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람시, 문화, 인류학 – 케이트 크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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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 문화 인류학 – 8점
케이트 크리언 지음, 김우영 옮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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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그람시를 읽다가 발견한 인민노련 – 김현우, 안토니오 그람시
2010/11/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인류학의 이론사 훑어보기 –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앨런 바너드
2010/12/0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영국의 인류학이 궁금하다면?
괜찮은 리뷰(라티오 출판사의 번역)

# 맨체스터 학파, 마르크스주의</span></div>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의 사회인류학과(영국에서는 대체로 ‘문화인류학’보다는 ‘사회인류학’이라고 더 강조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2010/12/0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영국의 인류학이 궁금하다면? 참조)은 1949년에 막스 글럭먼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학과가 좀 골때리는 집단이다. 앨런 바너드드의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에 나온 이야기를 빌려보자면 다음과 같다.</font> </div>

맨체스터 학파는 주로 옥스포드에서 수학한 후 맨체스터 대학과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의 리빙스턴에 있는 로즈-리빙스턴 연구소(Rhodes-Livingston Institute)를 거친 긴밀한 관계의 학자들로 구성된다.“(바너드, p.159) “글럭먼의 강력한 지도력은 제자들을 맨체스터 인류학이 지향하는 목표에 지적으로 얽어매어 획일적 동의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그의 갈등이론을 무색케 했다. (……) 그런 분위기는 글럭먼의 사망(1975년)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그의 제자들은 외래 발표자의 생각이 맘에 들지 않으면 휴지통을 걷어차곤 했다고 알려져 있다.“(p.161). “맨체스터 학파는 중앙아프리카에 초점을 둔다는 공통점, 기본적인 이론적 가정, 그리고 제도적 일체감(최소한 초창기에는)으로 단합하여, 꼭 필요한 시기에 영국 인류학에 도전장을 던졌다. 글럭먼이 비록 기능주의의 신조를 거부했지만 여전히 기능주의 틀 속에 머무른 반면에, 터너는 상징적 측면들 사이의 체계적 관계에 대한 구조주의적 관심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파 내에는 마르크스주의도 존재했는데, 이는 글럭먼이나 몇몇이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pp.162-163)

애덤 쿠퍼의 이야기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들은 “여기 우리 모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야”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주된 관심 지역은 계속 중앙아프리카였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 지역에서 연구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쿠퍼, p.257)

그런데 왜 자꾸 맨체스터 학파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건 지금 이야기할 <그람시, 문화, 인류학>의 저자 케이트 크리언도 맨체스터 사회인류학과에서 인류학 박사를 취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86년에 취득한 그녀의 연구 현장도 ‘중앙아프리카’의 ‘잠비아’였다. 전통은 어디 못 가나보다. 그리고 대체로 ‘갈등주의’적 관점을 취하는 맨체스터 학파의 학풍과, ‘권력’과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있는 그람시를 데려오는 크리언은 일관성 있는 한 학파로 보인다.

# 케이트 크리언?
<그람시, 문화, 인류학>은 케이트 크리언의 출세작이다. 그녀의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하면 섹시한 색깔의 그녀의 <Gramsci, Culture and Anthropology> 영어판 표지가 나온다.


현제 케이트 크리언은 뉴욕시립대학의 인류학 프로그램에 소속되어 있다. 이 학과는 데이비드 하비가 재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굉장한 포스가 느껴졌다. 특히 그녀의 사진을 보면 그런 생각을 더 굳힐 수도 있다.

