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러운 남자의 건축에 대한 입담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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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 8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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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가 되면 읽는 책들이 있다. 보통 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집곤 한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집곤 한다. 건축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는 잃어버린 ‘땅’에 대한 감각, 그리고 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간들과 그 장소들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려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을 때는 이미 ‘수다스러운 남자’가 되어버린 내 모습과 그 나이 쯤에 썼을 보통의 이야기들을 서로 견주어보려 한다.

사실 보통은 이미 ‘연애 소설 3부작’을 20대 중반에 완간한 바 있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25살 보통을 처음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은 공감이 아니라 질투심이었다. 도대체 나 역시 알고 있는 것을, 그러나 누구에게 쉽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들을 이리도 수다스러우면서도 귀기울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구사하는 이 남자에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은 내 질투 대상이 되었다.</font> </div>

20대에 책 한 권은 쓰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이름의 글이 들어간 잡지를 제외하면 아직 마친 책이 없는 내게 보통은 지속적으로 내 머리를 꼬리에 만들 곤 했다. 그런데 그 머리꼬임이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보통은 너무나 ‘달콤’하면서도 적절히 그 단맛을 상쇄해주는 ‘투박함’의 활용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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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연초가 되었고 나는 다시 보통을 잡았다. <행복의 건축="">은 사실 보통이 우리 나이로 38살에 쓴 책이다. 그 전에 느꼈던 입에 가득 묻을 것 같은 달콤함 자체는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달콤한 향이 전해진다. 그래서 보통이다. 그가 어떤 책을 집었을까가 궁금하다.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보통은 어떤 책을 읽고 건축에 대해 말을 했을까?</font> </div>

사실 기술적인 이야기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잘 알지 못한다. 도시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이야기 몇 가지, 그리고 가우디에 대한 이야기 몇 가지를 읽어보았던 것을 제외하면 나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보통의 책은 건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에게 감각을 일깨워준다. 쉽다. 번역어기 때문에 쉬울리 만무하지만 쉽다. 잘 읽힌다. 그리고 입말로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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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그의 장난스러움에 슬몃슬몃 웃음이 삐져나온다. 예컨대 계속 일상적인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관념론적인 한 마디를 던질 때의 그가 지을 표정이란.. 이런 문장..

물론 그런 대상을 소유하면 자신에게 그것이 암시하는 미덕을 흡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음을 불현듯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덕들이 자동적으로 또는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만 지나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과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자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p.160).

“어떤 사람과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내적으로 닮는 것’이라는 내밀한 주장을 끌어낸다. 갑자기 난데 없이 등장한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강렬한 반응을 할 새가 없다. 이미 난 웃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공감했기 때문이다. 매번 ‘몸’에 대해 탐닉하는, ‘섹스’에 탐닉하면서 그것들을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관념’을 나는 동원하고 있는가. 사실 그렇다하여 ‘몸’에 대한 탐닉이 일차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한 느낀다. 그 밑바닥에 있는 ‘불안’ 그리고 그것들을 ‘닮는 것’을 통해 극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 연상, 그리고 또 연상이 꼬리를 문다. 눈으로 보일 듯 한. 책의 어귀에 “Cute Idealist“라고 써놓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애인이 읽고 있던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서는 ‘소유욕’에 대한 반론이 밑줄 쳐 있기도 했다.</font>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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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주장은 언제나 그랬듯 전혀 급진적이지 않다. 장황할 것 같은 내용을 기억, 이상, 질서, 균형, 우아, 일치, 자기인식과 같은 말들로 잘 깍둑 썰어놓고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 ‘상실감’을 느끼고 ‘아름다움’의 손실을 느끼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사람들이 ‘개발’에 몰입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렇다하여 그 이유의 설명이 ‘개발주의’에 대한 반대까지 진행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 놓쳤던 지점을 말하면서, 다시금 코르뷔지에 건축이 불가피했던 맥락을 설명해버리는 보통은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누락된 것의 가치를 다시금 끌고 들어와 언급하지만 그렇다하여 이렇다 저렇다 큰 맥락에서의 논평은 생략해버린다. 간단히는 근대적 ‘합리성’의 구현이 우리가 건물, 건축물 속에서의 우리가 ‘행복’을 느끼게 하는 구체적인 다른 소소한 기억들에 대해 놓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건 불필요했지만… blabla… 

