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로-식별되는-남자men-identified-men로 여성주의 말하기

# 들어가기 전에
요 며칠 전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대학사회에서 으레 벌어지고 있는 그러한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교수 혹은 남자-강사의 권력을 가지고 ‘여성’으로 표식되는 존재들에 대해 ‘성희롱’ 발언을 하고, 동시에 ‘연애’와 ‘기집질’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마지막 순간 자신의 찌질함이 드러날 때에 ‘권력’의 두 가지 작용으로 뒷막음하기. 한 쪽에서는 물질적, 혹은 다른 차원의 ‘보상’을 제공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력’을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불법적’ 혹은 ‘성차별적’ 행위를 무마하려는 태도들. 그것은 사실 놀랍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나마’ 젠더 문제와 성폭력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그것들에 대해 예민하게 화를 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만, 다른 공간의 경우를 살펴보면 많은 급진주의-여성주의자들의 발언처럼 한국은 여전히 ‘성폭력 공화국’이다.
여전히 “한 번 줄 래?”의 시선으로 여성을 소환하고 있는 진상들은 지천에 깔려있고, 거기에 대한 불편함의 노출이 여성의 ‘몸값 협상’이라고 판단하고 “비싸게 구네, 그럼 이 정도면?’하고 들이대고 있는 폭력적인 시선은 도처에 존재한다. 오히려 내가 놀랐던 것은 그것을 술회하고 있는 사람의 ‘담담함’이었다. “안 될 거야”라는 패배감이 깊이 깔려있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분노를 표현할 수 없었다. 난 그저 마음으로 울어야 했다. ‘남자’인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대화해야할까. 내 분노는 ‘동정’의 표현인 걸까, 아니면 ‘공감’하며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함의 표현인걸까. 난 집에 도착하고 다른 감정의 몰락하는 감정과 더불어 울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나는 몰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민을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리고 내가 어떤 성의 표식 때문에 나의 삶에 ‘공격’을 받지 않고, 성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씨앗이 되기를 위해서. 쾌락과 관능이 인간의 파탄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Bed Peace / Hair Peace - Ono Yoko and John Lennon
# 들어가며
나는 여성학을 대학교 1학년 때 <사회학 개론=""> 시간에 사회학 강사에게 처음 들었다. 그 선생은 ‘여연(한국여성단체연합)’과 ‘여협(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진정성’있는 단체와 ‘어용’ 단체의 구분을 가르쳐주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한 편 강하게 남는 기억은 ‘sperm’을 ‘정충’으로 해석하는 그녀의 ‘독특한’ 해석법이었다. 하지만 수업 자체는 ‘사회학’이 주였으므로 여성학에 대해서는 개괄적으로 짚고 넘어갔다. 아, 생각해보면 그 때 조한의 『글 읽기와 삶 읽기』 1권도 읽었던 것 같다. 쪽 글의 과제였다. 20살에 만난 여성학과 여성주의는 “나는”, “나에게”, “내가”라는 주어를 통해 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해방적 글쓰기’로만 남았다. 물론 나 역시 ‘양성평등’(남녀평등이라는 말보다 좀 더 나이스 해 보이는)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남자애’였다. 지금 생각해 보건데 나는 ‘흑기사’가 되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술자리에서 ‘진상’을 부리는 예비역에게 잔뜩 욕을 해주고 유유히 ‘여학생들’ 사이를 표정관리하며 빠져나오는 그런 ‘남자애’. 결과적으로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다거나, ‘여학생’들의 입장으로 생각하는 적은 별로 없었다. 매번 ‘인텔리의 에티켓’이라는 옷을 걸치긴 했지만, 내 몸은 크게 ‘개화’ 혹은 ‘신남성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때 <여성학> 수업을 들었고 나는 마치 ‘여성주의’를 마스터한 것처럼 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내 우쭐거림에는 ‘진보적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댄디함과 ‘둔탁하지 않음’을 ‘공감능력’으로 착각함이 크게 한 몫을 했다.) </div>
 
# 학교의 여성학과 여성주의
여러 가지 글과 ‘발언’들을 통해서 매번 토로했었지만, 그렇게 배운 ‘여성학’은 여성주의와, 여성주의자들의 문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여성주의자가 어떤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었다. 나는 지난 쪽 글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의 현재적 경향인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나 비판할 줄 알았고, ‘젠더’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라는 문장 하나 밖에 인지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경향과 젠더가 어떻게 맞물려있는지에 대한 이해도도 굉장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내 몸 역시 그러한 인식구조를 많이 뛰어 넘었을 리 없다. 대학원에서의 첫 학기의 <젠더연구입문> 수업은 그렇기 때문에 내게 ‘문제적’이었고 ‘도전적’이었다. 학기를 마쳤을 때 여전히 가야할 길들이 많아보인다고 말했던 것은 지금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 같다. </div>
 