# 인류학에서의 그람시 그리고 문화
책의 논점은 간단하다. 1)인류학에서의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평가, 2)레이먼드 윌리엄스를 통해 매개된 그람시를 받아들이는 인류학에서의 논의에 대한 평가, 3)인류학에서 어떻게 그람시를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제기. 책은 인류학자들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문화’라는 관념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런데 이 추적이 너무 ‘집요’해서 좀 넌덜머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꼼꼼함이 동시에 이 책의 장점일 것이다.) 그 암묵적인 문화에 대한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는 어떤 의미에서 체계라는 가정이다. 그 체계가 반드시 동질적이고 조화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유형화된 총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각각의 ‘문화’는 분리될 수 있으며 경계가 뚜렷한 존재라는 가정이다. 셋째, 인류학을 하나의 분과로 태동하게 해준 비서구 사회들(오늘날의 용어로는 남부 사회들)의 특징은 ‘전통’과 ‘근대성’의 근본적인 대립이라는 것이다“(p.62). 이러한 가정들은 비단 ‘보수적’인 인류학자들 뿐만 아니라, 인류학 내부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학자들도 다 전제하고 있다고 크리언은 이야기한다. (사실 나한테는 이 것도 새로운 이야기다. @.@) 그리고 그것들을 샅샅히 해체한다.

