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주제별 접근과 분야별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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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형의 논문 <영국 사회학의="" 사회학="">을 읽었다. 주장은 간결하다. 한국에서의 사회학은 흥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영국에서는 흥하고 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div>
이렇게 말하면 ‘맥락’을 따지는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반문을 할 수 있다. 영국이랑 한국이랑 도무지 같은 나라냐고. 하지만 조금 세밀히 살펴보면 분명 그 성패를 가르는 지점들에 대해 분석과 평가를 해볼 수는 있다는 게 지주형의 주장이다.
두 나라 다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경험했고, 사회학에 녹록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인류학과 정치학보다 요즘 사회학이 잘 나가는 분위기이고 사회적 영향력도 가지고 있다. 앤서니 기든스를 떠올려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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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영국의 사회학은 어떻게 잘 나가게 되었는가? 내 눈에 띄었던 것 두 가지만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초분과적’ 접근이 사회학 내부에서 수용이 된 측면이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연구 주제별 접근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사회학에는 역사사회학, 문화사회학, 정치사회학의 형태로 사회학의 분야들이 분류된다. 즉 연구주제들을 묶을 수 있는 카테고리가 분류되고 그것들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이 시도된다. 방법론적으로 이미 굉장히 분화되어 있지만 어떤 선험적인 ‘사회학적’ 접근이라는 것이 전제되고 그것을 매개할 수 있는 분류가 적용된다.
그런데 영국의 사회학은 좀 경향이 다르다. 예컨대 의료기술의 사회학, 군대사회학 이런 식이다. 한 명의 연구자들은 의료기술에 대해 전문가가 되고, 그 분야를 보기 위해서는 초분과적 접근. 즉 사회학이든 인류학이든 의학이든 다 동원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회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의 형태로 산출한다. 즉 한 명의 연구자들은 그 분야에 대해서 온전한 형태의 이해를 갖춘 전문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가는 테크노크라트 전문가와는 좀 변별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테크노크라트 전문가는 방법론적 혁신은 하지만 이론 패러다임의 전환에 있어서는 둔하기 때문이다. 즉 자료는 조금 변하지만 보는 눈과 도구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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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자기 주제만 알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되기 쉽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거야 말로 내가 보기에는 난감한 주장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의료기술에 대한 사회학을 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그 분야와 관련된 여러 분과 학문들에 대한 주제들이 있고, 그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인접 연구주제들로 넘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주제는 눈덩이 굴리듯이 늘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인접 연구주제들은 기존의 분야별 접근이 한정했던 바, 혹은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문외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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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학에 대한 지주형의 주장은 사실 문화연구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연대 문화학과 10주년에서 강내희 선생은 ‘GNR 시대 초분과적 기획으로서의 문화연구’에 대해 키노트를 통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해 대체로 동의를 하면서도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좀 더 집요하게 자기 연구주제, 자기 현장의 구체적 주제들에 대해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너럴하게 넓은 시야를 다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해보이는 것은 자기의 구체적인 주제를 명확하게 끌고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결국 ‘장소성’에 대한 문제, ‘현장’의 문제, ‘공간’의 문제 등 수평적 차원에서의 범주들에 대한 고민을 만들어낸다. 이미 통찰력을 갖추고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일관성 있게 다룰 수 있는 ‘대가’들이야 큰 범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매번 뻥뻥 큰 주제를 주니어 연구자가 담론적으로 다루는 것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에 대한 문제제기도 동시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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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분석과 연구가 더 중요하다는 드립이 되겠다. 그리고 나는 집요하게 하나를 물고, 그 주변으로 가지를 쳐볼 생각이다. 2005년 B 선생이 했던 이야기가 다 맞는 것 같다. 아, 참 나는 우둔하다. 7년이 지나야 말귀를 알아듣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