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 – 지속가능성 vs 복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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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디버블링』을 한 번 다 읽었다. 원래 한 편의 독후감을 쓰려고 했는데 책의 ‘<A title=”[http://retired.tistory.com/1184]로 이동합니다.” href=”http://retired.tistory.com/1184” target=_blank>오류</A>‘가 발견되어서 그 부분에 대해 길고 긴 이야기를 준비했다가 엎었다. 내 책 쓰기도 정신 없다. 그런데 생태학에서 한 동안 회자되던 두 개념을 가지고는 이야기해볼 만 한 게 있는 것 같다. 이런 건 어떨까?

먼저 아래의 그림을 보도록 하자. (복잡한 게 싫으면 다음 단락은 읽지 않아도 된다.)

이 그림은 최근 생태학 연구자 중에서 ‘종합 프로그램’을 선보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인 홀링Holling의 『Panarchy』에 나온 Resilience Cycle이다. 번역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고. 시작점은 3분면의 r 국면부터다. 두 가지 변수로 에너지의 흐름과 연결성을 살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말고도 다른 표현을 갖다 붙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홀링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생태학적 통합 모델을 기획하고 있다.) 잠재력Potential과 연결성Connectedness이 계속 증가하다가(정확히는 잠재력을 짜내기 시작), 1분면을 지나다 보면, 연결성의 증대 때문에 발생한 잠재력의 과다 소모가 벌어지고, 방출release 과정을 거치면서 연결성이 약해 진다. 연결성이 약해진 상황에서 재조직reorganization이 벌어지고 다시금 개발(혹은 착취)exploitation가 벌어지면서 잠재력을 짜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순환의 반복이 벌어지는 것을 하나의 어떤 생태적 과정들의 원환과정cycle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3분면에 있는 x라는 탈출구다. 먼저 이 x가 없으면 사회과학의 ‘행태주의’이 전제하는 ‘구조기능주의’의 그 환류 체계feed system와 같은 닫힌 체계closed system이 된다. 그리고 생태학의 표현을 빌자면 잠금lock-in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이라고 묘사할 수 있겠다. ‘잠금’ 상태가 꼭 나쁜 건 아닌데, 문제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지닌채 잠겨있는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환과정이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중요한 Keyword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원환과정이 꼭 ‘선순환’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악순환’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한국이라는 ‘토건 경제’라는 구조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 그것들이 ‘재생산’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인문-사회과학이 가지고 있는 모든 ‘구조주의’적 경향들은 모두 이 닫힌 체계closed system을 전제로 만들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를 들어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Ideological State Appratus도 이런 모델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x라는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모순이 축적될 경우에는 붕괴collapse라는 상황이 벌어지고 생태계는 해체된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x가 존재하는 경우다. 재조직reorganization을 통해서 다시금 원환과정을 유지할 수 없는, 즉 잠재력potential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기존의 체계의 전면적인 재편이 일어난다. 이를 혁명 정국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공황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생태계의 재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태학의 최근 관심사는 이 x를 통해서 다른 원환과정으로 안착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Keyword가 복원성resilience이 된다.

# **‘지속가능한 연애’

**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먹물질’과 ‘장난질’을 함께 해 볼 수 있다.

다음 노래 가사를 보자.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cellSpacing=1 cellPadding=1 width=600 bgColor=#ffffff>


<FONT color=#5c7fb0> 아주 오래된 연인들 – 015B
</FONT>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
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 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
젠 없는 거야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
을 하지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
레 이별할 기회를 찾으려 할때도 있지

