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한 제목과 꼰대같은 해법 – 김태형, 불안증폭사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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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4점
김태형 지음/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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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불안族’, 폭탄주 룸살롱 대신할 특효약은 – 김태형/우석훈 대담 : 프레시안
2010/12/2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지그문트 바우만 – 모두스 비벤디(2010)
2010/04/1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록펠러에서 빌 게이츠로, 단병호에서 이랜드 아줌마들로
2010/09/25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장인정신과 구체적인 자기 이야기를 찾기 – 리처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2009

#김태형 찾기?</font></div>


김태형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던 건 아니다. 예전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가 나왔을 때쯤 되는 것 같은데, 영풍문고 종각점에는 그 옆에 바로 <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앞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도 못 읽어봤기 때문에 별로 두 책에 관심이 없었고 어떤게 ‘진품’인지에만 잠깐 신경을 썼었다. 아무리 봐도 진품은 ‘열기’일테이지 하고 ‘닫기’는 어떤 내용일까 잠깐 살펴보았다. 정확히는 ‘뭐라고 깔까?”가 궁금했다. 그런데 싹 보니 어떤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 때문에 책을 덮었다.</font> </div>

책을 다 읽고 검색해 보니 이것 저것 많은 책을 그는 썼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정치인들에 대한 심리적 분석들을 많이 했다는 것인데, 정혜신이 생각나지만 아마 정혜신보다는 훨씬 완고한 입장으로 썼을 것 같다.

# ‘불안증폭사회’ – 핫 한 제목과 진단

어쨌거나 이 책은 굉장히 ‘냄새’를 제대로 맡고 쉽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쓴 책이다. 제목은 정확하게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불안증폭사회’. 이 한 마디가 리차드 세넷이나 지그문트 바우만 등의 수십년 연구가 발견한 것을 설명한다. 내일을 기획할 수 없고, 자기의 지금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으며 안정감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한국인의 한평생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웃들과 치고받가다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경쟁에서 패하더라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만 없다면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경쟁을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랫다가는 당장 굶어 죽을지 모르는 냉혹한 현실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마치 맹수에 쫓겨 정신없이 달아나는 토끼들처럼, 불안과 공포라는 괴물을 피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경쟁의 쳇바퀴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p.26).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권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주체화 작업(자기계발하는 인간 만들기)에 대해 ‘신자유주의 통치성’이라고 개념적 설명을 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배경의 설명없이 무책임하다. 이러한 과정은 IMF 환란이라는 쇼크 국면에서 발생한 일이며,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포를 체험했고 불안을 만성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죽지 않으려면 !!” 하고 훈계하는 어떠한 이야기든 약발이 먹힐 수밖에 없었다. 사회안전망이라는 ‘패자부활전’의 기제가 원래도 거의 없었지만, 그것이 더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력의 전개방법을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속물'(김홍중이 좋아하는..) 근성을 김태형은 어느 정도 분류를 통해 구분한다.

‘능동적 탐욕’이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 무한대의 이윤추구욕에 사로잡힌 자본가계급이나 마음의 병이 결합된 병자들의 탐욕이다. 반면에 ‘수동적 탐욕’이란 죽을까 봐 무서워 어쩔 수 없이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 불안과 공포에 쫓겨 강박적으로 탐욕을 추구하게 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p.65).

이 지점은 굉장히 중요한데, 순진한게 “물신만능주의”에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피할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IMF 이전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병폐들의 확산은 그러한 ‘수동적 탐욕’을 더욱 강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병적인 조기교육, 과열교육 풍토와 경쟁주의는 아이들을 일찍부터 두 부류로 양분해 각각을 정신질환자로 육성한다. 즉 순위경쟁에서 승리한 아이들은 나르시스트가 되고, 패배한 아이들은 열등감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p.91).

이제 바야흐로 배틀 로얄의 장은 열린 것이다. 김태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극한적인 경쟁이 개인들에게 어떠한 ‘심리상태’를 만들고 어떤 사회적 전망을 만드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에 대해 대체로 동의한다.

한국인들이 극심한 무력감에 빠진 것은, IMF 경제위기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그런 사태를 전혀 통제할 수 없다고 느껴서라고 해야 할 것 같다“(p.107). 
분노는 그 자체로 폭발이나 공격성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끊임없는 좌절, 조바심 그리고 무력감으로 나타난다. 욕구좌절의 반응인 분노감이 통상적으로 무력감만이 아니라 수치감까지 동반하는 것 역시 분노감이 자기비하와 자기혐오로 귀결되기가 쉽기 때문이다“(p.110).

