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민주주의 –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2009/08/20 – [생각하기/정치사회비평] – 한 시대의 종언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009/08/20 – [생각하기/정치사회비평] – 강원용과 김대중
2009/08/2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민주주의자 김대중을 이해하기 위하여 –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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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전2권 – 10점
김대중 지음/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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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있었다. 그 중 나에게 노무현의 죽음이 난데 없이 귀싸대기를 맞는 느낌이었다면, 김대중의 죽음은 갑자기 눈이 머는 느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매번 쏟아질 법한 오해를 막기 위해 간략히 부연하자면, 나는 김대중 정부 시절 청년진보당-사회당 당원이었고, 노무현 정부 때에도 사회당 당원이었다가 군대에 갔고, 제대해서부터 지금까지 진보신당 당원이며 사회주의-생태주의 좌파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떠들고 다닌다. 김대중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정치적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건 아니다. 이건 못 박고 가자. (아니 도대체 왜 매번 못 박아야하는지도 사실은 좀 의문이다. -_-;)

김대중의 죽음이 내게는 훨씬 더 큰 잔상을 남겼다. 그건 언젠가의 독후감에도 썼다시피 먼저 그가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멀쩡’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세계사의 시간 속에서 대체로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앤서니 기든스가 김대중의 구상에 대해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cosmopolitan democracy’라고 할 때 김대중이 ‘글로벌 민주주의global democracy’라는 이름 붙임이 더 좋다고 했다는데 그런 세계사의 시간에 대한 촉은 김대중이 확실히 탁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앤서니 기든스와 데이비드 헬드 등의 LSE 정치학과/사회학과 그룹의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 구상 그리고 글로벌 시민사회global civil society 프로젝트의 논의들과 최소한 김대중이 맞물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문화주의, 보편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구상, 무력보다는 외교와 문화, 그리고 교역과 NGO들의 교류 등을 골자로 하는 김대중의 비전은 세계화에 대한 ‘부드러운 구상’의 한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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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을 읽으면서 후반부에는 조금 맥이 풀렸다. 초창기에 ‘급진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던, 그의 말마따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결합되었던 그의 젊은 날을 보는 것은 깨나 재미있었고, 2권의 중반부까지 펼쳐진 ‘외환위기 관리’에 대한 이야기와 ‘국민의 정부 얼개짜기’에 대한 부분들은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종반부의 6.15 근처의 정상회담 이후 이야기들은 좀 너무 ‘착해’보였다. 논쟁의 여지가 별로 없는 이야기들이다. <칼을 녹여="" 보습을="">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한반도에서 평화에 대한 구상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반복되었다.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처럼…… “거 봐라 내 말 안들으니 x된 거 아니냐?” </p>

따라서 그의 <자서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부분은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자서전에서 좀 따져볼 만한 것은 그의 ‘민주주의론’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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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단>, <월간조선> 정도와 한 줌의 극우파를 제외하고 김대중이 ‘민주주의자’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흐름은 없는 것 같다. 그는 그 ‘민주주의’의 신념을 가지고 박정희 정권과 싸웠고, 전두환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예수를 만나는 원체험을 하면서까지 버틸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를 그 이후에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가톨릭 신앙 뿐만 아니라 ‘보복’이 민주주의를 만들지 못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분명 투사였다. </p>

종종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들의 비판들 중 하나는 그가 민주주의를 져버리고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는 식으로 이야기이다. 강하게는 그렇고, 약하게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주주의’가 약해졌다라는 식으로도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는 과연 ‘민주주의’를 내려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민주주의에 대해서 정치학에서의 고전적인 구분인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준을 가지고 그가 ‘형식적 민주주의'(민주주의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는 실현했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는 달성하지 못했거나, 안 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연 온당할까?

이러한 방식도 김대중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별로 영양가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김대중은 일관되게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상향식bottom-up 민의 결정구조를 만들려하고 지방자치제를 통한 지역에서의 ‘자치’와 ‘참여’를 디자인 한 것은 이미 익히알려진 일이다. 문제는 ‘사회경제적’ 차원, 즉 ‘실질적 민주주의’의 차원일 것이다. 김대중의 말을 들어보자.

“</span>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저곡가와 저임금을 통해 대기업들만 배를 불리자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종속되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중산층이 불어날 수 없었다. 중산층이 두꺼워야 다이아몬드형의 이상적인 경제 구조를 이룰 수 있다. 소득이 양극화되어 빈민들이 늘어나면 결국 사회의 허리인 중산층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한 경제 구조를 ‘장구형’이라고 규정하고 일찍이 경계했다“(1권, pp.383-384).