크리언이 그람시를 들고 오는 것은 그람시가 위에 언급한 캐캐묵은 가정들을 다 박살 내 버리기 때문이다. “첫째, 그람시가 보는 하위주체의 문화적 세계는 전혀 체계적이지 않다. 농민들 틈에서 자란 이 사르데냐인은 문화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축적된 탓에 통합성을 갖추지 못한 잡동사니라고 본다. 그는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당대의 민속학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 그람시에게 연구의 일차적 목표는 특수한 ‘문화들’이 아니라 언제나 권력이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안정적이고 뚜렷한 경계를 지닌 문화적 총체가 아니라, 권력관계 및 그것이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사회적 실체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 셋째, 그람시는 사회의 기본적인 대립이 전통과 근대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는데, 이는 권력관계에 초점을 둔 결과이다. (……) 계급 개념을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이해한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실체는 어디까지나 계급인 것이다“(pp.100-101).
그런데 문제는 그람시를 바라보는 인류학자들이 허당이라는 것이다. 그 ‘허당’ 그람시는 샅샅이 뒤져보니까 레이먼드 윌리엄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윌리엄스의 저술은 그람시를 헤게모니 이론가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며, 둘째로 윌리엄스가 제시하는 헤게모니는 권력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탐구인 그람시 본연의 헤게모니를 피상적이고 빈약한 개념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이다(p.230).
문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특정 지역에서 특수한 집단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설명과, 담론의 장 외부에 존재하는 냉엄한 실체들(결코 담론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담론의 틀 안에서 거론될 수밖에 없는)을 포함하는 변화무쌍한 권력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p.234).
인류학계에 알려진 그람시는 옥중수고에 나타나는 권력의 물질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박탈당한 극히 부분적인 그람시다“(p.235).
즉 그람시를 허술하게 읽지 말고, ‘잘’ 읽어서 다시금 인류학을 재구성해야한다는 것이 크리언의 주장이 된다.
# 현장연구에서의 그람시의 가능성
크리언의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크리언이 제기하는 그람시적인 관점으로 어떻게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있는지를 제기하는 부분이다. 로저 키징과 매튜 굿맨의 연구가 그 범례로 나타나는데, 키징의 경우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개념적인 난점을 가지고 있지만, 현장 연구에 있어서는 그람시적 접근을 잘했다고 크리언은 평가한다.
좀 더 흥미로운 연구는 매튜 굿맨의 연구다. 기존의 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전제를 수용하자면, 문화는 ‘전통’과 ‘근대성’의 대립 구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굿맨은 멕시코의 ‘마초’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러한 관점 자체가 전통적인 멕시코의 ‘마초’에서 전승된 것이 아니라, 근대에 와서 식민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만들어졌음을 포착한다. “굿맨은 아메리코 파레데스가 1967년에 쓴 논문에 의거해, 죽을 때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마초의 개념이 제법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근대 대중매체, 곧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멕시코 라디오와 영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마초라는 말이 현재의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로마누시-로스의 ‘마을 속담’은 사실상 그녀가 현지조사를 수행했던 시점을 기준으로 불과 수십 년 전에 생겼을 것이다. (……) 지금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마초기질은 먼 과거로부터 전승된 것이 아니라, 근대 멕시코 역사의 산물로 봐야 한다“(p.265).
한국의 사례로 와보자. 사실 ‘단군’에 대해서 1000년 동안 말을 안 하다가, ‘대한제국’의 전통을 위해 소환되었던 것 아닌가. 그래놓고 우리는 ‘홍익인간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굿맨은 이러한 상황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경합’을 통해서 분석한다. 어떤 관념이 ‘헤게모니적’으로 재편되는가는 구체적인 ‘국면’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람시적인 방법이 인류학이 가지고 있었던 캐캐묵은 가정들을 뛰어넘어 ‘혁신적’ 프로그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들은 인류학에서의 그람시에 대한 ‘허당’ 이미지를 벗어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질문들
<그람시, 문화, 인류학> 책은 굉장히 재미있는데,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건 크리언이 설정하는 ‘계급’에 대한 개념 자체가 좀 협소하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그람시가 ‘계급’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좀 와전되서 들릴 수 있어서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에게나 그람시에게나 역사의 궁극적인 주역들은 “사회, 전통, 공동체, 정체성”이 아니라 계급이며, 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의 궁극적인 주인공도 언제나 계급이다. (……) 석연치 않은 점은 누구 또는 무엇이 그 전쟁의 궁극적인 주역인 계급을 대체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 전통, 공동체, 정체성인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p.95).
계급이 뭘 ‘대체’되네 마네 하는 관념 자체가 내가 볼 때는 문제다. 사실 계급은 ‘연동’되어서 함께 나타나는 것 아닌가? ‘계급 투쟁’의 프레임에서 계급이 가장 중요한 것들은 맞는데 구체적 상황에서 계급은 반드시 어떠한 ‘매개’와 맞물려서 작동한다. 예컨대 인종과 젠더 등이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이 역설적으로 중요해지는데 ‘대체’라는 틀로는 이상한 방향의 이야기가 될 수 잇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언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그람시에 대한 통찰력을, 인류학과의 연동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여전히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인류학과 접목시키고 여성주의와 접목시키려는 시도도 멋져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지 이제 8년이 되었는데, 지금 크리언의 이야기가 어떤 것들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녀의 ‘현장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분석되어 나오는지가 궁금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람시나 크리언이나 모두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분석’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탈리아 사회와 이탈리아의 역사를 분석할 때 그람시의 주된 관심은 갖가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존재하는 경험적 실체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었지, 복잡한 현실을 미리 정해놓은 엄격한 이론적 도식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 그가 관심을 쏟지 않았던 것은 실제 역사의 구체적 실체에서 유리된 이론이었다.“(p.48) 이러한 주장은 비단 크리언 본인에게만 제기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사회’에 대해 말하는 이론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회에 대해 말하는 ‘철학’들이 자꾸 자신들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방식으로 뛰어나가는데, 그럴 경우에는 자신들의 역할을 ‘아이디어’라고 한정시키고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꾸 자신들이 뭘 ‘보고’ 있는 척들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게 요즘의 내 생각이다. 뭐 특별히 걱정하지는 않는다. 금방 죽을 테니까. 어쨌거나. 난 마르크스/뒤르켐/그람시/폴라니/푸코의 선으로 돌아다니겠다.
또 하나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것은 사회학과 인류학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런 거다. “온갖 제도적 장식을 동반하면서 사회학과 인류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탄생시킨 지적 분업을 통해, 사회학은 근대성의 이해를 담당하게 되었고 인류학은 그 근대성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를 해명하는 몫을 떠맡았다. 원래 이 과제는 공간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된 역사를 가진 사회들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사회들을 포함했다. 다시 말해 인류학자들의 소임은 울프의 1982년 저서 제목이 표현하듯이 ‘역사 없는 사람들’이라고 간주되던 존재를 연구하는 것이다“(p.88). 인류학자들은 모두 ‘원주민’들이나 만나고, 사회학자들은 ‘근대’적 공간에서 댄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알고보면 인류학과 사회학은 합쳐질 뻔도 했었고,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이론 공유는 이미 200년째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폴라니와 경제인류학,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Kate Crehan 케이트 크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