여기에서 두 가지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통제력과 욕구의 좌절이 계속 벌어지는 상황들은 ‘파시즘'(분노와 공격성)으로 가게 만들거나, 극도로 무력감이 자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집단 우울증 상태’로 갈 수 있다는 것. 한국사회는 사실 두 가지 전망이 다 실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꼰대같은 해법과 주사 드립드립드립

이러한 분석들은 굉장히 잘 전달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많은 좌파들이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이 좀 더 잘먹히는 것은 순전히 ‘잘 읽히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대해 얼마나 많은 좌파들이 관심이 있는지는 몰라도. (하여 나는 우석훈을 까면서 한국사회의 1% 이내의 좌파인텔리만 읽을 수 있는 톤으로 글을 쓰는 것에 동의는 할 수 있으면서도 한숨을 쉰다)

그러나 그러한 진단들과 상관없이 처방은 엉망진창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분명 자신은 ‘심리학자’이기 때문에 하면서 도망갈 구멍을 이미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1차 적으로 그는 사실관계에서 뻥을 좀 쳤다. 자신의 책이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심리’에 대해 쓴 첫 책이라는데. 제목에 ‘사회’를 붙이지 않는다고 ‘사회적 심리’에 대해 안 썼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거나 이런 지엽적인 것을 떠나서 다시 살펴보자면.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사실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주장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맺는 관계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은 공익을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동지들 사이의 관계이다.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의 전우애 역시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군인들은 놀라운 희생정신과 고상한 동지애를 발휘하곤 하는 것이다“(p.98).

이런 주장은 전형적으로 NL들이 가지고 있었던 ‘품성론’의 일부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중운동론> 정도를 학생회 실에서 찾아보아도 좋겠다. 문제는 여기에서 ‘공익’과 ‘사익’의 구분을 어떻게 획정하냐인데 김태형은 정확하게 ‘선험적 범주’를 통해서 이를 만들며 사실 이 선험적 범주는 주체사상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font> </div>

나는 사람을 중심에 둔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정신 혹은 마음을 가장 중시한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즉 고상하고 아름다운 정신, 건강하고 행복한 마음을 모든 것에 우선시하는 것이 바로 사람 중심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정치인들도 나와 생각이 똑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오늘의 한국사회가 이 문제에 눈을 돌리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p.249).

여기에다가 책에서 자주 보이는 ‘사회적 생명’이라는 말은 전형적인 유기체론에 입각한 세계관이다. 노동자는 노동자 답게, 자본가는 자본가 답게, 학생은 학생 답게, 선생은 선생 답게. 노동계급은 좌파정당을, 자본가 계급은 우파정당을. 이미 그러한 분할된 주체들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 중심’이라는 말이 도출되는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그에 대해 김태형은 ‘노동 계급’이나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떤 것이 ‘사회적 노동’인가? 난 여기서 2011년까지 되어 주체사상을 비판할 여유가 없다. 다만 그 ‘꼰대스러움’ 정도를 지적하기 위해 첫 번째 준거가 주체사상의 세계관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휴머니즘 일반에 대한 비판이 가능한데, 그건 그가 셋팅하는 사람과 동물의 차이. 정말 안 그래도 ‘생태적 가치’가 중요해지는 시점에 동물을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사회적 동기와 감정, 생각들이 훨씬 더 중요하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진화심리학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하려 한다면 쥐새끼와 원숭이 얘기 말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난 동물이다!!!

두 번째 준거는 정치에 대한 초보적 인식이다. 그는 더 단단한 공동체가 세워져야 하며, 단일한 정치적 연대가 세워져야 한다는데. 그러한 주장의 귀결은 무엇인가? 전자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가 ‘단일한 정치적 연대’를 위한 구상이라면 난 거기 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나온지 15년이 넘었는데 다시 ‘대오’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인가? 이러한 공동체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일일이 지적하기도 귀찮다. 다만’배제’와 ‘구획’을 엄밀하게 하는 ‘단일성’의 공동체는 늘 ‘타자’에게 폭력적이라는 것이 21세기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많은 좌파 인텔리들이 얻은 결론이라는 점만 짚자.

후자의 경우 결국 민노당 자주파, 전국연합이 했던 이야기의 귀결 아닌가. 결국 ‘단일 대오’가 세어져야 한다는 것, 다 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 노빠의 ‘현실주의’까지 보태면 민주당의 빅텐트에 들어가자는 ‘정치적 결론’이 된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의 ‘진단’과 ‘제목 뽑기’는 쌔끈했지만, 그가 제안하는 것들은 다시금 ‘구태의연함’으로 독자를 인도하며, 교착되어있는 문제를 다시금 ‘정확히’ 살피지 못해 그가 말하는 ‘방어기제’의 작동으로 퇴행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잘 팔릴 것이다. 그건 ‘잘 읽’히며 지금의 문제를 잘 ‘진단’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잘 진찰해놓고 처방전을 쓰면서 엉뚱한 약을 줬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엉뚱한 약을 주는 게 그들의 습관이었다는 점이다.

책에서 모락모락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