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 – 모두스 비벤디(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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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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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1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헨드릭스의 이론 공부 #1]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
2010/09/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5] 꼭 이런 좋은 책은 안 팔리고..
2010/09/05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4] 신자유주의가 궁금하다구요? 그럴 때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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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8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신자유주의 군대와 자기계발의 기획
2010/08/1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좌파 이론의 쓸모에 대해서 – 며칠간의 노-홍-한-레의 논쟁을 보고.
2009/12/09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어떤 빅 브라더를 고르라는 지의 야바위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 지그문트 바우만

위키피디아(영문판) – Zygmunt Bauman
새물결에서 나온 ‘What’s Up’ 시리즈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때가 있다. 친구 J가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집을 때 옆에서 식겁했었다. 그 당시 내가 읽던 책들은 모조리 소설책이었으니까. 뭔가 트렌디해보이면서도 어려워보이는 이 책들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니 처음 수업에서 읽으라고 한 책이 바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였다. “망했다”라고 복창하고 읽기시작했다. 물론 그 책은 어려웠다. 대충 발췌독 못하는 독서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절매면서 헤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는’ 다 읽었으나 이해는 어느 정도 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수업의 쪽글 논평은 대충 얼버무렸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왜 그리 어렵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변별하는 능력이 없었다. 매번 개드립을 쳤다. “원래 자본주의가 그런거다!” </div>
그런데 그 와중 읽었던 ‘What’s Up’ 시리즈 중 다른 책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된="" 삶들="">이었다. 한 눈에 책의 얼개가 들어왔고 쉽게 읽혔다. 도저히 85살 먹은 노인네가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 같았다. 흡사 에릭 홉스봄을 능가하는 필력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는 바우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div>
바우만은 대학을 은퇴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갑자기 스타가 되기 시작했단다.
# 근대, 탈근대, 액체근대
나 역시 ‘포스트모던’의 세례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 ‘탈근대’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런데 탈근대라는 말을 ‘신자유주의’와 붙여놓고 생각해보면 앞 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거였다. 자본의 전일적인 통제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료타르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니…. 요 근래 읽었던 데이비드 하비가 좋았던 이유는 순전히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정치경제학적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효과에 대한 ‘신비화’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div>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이라고 말하는 맥락과 하비도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명들은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에 대해 자꾸만 여전히 ‘신비화’ 시키는 경향들이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우만의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라는 명명은 굉장히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왜 ‘액체’인가에 대한 설명도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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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근대성이 ‘견고한'[고형적]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형태들(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들과 같은)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여건으로 변해 버렸다(p.7).

둘째,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부터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권력과 정치가 한 쌍이 되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국민국가라는 한 가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제 이들은 별거 상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 이처럼 파편화된 삶은 ‘종적인’ 사고방식vertical orientation보다는 ‘횡적인’ 사고방식lateral orientation을 조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기회와 상이한 확률분포에 반응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산을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

다섯째, 끊임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 개인의 이해관계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되는 덕목은 규칙(여하튼 극히 드물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에 순응하는[동조하는] 태도conformity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flexibility이다(pp.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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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의들은 리처드 세넷이 <뉴캐피털리즘>에서 말했던 자신에 대해 안정적인 기획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묘사하는 것과,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벌거벗겨진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만든다. 우리가 불안 한 것은 우리가 ‘안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지반들이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공고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모든 ‘굳어 있는 것들’은 녹아버린다. </div>
아, 그리고 ‘모두스 비벤디’. 이건 국제 정치학에서는 장기적 협정 이전의 간이 협정을 말한다. 다른 맥락에서는 ‘잠정적인 계약/양식’ 정도를 칭하는 말이라 말할 수 있다. 아직 유동적이고 정해지지 않은 상황의 근대를 떠올려 볼 수도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차후의 안정적인 세계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탈근대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
#불안과 공포
모든 것이 녹아버린 이 상황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불안하게 만들고 공포에 빠지도록 만든다. 거기에 ‘유동’이라는 액체성을 넣으면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이 된다. 모든 불안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걸맞는 대응을 할 수가 없다. 정확히는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노조에 의해 지지되던 정규직이 분해되고 있고, 포드주의/사민주의/복지국가에 의해서 유지되던 중산층이 분해되었다. 계급은 양극화되고 있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해고’의 공포에 시달리고, 그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며, 해고당한 자들은 ‘재취업’이 되지 않아 불안하다. 대학생들은 취직이 안 될까봐 불안하다. 만성화된 ‘불안’의 향연이고 이는 공포로 바로 향한다. “공포를 부화시키고 키우는 것은 바로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과 불확실성은 무력감에서 탄생한다“(p.45).
