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vs 분석

# 비평이라는 말이 있고, 분석이라는 말이 있다. 두 말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비평은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논하는 것이라 한다. 분석이라는 것은 얽혀 있거나 복잡한 것을 풀어서 개별적인 요소나 성질로 나누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읽고 있자면 분석은 분명 비평의 하위 범주이다. 비평 안에서 분석이 이루어지고 비평은 그보다는 좀 더 큰 범주의 어떤 것에 대해 진단하고 뭔가를 쓰는 행위로 보인다. 그럼 여기에다가 ‘가’라는 말을 붙여보자. 비평’가’, 분석’가’. 사람을 뜻하는 ‘가’를 하나 붙였을 경우 곧바로 두 단어는 장르 혹은 분과를 뜻하는 말이 되어버린다. 예컨대 비평가는 인문학 계통의 글쟁이가 되어버리고, 분석가는 사회과학과 경영계열 계통의 글쟁이가 되어버린다. 비평가는 담론을 쥐고 싸울 것 같고, 분석가는 데이터를 쥐고 싸울 것 같다. 그럼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군대를 다녀오기 전에 내 주위에는 비평가가 1, 분석가가 9 정도의 비율이었던 것 같다. 군대에 가서 열심히 온라인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사람들 덕택에 제대할 때 쯤에는 비평가가 4, 분석가가 6쯤의 비율인 것 같다. 그러다가 2011년 지금와서 생각하니 비평가가 드디서 절반 쯤 되어버린 것 같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분석가들이 내 주위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촘촘히 분석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메타-담론 비평만 주구장창 해대는 이들이 20대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중이다. 그런데 20대 활동가들은 그 속도만큼 증가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내 시야의 협소함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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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의 증가를 보면서 나는 거기에서 육하원칙의 부재를 본다. ‘지금’이라는 맥락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을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 그리고 무크지 <현실과 과학="">의 시절에 꽂아넣어도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거기에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시간과, 발을 딛고 있는 장소가 없는 것만 같다. 며칠 전 엄기호의 이야기처럼 거기에는 ‘공간’은 있되 ‘장소’가 없는 것 같다. 정치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시도에 대해 나는 폄훼할 계획이 없고 누구도 폄훼하면 안 된다 생각한다. </div>
하지만 그 공간이, 명징한 언어의 세계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는 구체적이면서 늘 차이를 지니며 권력관계를 기묘한 방식으로 작동시키는 이 장소들places과 분리되어 있다면 도대체 그 공간의 쓸모는 무엇일까. 매일 매일 우리는 밥을 처먹어야 하고, 똥을 싸야 하며, 오줌을 누어야 하고, 밥만 먹어선 안 되어 반찬을 먹어야 하며, 거기에다가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며, 하기 싫은 말도 해야 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만 할 때가 있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일을 하든 엄마한테 용돈을 받든, 누군가에게 구걸을 하든, 자식한테 의탁하든 혹은 국가가 주는 돈을 받든 어떻게 해서든 ‘돈’을 지니며 살아야 한다.
‘주체의 형성’이라는 담론은 명징한 구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 주체가 형성되는 장에서는 늘 누구든 구질구질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혹은 생각보다 이상하게 굽어진 길들을 걸어야만 한다. 그 순간에 떠올려야 하는 것은 ‘선언’일까, ‘이념’일까, 혹은 그 자리에 적응하면서 분석하고 거기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능력일까?
난 후자라고 단언하는 편이다. 만약 전자라면 이 거대한 자본주의에 적응해 살면서도 어느 날에 갑자기 변화하는 인간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 변화 곁에 반드시 ‘선언’이, 혹은 어떤 주체형성 이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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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분석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분명 상하 관계를 내포한다. 분석은 비평의 하위 범주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분석가와 비평가는 서로 다른 장르 혹은 다른 실천 속의 인간을 표지한다.
난 분석가가 되겠다. 명징해보이는 이데올로기가 실제 작동하는 현실의 누더기 같음을 드러낼 것이고, 그 국면들에서 싸울 수 있는 구체적 언어를 벼려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언어들을 보편화하지 않고 늘 살고 있는 장소에 착근하는 언어로 만들어 하늘에 띄워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세상에 ‘일반 이론’은 없다. 세상에 ‘보편 이론’은 없다. 만약 존재한다 한 들 누군가의 ‘보편/일반’인지에 대한 질문은 늘 유효하다. 혹은 ‘보편 이론’이 작동한다면,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특수한 이해를 폭로하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접근, 이론에 대한 접근이다.
따라서 요즘 정치철학을 하는 비평가들의 논의에 대해 그래서 난 별로 개입할 것이 없다. 물론 나름의 대답들이 있지만 내게 그것들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잠시 요즘 유행하는 말투를 따라해보자면, 저 역사유물론과 혁명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던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1번에서 이렇게 말했다. </div>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