그렇다하여 보통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나 ‘당파성’의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난해하다. 보통은 애당초 어떠한 ‘기획’을 명료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건물은 말을 한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 말을 한다. 건물은 민주주의나 귀족주의, 개방성이나 오만, 환영이나 위협, 미래에 대한 공감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pp.76-77).

이미 단련된 ‘먹물 인텔리’에게 그의 언어는 밍밍하다. 문학적 표현에 젖어있는 그(녀)에게 그의 표현은 말랑말랑하되 ‘몰락’을 보여주지 않아 맥이 빠진다. 하지만 일상을 결을 예민하게 느끼는 이에게 그의 글은 종종 치명적이다. 그는 주장하지 않지만 어떤 구체적 장소로 읽는 이를 인도하고 회상에 잠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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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의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은 것 같아 하자면… ‘문화의 시대’였던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의 감각이 우리에게 인도한 길은 ‘공간’으로 가는 길이었다. “급진적 공간”, “새끈한 클럽”, “민주적 광장”. 그 곳 모두는 구체적 장소, 그리고 그 장소들의 배경에 대해 생략하는 것을 강령으로 했었다. 어느 장소에서도 ‘새로움’이 폭발할 수 있으며,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공간’들의 창출이 목표가 되었다. 그런데 엄기호의 표현을 따르자면, 우리에게 열린 ‘공간’들은 ‘서울 광장’도 있었고, ‘소라 광장’도 있었고, ‘광화문 공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 공간들은 자본들에게 전유되었다. 신촌의 소소한 미네르바 같은 카페 ‘공간’은 젊은 이들의 ‘아지트’였고 해방구였지만, 할리스와 스벅(스타벅스)과 탐탐(탐 앤 탐스), 파스쿠치에 그 특성을 넘겨주어버렸고. 정치적 아고라는 트위터와 <다음 아고라="">로 넘어가버렸다. 구체적 장소에서 우리의 ‘문화’는 춤추지 못하고 있다. 배경이 소거된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장소의 ‘배경’과 함께 맞물리지 않는 그러한 ‘공간의 경험’들은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었다.</font> </div>

우리의 말은 ‘겉돌고’, 우리의 삶은 ‘헛돌’기 시작했다. 서울광장의 촛불은 기륭에 도달하지 못했고, 어느 힙합 클럽에서의 인연이 만들어낸 원나잇 스탠드는 가부장적 성윤리를 깨지 못 했다. 우리는 구체적 장소에서 여전히 보수적 권력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홍대 앞 두리반은 해방구 ‘공간’이 되었지만, 그 뒤에는 삼오진 방식으로 해주겠다는 GS건설의 겁박이 멀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보면 ‘안정감’을 잃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공간들’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공간에서의 만족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한 편 매일을 맞닦드리는 장소에서의 소소한 행복감 그리고 그 장소의 배경이 주는 어떤 충일함일 수 있다. 그 감각을 가지고 어떻게 ‘공간’들과 ‘장소’들이 행복한 만남을 하게 할 수 있을까. 4대강을 막기 위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는 절박함들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 토건주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거는 법,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삶의 장소들을 회복의 공간으로, 또 행복의 공간으로 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

내 동네의 풍경이 어떻게 ‘아름답게’ 보일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골목길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 내가 딛는 땅의, 내가 사는 집의 배경인 거리를, 또 차도의 풍경으로 존재하는 들판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는 법. 함께 공유하는 법. 그게 지금 내게 드는 생각들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