정리 해고 도입 법안은 계속 겉돌았다. 취지에 공감은 하면서도 노조 지도부가 막상 현장의 노동자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계에도 무엇인가를 줘야 했다. 그렇다고 미봉책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정리 해고에 버금갈 명분이 필요했다. 노조의 정치 활동을 허용하고 교원노조를 1999년 7월부터 합법화하기로 약속했다. 또 노동기본권을 대폭 확대했다. 이는 노동계의 숙원이었다. 공무원 직장협의회도 1999년 1월부터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4조 4000억 원이던 실업 대책 재원도 5조 원으로 증액하여 실업자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대신 정리해고제를 즉각 시행하고, 근로자 파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노 · 사 · 정이 핵심 쟁점을 주고받는 대타협이었다“(2권, p.27).</p>

여기에 대해 ‘제도’에 대해 논의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의 논의가 서유럽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사회적 합의주의) 전통에 서 있으며, 기든스와 블레어 치하 노동당 정부의 노선이었던 ‘제 3의 길’과 동일한 문제의식이며 이미 ‘망한 우경화된 좌파의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이야기를 멈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시작하는 김대중의 민주주의론의 ‘바탕’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가 없다.

김대중은 중산층/중간계급이 중심이 되는 국가의 계급구조를 희망하였다. 다이아몬드형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서구의 의회를 통해 매개된 자유민주주의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이 중 유럽식 모델은 노동계급과 자본의 투쟁을 노동당/사회당/공산당/사민당 등의 좌파 정당과 보수당/자유당 등의 우파 정당 간의 계급-대중 정당 경쟁으로 전환하여 정체polity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대중 정당들은 산업화를 겪고 포디즘 시대의 ‘황금기’를 겪으면서 대체로 ‘중도화’를 진행한다. 산업평화와 고임금, 그리고 높은 수준의 국가복지의 패키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고 특별히 정당들이 ‘근본적’ 문제로 대립할 일이 없었다. 정당들은 ‘중도’로 수렴했고, 저 유명한 정치학자 다운스Downs의 ‘수렴 가설’이 세워졌다. 어차피 이 놈이나 저놈이나 ‘큰 근본적인 차이’는 없고 이 중 ‘정책’이 맘에 들면 찍자. 노동계급이 자유당이나 보수당을 찍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중산층/중간계급’은 튼튼하게 유지가 되어 있었고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재생산’할 수 있는 기틀로 작동했다. 이러한 상황의 사회경제적 틀의 이름을 ‘사회적 합의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노/사/정이 모여서 합의할 수 있는 틀.

다른 한 편 미국식 모델은 좀 다르다. 미국에서는 ‘계급 정당’ 운동이 1930년대 이후로 약해지고 민주/공화당 체제가 완성이 되었다.  계급 정당을 지향하던 분파들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수렴되었고, 위에 언급한 다운스의 모델처럼 디자인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로비’를 중심으로 정치가 굴러갔고, 계급 투쟁 대신 전국 단위 산별노조 AFL-CIO는 민주당의 주요 분파가 되었다. 중산층은 기업별 복지와 산별노조의 보호, 그리고 민주당의 ‘담대한 꿈’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종의 문제,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해묵은 축들은 계급정치가 탄생할 수 없는 이유로 작동했다. 미국의 민주/공화당 체제는 애당초 ‘중산층’ 중심으로 굴러가게 생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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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쟁점은 김대중의 중산층/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론과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의 차이다. 한국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완벽하게 폐허가 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인민이 ‘평등한’ 조건에서 국가를 재건해 갔다.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 중산층의 형성은 전통적인 계급 정치의 유럽과는 좀 다르고, 미국과 비슷한 양상이면서도 국가주도형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다. 국가의 주도성은 외려 프랑스나 독일과 견주어 생각해볼 수도 있고, 다른 한 편 1987년 이후의 ‘노동 정치’의 양상은 유럽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거기에 친일파-친미파-TK로 이어지는 그룹에 의한 권력과 부의 독점이 형성되었다. 1차적으로 친일파/친미파의 독점은 이승만 정권을 통해서 발현되었고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한 축을 이루었다. 2차적으로 박정희의 개발독재 20년은 TK 헤게모니를 만들어냈다. 1차, 2차 헤게모니 형성에 대해서 김대중은 모두 비판을 했다. 장면 정부에 의해 추진되던 ‘경제개발 계획’에 대한 아쉬움은 그러한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만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장면 정권이 경제 부흥을 추진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로 더 높은 효과를 보았을지 모른다. 군사 쿠데타가 오히려 경제 발전을 한동안 정체시켰을 수도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민주 정부였다면 적어도 어느 계층이나 특정 부류에 치우침이 없이 건전한 경제 발전을 도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재벌에만 특혜를 주고 도시 위주의 개발 정책만 밀어붙였다면 틀림없이 국민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 정부가 어찌 이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1권, p.383). 