</TABLE>

이 노래는 ‘지속가능한 연애’의 전형적인 연애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연애를 시작하는 시점, 잠재력potential은 가장 높은 상태이다. 쉽게 말해 콩깍지가 씌워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여기에 성차가 개입할 여지가 있지만 어쨌거나. 그래서 그(녀)와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퍼부으면서 연결성connectedness를 높이다. 서로의 결속과 관계의 깊이가 더해진다. <FONT color=#8c044b>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여러가지 행위 들을 하게 되고 전화통을 잡고 새벽 4시까지 통화해서 다음 날 지각을 하고, 서로가 디뎠던 장소과 서로가 보냈던 시간들 모두가 ‘추억’의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한다.</FONT> 그 와중에 서로에게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된다. “사랑한다”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단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을 위의 그림에서의 K 국면에서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Max. Potential Max. Connectedness**)

하지만 서로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았다는 ‘착각’과, 다 알았다고 느꼈던 상황에서 난데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연인들은 싸움을 시작한다. 처음에 싸움은 그냥 좀 삐쳤다가 밤에 로맨틱한 상황을 다시금 누군가 전개하는 것으로 쉽게 정리되기도 하지만, 날이 갈 수록 싸움 때문에 골이 깊어질 수도 있다. R 국면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추억’이 되었던 것들이 비수가 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았던 것들이 모두 꼴도 뵈기 싫은 이유가 된다. 이 상황에서 ‘재조직’의 상황이 필요해진다. 보통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연인들의 경우 이 ∂ 국면을 넘기지 못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다시금 누군가의 ‘화해’ 제스처를 통해 혹은 어떤 ‘이벤트’를 통해서 연애는 지속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r 국면으로 진행하고 연애는 지속된다.

그러한 연애를 지속하기 위한 어떤 규준 같은 것이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에는 잘 담겨있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봉사’를 한다. 이러한 상황이 고착되고 위에서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FONT color=#8c044b>**서로는 ‘외로움’이 싫어서 연애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 느꼈던 ‘설레임’이 부족하다. ‘잠금 상태lock-in’ 상태가 펼쳐진 것이다**</FONT>. 연애는 깨지지 않지만 연애가 주었던 어떤 가슴 콩닥거리는 상황은 슬슬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015B의 노래는 역설적이게도 ‘설레임’이라는 초기 상태의 ‘느낌’을 회복하라는 말로 해답을 낸다. 사실 그 ‘설레임’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래의 상황대로라면 없다. 설레임은 그들의 연애를 조건 짓는 것들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FONT color=#8c044b> **이 두 사람은 그저 그들의 연애가 지속가능하게끔 ‘의무감’과 ‘습관’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축이 흔들릴 정도의 갈등을 연애 당사자인 둘 다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애 관계의 ‘재편’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회의적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FONT>.

생태학에서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런 개념이다. 개발은 하되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살살’하라는 말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이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FONT color=#112a75>**연애에 있어서도 ‘적당히’ 싸우고 ‘의무적’으로 해야할 것들을 잘 챙기라는 것. 발렌타인 데이를 챙기고, 화이트 데이를 챙기고, 빼빼로 데이를 챙기고, 크리스마스를 챙기고, 생일을 잘 챙기라는 조언, 그리고 김동률과 이소은이 불렀던 <욕심쟁이>의 가사에 나오는 ‘닭살스럼’을 유지하라는 것이 조언의 끝이다. 연애는 점점 매뉴얼을 따라가게 된다.** </FONT>갈등의 국면에서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정해야 할 지에 대해 ‘지속가능한 연애’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말이 없다. x라는 재조정의 국면을 설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FONT color=#8c044b>즉 지속가능한 연애에는 ‘진화가능성’이 없다. 근본적인 조정이 필요하거나 큰 갈등이 벌어졌을 때 무조건 붕괴하기 때문이다.</p>