# 남자로-식별되는-남자는 여성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른 방식의 말하기에 대해 갈증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제목에 언급한대로 그것은 ‘Men-Identified-Men’이 여성주의에 대해서/여성주의와 함께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질문이 가야트리 스피박이 1988년 “Can the Subaltern speak?”이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의 ‘절박함’을 간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나는 몇 가지를 점검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식별의 문제 : 누가 남자로-식별되는-남자인가?
먼저 식별의 문제이다. Identify라는 말은 ‘정체화’라는 말로 문화연구와 여성주의, 그리고 탈식민주의 텍스트에서 활용된다. 하지만 Identify라는 말을 종종 군사적 용법인 ‘식별’로 활용할 경우 더 많은 것들을 말해줄 수 있다. 예컨대 Men-Identified-Men이라는 말은 자신이 ‘남성’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남성으로 ‘식별된’, ‘정체화된’ 남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식별’은 곧 ‘통과passing’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든/원치 않든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 예컨대 아마르티아 센이 『정체성과 폭력』에서 언급했던 ‘폭력’이 바로 그러한 양상들일 것이다. 한 명의 (남자 혹은 여자 혹은 그 어떠한 젠더) 사람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들은 다양하지만, 자신은 ‘남자’로 혹은 ‘여자’로만 호명된다(심지어 다른 젠더로는 불릴 권리조차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구체적 사람인 그는 그러한 방식의 식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남성의 ‘탄생’이야말로 개개인의 구체적인 남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폭력이지 않은가?? 아무리 사탕이 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른 한 편, 이 식별을 받아들였다고 가정해보자. ‘차이의 정치학’들이 노정되면서 여러 가지 논란들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옥희 선생의 수업에서 ‘제3세계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했듯 단순하게 ‘여성’이라고 동질화되지 않는 지점들이 많이 제출되었던 것처럼 여성들의 ‘차이’에 대해서 여성주의는 이제 대답할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러나 ‘남성’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다. ‘남성-소수자’의 경우는 어느 정도 여지가 생겨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Men-Identified-Men’은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지점에서 다른 쟁점 하나가 물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계속 ‘비가시화’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경계’로 떨어지는 존재들에게 주목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윤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일관되고 온전해 보일 것 같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억압받았던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통한 공감empathy를 통해 ‘타자와 함께 with others’ 사유하고 같이 지내는 윤리를 만드는 기획으로서의 여성주의에 대해 나는 공감한다.
 
# 올가미를 씌워야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어떠한 종류의 불편함을 다시금 말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언젠가 <젠더연구입문> 수업시간에 내가 여성주의의 어떤 분파는 ‘이갈리아’로 가야만 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그녀들의 욕망이 이갈리아를 꿈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였다. 물론 나도 이제는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의 답답함을 느낀다면 이것은 또 어떤 영문에서일까. 이반 일리치가 말했던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라는 말이 왜 등장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지난 학기 수강하였던 <문화와 경제=""> 수업에서의 김애령 선생의 특강에서의 데리다의 ‘환대’에 대한 아포리아가 떠오른다. 절대적 환대를 하기 위해선 자기 공간을 포기해야 한다. 문제는 포기하기 위해서는 자기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자기 집’의 지상권을 갖는 환대의 주인은 누구인가? 데??다의 『환대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남자) 주인의 행태가 떠오른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를 하기 위해 자신의 집의 딸과 아내를 내어주는 주인.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의 딜레마에 있는 것 같다. ‘여성들만의 공동체/마을’을 만드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떤 토를 달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리고 어떤 ‘손님’이든 ‘환대’할 수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환대’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자기공간의 일정부분의 포기. 이는 ‘자기 공간’의 부재 속에서 그것을 꿈꾸었을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한 지점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서 ‘권리’를 달라는 것보다, 계속 결핍될 ‘권리’라는 것들을 버려버리고, 함께 ‘내어줄 수 있음’의 윤리를 구성하는 과정이 지금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근대적 국가가 주었던 소유권적 ‘권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외려 반대로 ‘Men-Identified-Men’과 다른 방식으로 지낼 수 있는 윤리가 필요한 것들은 아닐까 하는 역설적 생각도 하게 된다. ‘Men-Identified-Men’에게 ‘교육과 직업에서의 양성평등’이라는 기존의 자유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이 설정했던 방식과 ‘성찰’을 권유했던 급진주의-페미니즘의 언어 말고 다른 방식의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방법을 만들 수는 없을까. </div>
 