이러한 상황에서 공포는 공포를 만들어낸 근원과 무관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불투명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세어 본 적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무수한 위험에 우리들 자신(혹은 가장 가깝거나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될 위험을 계산해서 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암의 일곱 가지 증세’, ‘우울증의 다섯 가지 증상’을 찾아내거나 고혈압,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스트레스, 비만 등의 원인을 없애는 데 몰두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배출구가 없어 남아도는 실존적인 공포를 덜어 줄 대리 표적을 찾고자 한다“(p.23). 스트레스가 만병의 질병이라고 말하면서 약을 먹고, 담배를 끊자고 말하고, 암검진을 받자고 말한다. 자본은 우리의 그러한 불안들을 ‘의료 시장’을 통해 해결하라고 말한다. 세상엔 온통 약장사와 클리닉, 그리고 그 사이의 거간꾼인 민간 보험회사가 개입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서구에서는 ‘관리’되었던 기억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포드주의/사민주의/복지국가는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한국은 그러한 국가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바우만의 푸념이 조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바우만의 관점에서 보자면 장하준 같은 이들의 주장은 크게 보아서 성립될 수 없다. 쉽게 설명하자면 권력은 전지구적으로 집행되고, 그에 대응하는 정치는 지역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를 추동하는 힘[세력]globalizing forces의 압력에 밀려 강제로 개방된 사회로부터 흘러나온 권력과 정치는, 계속해서 서로 멀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리고 십중팔구 현 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올 엄청난 과제는) 권력과 정치를 다시 하나로 묶는 일이다. 헤어진 이 두 동반자를 국민국가라는 가정 안에서 재결합시키는 일은 아마 그런 도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대응책 중 가장 성공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p.44). “불의가 만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은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을 불가피하게 왜곡시킬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미래는 전지구적 차원에서만 확보될 수 있다“(p.45).
#난민과 이주민 – 호모 사케르
책을 산뜻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점차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석훈의 ‘공포 경제 시리즈'(<아픈 아이들의="" 세대="">, <음식 국부론=""> 등)을 읽으면서 느꼈던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다. 이건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문제이고 도망칠 구멍이 없어보이며, 그 외상이 훨씬 더 치명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장의 <이동 중인="" 인류="">와 3장인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공포 관리>를 읽다보면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이거야 말로 정말 ‘공포’다! 우리는 ‘잉여’라는 말을 최근 들어 손쉽게 쓰지만, ‘잉여 인간’이라는 말의 원조인 바우만의 ‘잉여 인간/인간 쓰레기’에 대한 설명은 오싹하다. </div>
마르크스의 ‘산업예비군’에 대한 설명처럼 ‘잉여 인간’들은 그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하지만 액체 근대의 시대에 더욱더 적나라해진 것은 그들이 ‘임시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항구화되는 것이 액체 근대의 양상이다. “이런 이중적인 과정-인간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한 과거의 외부 배출구들이 차단된 것과 새로운 배출구가 공급되지 않는 것-의 결과로, ‘과거에 이미 근대화를 이루어 놓은 국가들’이나 이제 새롭게 근대화되기 시작한 국가들 모두가 배제적인[배타적인] 관행의 칼날을 점점 더 내부로 돌리고 있다“(p.54). 제 1세계에서는 제 3세계로 그들을 배출해 왔지만, 제 3세계의 잉여인간은 이제 갈 곳이 없다. 장기매매나 인신매매, 그보다 더 나쁠 경우도 있다. “과거에 쓰레기를 만들어 내던 자들은 자신들이 지역적으로 만들어 낸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하고 찾아냈다. 반면에 ‘후발’ 주자들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를 지역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더구나 해결책일고 해도 기껏해야 미비할 뿐이며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p.58). 그 전형적인 사례가 난민과 이주민이다.
터키는 미국이 이라크를 2003년 침공하자 국경을 봉쇄했다. 그건 전황이 터키로 전개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이라크의 난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난민에 대한 ‘인도적 조치’는 점차 이상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난민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국적이 없다는 말은 새로운 의미이다. 국적을 잃은 그들의 상태는 국적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던 국가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거나 단지 유령처럼 존재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 그들은 법의 바깥에 있다. (……)그들은 표류가 일시적일지, 영원할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비록 그들이 어떤 곳에 잠시 머문다 해도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지가 (도착할 곳이든 되돌아가야 할 곳이든) 영원히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그들이 ‘종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장소는 영원히 접근 불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이다“(pp.65-66). 그리고 이러한 난민들은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 푸코와 아감벤이 잘 썼던 말로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의 작용 때문이다. 그들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빼앗긴다. “미래가 없는 공허한 날들이 계속되는 수용소 담장 안에서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신은 인류 전권대사들 ㅡ 임명되었거나 스스로 일을 자청한 이들의 임무는, 난민을 수용소 안에 가두어 놓고 지옥으로부터 떨어트려 놓는 것이다 ㅡ 을 통해 생명 유지 장치가 제거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p.67). 맘대로 죽을 권리는 ‘국민들’의 것이다.