</FONT># 복원성에 대한 오해

</STRONG>

그런데 여기서 ‘복원성’ 있는 연애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할 ‘복원성resilience’의 개념 활용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그냥 “이번의 연애는 망했으므로 다음 번의 사람과 다시 연애를 열심히 하라는 말이냐?”라는 식의 오해 말이다. <FONT color=#8c044b>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번의 x 통로를 통한 ‘재편’은 연애의 종료와 다르다. 연애의 종료는 개념적으로는 ‘생태계의 붕괴collapse’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반해 x 통로를 통한 ‘재편’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재조정을 말할 뿐 ‘이별 후 새로운 만남’을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과의 ‘이별’은 한 ‘연애’라는 생태계의 붕괴를 말한다. 다음 번의 연애는 ‘새로운 생태계’의 설립을 말하는 것이다.</FONT> 물론 ‘바람둥이의 연애생태계’를 가지고 말하자면, 끊임없는 ‘새로운 사람’을 x 통로로 활용할 수 있겠으나 좀 더 장기적으로 시간을 확장해놓고 보면 그가 멀티를 했던 패턴들의 ‘재조정’이 나이 대에 따라서 벌어지기 때문에 바람둥이를 설명할 때에도 이 모델은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복원가능한 연애’는 ‘이별’없이 관계를 계속 재편해가면서 유지할 수 있는 연애를 말한다.

**# ‘복원가능한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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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가능한 연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예를 들 수 있는 연애는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의 김승우와 장진영의 연애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전체 원환과정을 순환시킨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악순환’이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갈등 국면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고 받고 싸우고 욕하고 다시 사랑한다. 심지어 관계는 여러가지 널뛰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 국면에 적절한 대응들이 이어진다. **<FONT color=#112a75>서로는 ‘지속가능한 연애sustainable’를 하기 위한 규약을 지킬 때도 있지만, 위반에 대해서 어떠한 ‘강박’도 지니지 않는다. 갈등의 최고조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의 복원성resilience은 최대치를 유지한다. 이들의 연애 생태계는 ‘열린 체계open system’이기 때문이다.</p>

</FONT><FONT color=#801fbf>‘이별’을 피하기 위해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의례적인 행위들(앞서 언급했던 기념일 챙기기 등등)을 이들 역시 구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다. 욕망이 충만하고, 설레임이 충만하고, 서로의 흐름을 빨아먹기 위한 에너지가 충만하다.</FONT></STRONG> 그런데 ‘현실’의 연애들을 살펴보라, 갈등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들을 묵히면서 ‘지속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싸움’을 피하다가, 자신의 불만 사항 말하기를 피하다가, 결국 한 방에 연애의 종결을, 사랑의 종결을 만들어내고 있나.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모델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극단적’인 모델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김승우는 다른 여자랑 결혼을 했음에도 장진영과의 연애를 멈추지 않는 상황마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하나의 ‘이념형ideal type’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 약한 강도의 ‘복원가능한 연애’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릿짝의 부모 세대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새로운 버전의 해석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애 새끼 때문에’ 산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서 그냥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한 편 ‘폭력 남편’이 무서워서 이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가 사실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끊임없는 ‘부부싸움’이 만들어내는 ‘순기능’ 혹은 ‘복원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 할 게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하여 내가 꼰대처럼 “꾹 참다보면 낙이 온다”식의 결론을 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역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밑밥을 깔아두지 않고 다 해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FONT color=#193da9>열기에 타 죽을 것처럼 뜨겁게 연애하고, 맘에 안드는 것들은 다 서로 말 하고, 이야기해서 잘 안 되면 제대로 한 바탕 싸워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파악하고 상호간의 큰 조정들을 거치기도 하는 것이 늘 진화하면서, 가장 ‘건강한 연애 생태계’를 유지하기 적합한 방법일 것이라는 은유를 생태학의 모델을 통해 끌어오고 싶을 따름인 것이다.</FONT> 늘 ‘사랑’에 대한 정적이고 헌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관념을 유포해서, ‘갈등 수위 조절’의 테크닉만 유포하는 연애 자기계발서를 불태워버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p>

</STRONG>간을 보지 말고 한 번 밀어붙여서 끝까지 가 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설레임’이 끊이지 않는 연애의 조건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둘 간의 연애의 ‘진화’를 도울 수 있다는 역설적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