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 찾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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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8 vAlign=top width=40 align=left>감독 </TD>
<TD height=18 vAlign=top align=left>장유정 (2010 / 한국) </TD>

<TD height=36 vAlign=top width=40 align=left>출연 </TD>
<TD height=36 vAlign=top align=left>임수정,공유 </TD>

<TD vAlign=top colSpan=2 align=left><A style="PADDING-BOTTOM: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5px; FONT-FAMILY: 돋움,dotum,verdana; BACKGROUND: url(http://deco.daum-img.net/contents/info/ic_more.gif) no-repeat 100% 3px; COLOR: #999999 !important; FONT-SIZE: 11px; TEXT-DECORATION: underline; PADDING-TOP: 0px" href="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56507" target=_blank>상세보기</A> </TD> </TABLE></TD>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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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다보면 마지막 종착지에 근접했을 때 쯤에 오는 어떠한 설레임이 있다. 그 설레임은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약간의 허탈한 마음으로 변하곤 하는데. 그게 두려워 마지막 종착지를 회피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마음일까? 김밥을 한 줄 사서 먹는데, 마지막 한 쪽을 먹으면 그전까지 맛있었던 느낌이 사라질까봐 먹지 않는다면? 짝사랑을 하면서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다가 그(녀)가 막상 마음을 받아줄 것 같자 회피하려는 그 마음은?

그래놓고 거기에 ‘운명’이라는 말까지 씌워놓는다면? 어차피 되지 않을 운명이었으니까 마지막에 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보고 마치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나올 것 같은 지긋지긋함을 맛 보게 될까봐 두려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할리퀸병’ 혹은 ‘순정소설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굉장한 나르시즘이 포함되어 있다. 연애하는 나는, 사랑하는(받는) 나는 플라톤의 아이디얼한 그 세계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가보지 않는 것이다. ‘할리퀸병’ 혹은 ‘순정소설병’에 빠진 그러한 존재들은 자신은 늘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정한다. 다만 가지 않았을 뿐이다. </DIV>

<DIV id=aeaoofnhgocdbnbeljkmbjdmhbcokfdb-mousedown>하지만 발을 지긋지긋한 중생에 딛고 사는 이상 그러한 ‘진정한 사랑’은 늘 불가능한 대타자에 불과하다. 라깡의 말마따나 어느 순간에 ‘출몰’하여 그것들을 드러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일상의 모든 국면에서 실천되는 것은 늘 불가능하다. 많은 경우 ‘진정한 사랑’의 판타지를 그린다. 하지만 현실은 늘 미끄러진다. 그 결핍 만큼이 ‘욕망’이라는 라깡의 표현은 적절하다.</DIV>

그럼 도대체 왜 ‘연애’를, ‘사랑’을 할까. 이제 그 지점을 라깡은 설명하지 못한다. 단순한 ‘진정한 사랑’의 판타지 때문이라면 너무나 빈약한 설명이다. 또한 나르시즘으로 해석하기에 현대의 영리한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은 계산 속이 너무 빠르다. 아니면 아감벤이나 아즈마 히로키의 말을 따르자면 ‘동물화’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감정 노동을 하는 중일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은 팬질에 주는 것이 더 유익하며, 현실의 인간과 맺는 관계에서는 그냥 섹스와 ‘사랑’ 퍼포먼스만 하면 되는 것이다. 015B의 노래 <아주 오래된="" 연인들="">에 나오는 것처럼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일순간의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성과가 경제성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다. 정이현의 소설에 나오는 ‘나쁜 년’들은 적나라한 시대의 반영일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의 ‘몰락’을 원하지 않는다. </DIV>

이러한 설명들은 ‘사랑의 불가능성’이라는 우울한 결론들만을 예정한다. 그런데 과연 이 시대에 ‘사랑’은 소멸되어버린 어떤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대타자’ 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생식을 위한 ‘알리바이’도 아닌 것 같다. 결국 여기에서는 절충적이고 어쩌면 너무나 급진적이지 않은 결론을 내 놓을 수밖에 없다. ‘상호과정’을 통해 ‘친밀감’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말이다. 살을 부대끼고 마음을 부대끼며 그 과정에서 육체적 상흔과 정신적 상흔을 교환하면서도 내일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담보를 줄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이제 정말 사랑 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우정’은 이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부르디외의 말로 계산 가능한 어떤 것이 되었고, ‘가족애’는 어느 새 계급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비즈니스가 되었다. 어떠한 결계에도 잡히지 않는 사랑을 하는 파멸적 존재들은 그래서 누구에게도 불안하다. 그것이 동성/이성/양성애 어떤 것이든 관계없다. 누구나 견적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짓을 하는 그(녀)는 늘 불안하다. 계산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불안한 존재들의 그 불안한 행위는 세계의 일관성에 위협을 준다.

<김종욱 찾기="">는 그 ‘불안한 행위’의 결을 잠시나마 드러내준다. 그녀의 ‘할리퀸병’ 혹은 ‘순정소설병’이라는 나르시즘의 병증이 몰락하는 순간 그들은 ‘사랑’으로 가는 도정으로 안내되었다. 그 도정이 언제 어디서 끝날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진정한 사랑’의 바깥의 사랑을 알았기에 아마 그들은 그 길의 끝에서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 </DIV>

영화의 마지막쯤의 말처럼. “안녕, 안녕, 안녕”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로 마감하게 되는 ‘불가능한 사랑’의 끝을 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