이와 덩달아 제1세계로 이주한 사람들도 이러한 취급을 받는다. “명백한 ‘경제적 이주자들’은, 유권자들에게는 ‘노동 유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선전하면서, 실직한 자국민에게 ‘자전거라도 타고’ 노동을 팔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권고하는 바로 그 정부들의 공공연한 규탄의 대상이 된다“(p.72).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은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것 같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주장했던 것과 연속 선상에서 광인의 배제를 통한 근대인의 창출이 있었다면, 이제는 난민과 이주민의 배제를 통한 ‘액체근대인’의 출현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진정한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 또는 진정한 공동체-되기를-희망하며 모인 사람들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 상상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상상의 노동labours of imagination에 대한 신뢰성을 구축한다“(p.78). </div>
그리고 왜 사람들이 자기계발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지도 명료하게 설명한다. 푸코식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경쟁이 연대를 대신하면, 개인들은 자신만이 가진 ㅡ 가련할 정도로 빈약하고 불충분한 ㅡ자원에 탐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집단적인 유대의 붕괴와 해체는 그들을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법률상의 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꾸려 나가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사실상의 개인 모델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다“(p.111). 세넷과 비슷한 논리인데, 우리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의 의지’를 작동시키지만 그 순간마다 ‘현실’이 도와주질 않는다. 문제는 지금 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놓았다는 사실이다.
#공포 사회학으로 끝나나? – 희망 찾기
그렇다고 바우만이 ‘비관론’으로 글을 맺지는 않는다. 4장 <생활 공간의="" 분리="">는 처음 부분에서 문지기 공동체gated community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도시 공간이 양극화되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들을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에서 비교적으로 자유로운 상층 계급에게 단순히 공간성이 소멸하고 있다는 지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시는 매일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그 투쟁의 장의 성격 때문에 다른 방법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우만은 전망한다. </div>
마누엘 카스텔스 등은 이렇게 말한다. “‘상류층’ 사람들은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아니 그보다는 떠돌고 표류하기 대문에) 거주지에 대해서는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홀로 남겨져 존재하며, 매우 자유로워서 자기만의 소일거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고, 일상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서비스는 언제든지 보장되어 있으므로, 자신들의 거처가 위치한 도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p.122). “‘상류층’과 가장 확연히 대조적인 하류층의 특징은, 상류층 사람들이 연결되어 그 삶이 조율되는 전 세계적 의사소통 네트워크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데 있다. 하류층의 도시 주민은 ‘지역에 머물 운명이다.’ 그러므로 ‘지역적인 일’에 대한 불만과 꿈, 희망에다 관심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p.123). 하지만 바우만은 이렇게 비판한다. “도시 생활의 현실은 그런 산뜻한 구분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경계를 긋는 일을 놓고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처에서 수많은 전선이 형성되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선을 긋는 일은, 언제나 선을 다시 긋고 지워야 할 위험을 무릅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일이다“(p.129). “간단히 말하면, 도시는 전지구적으로 잉태되고 부화된 문제들이 쌓인 야적장이 되었다. 도시의 주민과 선출된 그들의 대표들은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도 해결할 수 없는 과제, 즉 전지구적으로 잉태된 괴롭고 곤혹스러운 문제에 대해 지역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p.135). 쉽게 설명하자면 이제 매일 매일의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구체적 공간에서의 대응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은 한국 상황에서도 유용해 보인다. 바로 그건 이주민들과 어떻게 지낼까의 문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우만의 ‘이질 공포증‘과 ‘이질 애착증‘의 개념은 굉장히 유용해 보인다. “이질 공포증과 이질 애착증은 모든 도시에 공존하지만 도시 주민들 각자의 내면에도 공존한다. 분명히 이는, 비록 유동하는 근대의 양면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불편한 공존이다“(p.144). “이방인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서로 함께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래가 도시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면서 다양한 자극과 기회로부터 혜택을 얻어 내는 기술은, 도시 주민이 배우거나 활용할 필요가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p.145). 그리고 이러한 ‘이질 애착증’에 대한 설명은 지금 액체 근대의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를 다시 상상하고 ‘정치’를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거리를 준다. 계속 불안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상의 적’으로 불리는 이주민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공포들을 넘어서 그들과 ‘섞일 수 있음’이 주는 정치적인 힘등이 조만간 중요한 의제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동일성’ 속으로 숨는다고 해서, 그것을 유발한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완화제들처럼, 그렇게 숨는 것은 기껏해야 그런 위험이 미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두려운 일부 영향을 막아 주는 피난처만을 약속해 줄 뿐이다“(p.141). 사실 이러한 쟁점들은 사스키아 사센이 만들어낸 ‘글로벌 도시Global City’의 기획들과 맞물린다. 어쨌거나. 이걸 쉽게 풀어 말해주는 게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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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의 책들이 ‘지젝’보다 더 좋은 이유는. 지금 우리의 구체적인 모습들과 결부되어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점이다. 가장 근접한 곳에서 싸울 수 있기 위한 질료들이 나온다는 것. 즉 ‘적용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구체적 범주에서 작동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의 강점. 그게 바로 바우만의 강점이다. 
당장 글로벌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를 한 큐에 보내겠다는 소수 좌파들의 입론과 다르다는 점, 그게 내게는 바우만이 매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섞이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이질 애착증), 마지막으로 쉽게 누구나 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차분히 읽으면 잘 이해되는 문투로 쓴다는 점이 매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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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피는 게 간지나는 Zygmunt Bauman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