# 성별화의 도식을 넘어서…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다시금 말할 수밖에 없다. 여성 노동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만, 여성 노동자 절대 다수가 비정규직이고, … 아니 정확하게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의 ‘여성 영향력’이라는 것은 OECD라는 ‘국격’에 걸맞지 않게 최하위권을 고수한다. 이 상황에서 다시금 여성주의가 ‘해야 할’ 규준들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여성주의를 ‘과포화상태’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재생산=평화=대지=….’의 성별화된 도식을 다시금 강화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만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Men-Identified-Men’을 끌고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자’로만 식별하는 눈 말고 다른 방식으로 다른 언어로 그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과정. 그것은 “여성의 일은 여성 스스로 할 수 있다”라는 ‘씩씩한’ 여성들의 ‘독립적independent’한 관념을 넘어서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한 어떠한 방식의 상호작용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 부드럽게 말하기의 문제
Y의 친구들이 Y에게 했다던 이야기.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없냐?” Y는 ‘왜 여성주의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전의 운동권도, 예전의 숱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 질문에 부딪혔다고 본다. 하지만 운동권들은 ‘톤 조절’에 실패해서 2000년대 초반 이후 대학에서 소멸되어 ‘총학생회장’이 ‘스펙’인 학교 몇 군데에서만 남았을 따름이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반대’만 외치다가 다른 방식의 ‘윤리’와 ‘정치’를 산출하지 못해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다른 한 편 마지막으로 Y가 언급한 ‘여성주의자’들은 지금 톤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것만 같다. 남성에게 씨알이 먹히고, 안 먹히고 문제는 뒤로 미루더라도 일단 절대 다수의 ‘여자들’에게 먹히지를 않는다. 목수정의 책을 제외하면 여성주의의 주장과 엇비슷한 주장을 하는 어떤 책도 여성들의 손을 만나지 못하고, 목수정의 책은 그나마도 ‘당찬 여자’가 제안하는 ‘자기계발서’로 읽힌다. 이러한 상황은 도대체 뭐라고 묘사할 수 있을까. Y의 친구처럼 ‘톤’을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도 근본적인 부분의 변동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여기에 두 가지 진단의 이념형이 있을 것이다. 먼저 지금의 상황이 ‘반발backlash’의 시간이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기존까지의 운동들이 다소 간의 문제를 노정했다고 보지만, 그렇다하여 ‘본질적’인 층위에서 문제의식과 고민의 방향은 별로 오류가 없기 때문에, 천천히 운동을 진행하면 된다고 보는 입장일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의 상황이 완벽한 ‘교착상태’에 빠졌음을 인정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모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의 여성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전자의 문제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 제기되었던 ‘영 페미니스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에 연쇄되어 등장하는 끊임없는 이항대립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방식들의 접근이 필요해 보이는 데 그것이 명료하지는 않다. 어쩌면 내 기준에서 가장 ‘완고한’ 도구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본다.
 
# 자유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의 과제들은 이제 ‘급진적’이지 않은 것일까?
마지막 직전에 상상하나. 공무원의 ‘최고위직’부터 ‘9급’까지 모두를 막론하고 남녀 성비(+LGBT의 인구 비율도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다)에 맞춰서 50:50을 기준으로 할당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에 준하여 고시/공시 이외에도 다양한 자격증, 고용 시장 전체에 이러한 룰이 적용된다고 생각을 해 보자. 당연히 단순비교는 불가능하고 황당한 것일 테지만, 이것과 국가-페미니즘의 ‘성주류화’를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나는 젠더를 ‘주류화’하겠다는 관념보다는, ‘유물론자’로서 전 서열/등급/위계에의 50:50이 더 급진적으로 보인다. 그게 싫기 때문에 알리바이로 ‘성-주류화’라는 담론을 차용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공상을 하기도 한다. 2년에 한 번 여성 총리와, 5년에 한 번 여성 대통령을 봐야한다면 이게 더 큰 변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종종 숫자의 위력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 남자-좌파-사회주의자가 여성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이제 정말 마지막. 딜레마 하나가 남았다. 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Men-Identified-Men’인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여성주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앞의 ‘Men-Identified’를 떼어버려야 하는가(성찰의 문제), 혹은 뒷부분의 ‘Men’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구체적 인간 한 명이되 내 ‘젠더’를 잊고 사는 사람이 되거나 내 ‘젠더-정체성’을 바꾸어야 하는가. 다른 한 편에서 내가 ‘Men-Identified-Men’인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의 ‘비판’과 ‘개입’, 어쩌면 ‘비난조’가 가미되었을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 고민들이 끊이지를 않는다.
 
게다가 ‘Men-Idenfied-Men’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지향들, 그리고 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향들의 문제가 존재한다. 나는 여전히 어떤 부문에서 ‘타협’하지 않고 전형적인 한국 ‘남자애’의 시선과 습속(habitus)을 각인하고 있다. 내 스스로 중요한 질문꺼리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요리조리 엄격하지 않은 기준을 찾아 피해 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자꾸만 어떤 부분에서 부딪히게 되는 부분들이 사실은 부차적이었던 것인지. 여전히 확신이 없다. 예컨대 나는 ‘예쁜’ 여자에게 더 큰 호감을 느끼는데다가, 애인에게 ‘개입’하는 것이 상호간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내 미적 기준들은 어떠한 측면에서 ‘전형적’이다.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 않지만(살 수도 없지만) 나름의 ‘엣지’있는 패션을 다른 방식의 대안 생산-소비 양식을 통해서 누리고 싶다. 예컨대 패션-생협 등을 만드는 게 어떨까가 많은 부분에서 고민이다. 이러한 생각들의 계열은 어떤 것은 반드시 솎아내야만 하는 것들일까, 아니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정치학을 공부할 때는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경계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여성주의를 배우는 ‘나’는 늘 논의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여성주의를 배우면서 느낀 것이다. 여성주의 안에서 내 언어를 만드는 도정이다. 남자-좌파-사회주의자이면서 여성주의자로 살 수 있을까.
This is What a Feminist Looks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