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사회학적 면모’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잘 묘사해준다. 그리고 래드클리프-브라운이 버지니아 울프, 케인즈 등과 어울려 놀았다던 블룸즈버리 클럽을 나도 만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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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초창기의 영국 인류학과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말리노프스키의 ‘기능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연구를 했던 런던 정경대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분위기와, ‘구조주의’가 지배했을 래드 클리프 브라운의 옥스포드 대학의 분위기, 그리고 ‘갈등이론’을 가지고 한참 충성경쟁을 했던 막스 글뤽만의 맨체스터 대학 등의 모습이 떠오른다. 각자는 서로 연구하는 ‘현장’도 달랐고, 입지들도 달랐다고 한다. 그에 따라 이론적인 포지션도 달라졌다고 하고. 대체로 말리노프스키 시절에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지배했다면, 그 이후의 래드 클리프 헤게모니 시절에는 ‘과학주의/사회학주의’가 지배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리노프스키의 초창기 ‘참여관찰’ 세미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들어왔다. 어떻게 외국어를 속성으로 마스터하고 원주민들과 ‘말’을 ‘섞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노인네의 해법을 듣고 싶다.

쉽게 이야기해서 기능주의의 해설방식은 “사람이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을 거고. 밥을 먹으려다보니 누군가에게 밥을 달라고 해야하고 그러다 보니 언어가 생기고.” 이런 식이다. 문제는 통합적인 ‘구조’를 그릴 수 있는 방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구조주의적 방식은 사회의 큰 구조가 있고, 그것들을 반영하는 기제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마을에는 친족의 구조가 있고, 모계/부계에 따라서 호칭을 부르는 기제들이 다르고 상속의 기제가 다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안의 인가들이 어떠한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약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론적 쟁점들은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맞물리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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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류학의 이론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서 전혀 달리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권하는 독자는 인류학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는 하고 있는 사람 정도가 될 것 같다. 아닐 경우 이 책의 ‘유머’가 하나도 안 웃기는 시점이 온다. -_-;

인류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책에서 좀 더 중요하게 쟁점이 될 만한 부분은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이나, 2세대 사회인류학자들(리치나 니덤, 매리 더글라스, 빅터 터너)에 대한 이론적 논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첨예한 부분들은 책의 1)’식민주의’와 영국 사회인류학의 관계 2)마지막 장에서의 포스트모던 인류학에 대한 언급들일 것 같다.

쿠퍼는 실제로 인류학자들이 대영제국의 식민지 경영 시대에 있어서 찬밥신세였고, 소극적인 역할만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인류학자들을 방어하는 입장에 선다. 하지만 사실 식민지 경영의 ‘테크닉’을 인류학이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비판의 칼이 간 것들은 아니었고, 문제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스피박 등이 제기하는 다른 쟁점들 ‘타자 재현’의 문제와, 푸코의 ‘담론’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이 부분은 흥미 진진해 보인다. 다른 한 편 ‘성찰적 인류학’에 대해 쿠퍼는 일단 열린 입장인데 이에 대해서 만약 진화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본다면 어떤 식으로 전선이 벌어질 지를 따져보는 것도 퍽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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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론의 ‘지형’을 파악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고 다시 ‘각론’에 들어가서 인류학의 훌륭한 저작들을 살펴볼 차례다. 물론 ‘번역’ 때문에 원서를 몇 권 잡을지가 긴장이 되긴 한다. 빨리 헤어나와 내 분석의 도구를 찾아야 할 텐데….

애덤 쿠퍼Adam Ku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