그는 지역 편중 없는 경제개발을 말했고, 그것은 그의 민주주의 구상에서 ‘중산층 형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는 경제성장을 통해 ‘중산층’을 형성하는 것이 정체polity를 유지함에 있어서 핵심적임을 알았고, 그 형성의 과정이 국가의 지배세력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지에 대해서 통찰력 있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산층’은 단순히 경제성장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고  당면과제라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그의 독특한 ‘민주주의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대중경제론에서 시장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장 경제의 핵심은 진정으로 창의적인 자유 기업인과 자유 기업의 존재였다. 세계 경제의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의 허상을 보았고 케인즈주의의 한계도 겪었다. 시장 경제를 국가가 대신할 수 없듯이 정치인이나 관료가 기업인을 대신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시장 경제는 그대로 두면 여러 가지 실패들을 거듭하게 된다. 시장 경제를 제대로 감시할 수 있는 국가는 오로지 민주주의 국가이고, 대중과 중산층의 참여와 감시에 의해서만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있다“(1권, p.223). 

 
김대중의 강경한 표현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다. 예컨대 동구의 몰락을 그는 ‘역사의 종말’이나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부재했던 사회들의 몰락이라고 판단했다. 공산주의라서 망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 이 차원에서의 ‘민주주의’는 다시 형식적 차원, 절차적 차원이 되고, 좀 더 깊숙이 살펴보자면 그것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e democracy’와도 연결되어 있다. 즉 끊임없이 토론하고 협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 정권에 대해 끊임없이 여러 통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가장 낮은 차원에서도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은 시장 경제 역시, 즉 자본주의 역시 ‘민주주의 국가’와 ‘대중과 중산층의 참여와 감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김대중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사회경제 체제와 상관없이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이걸 단순히 우파들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다시 정리하자면 김대중은 중산층을 ‘확충’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했고, 그것과 더불어 그러한 중산층이 늘 “깨어있는 시민”으로 참여하고 감시를 하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가 된다. 즉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기획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일관된 그의 ‘민주주의론’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양자는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민주적 정체를 재생산한다. 이것 자체는 훌륭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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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쟁점은 중산층이 분해되어가는 ‘계기’에서의 김대중 정부의 행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민주주의론’에 대한 급진적 구상이 아마 가능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IMF의 신자유주의 패키지를 수용했고,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재편을 진행했다. 정리해고제의 수용, 파견근로제의 수용 등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한국의 중산층은 소부르주의-소상인, 영세사업가 등이 주축이었다. 거기에 87년 체제는 ‘직장인'(노동계급)을 유럽처럼 중산층으로 편입시켰다. 문제는 전통적 중산층과 새로운 중산층 모두가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통해 분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당시 ‘사회적 협약’을 통해서 이 사태를 막아보려 했고 완화하려 했다. 이는 ‘민주주의자 김대중’으로서는 당연한 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의 행보를 보면서 하는 판단으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잔여적 복지’이지만 그것들을 구상하고 재원을 확보했다는 점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일관성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김대중 정부의 정책 패키지는 ‘중산층’의 ‘형성’ 혹은 ‘복원’에 있어서는 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효과라고 말하자. 김대중은 그것에 대한 무력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외환 위기는 이렇듯 우리 사회의 중산층을 허물어 버렸다. 중산층의 붕괴는 소득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빈곤층에 편입된 계층이 다시 중산층으로 올라서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고금리는 부자는 더욱 부자로, 빈자는 더욱 헐벗게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20 대 80 사회’라 부르기도 했다. 잘사는 20퍼센트와 못사는 80퍼센트로 나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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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구조는 세계화의 현상에서 이미 시작된, 지구촌 전체의 불가피한 현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 임기 중에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었음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일부 부유층은 IMF 체제를 즐기고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들의 소비 행태를 보면서 중산 · 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p.483).

김대중은 최소한 이런 ‘무력감’을 재임중에 파악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김대중은 솔직하다. 그리고 김대중에게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방식의 대안을 제시받는 다면(자신이 수용하고 납득할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방식의 사회-국가 모델의 디자인을 했을 것이다.</p>

그런데 노무현은 더욱 더 자신감이 있었고 ‘무력감’을 파악할 생각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퇴임하고 나서야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덕택에 민주당의 전통적인 기반이었던 도시-중산층-고학력자-호남-서민-청년의 축이 박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김대중 때에는 그나마 ‘완화’가 어느 정도 작동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아무런 구상이 없었던 한나라당의 기획에 대해 전국민적 합의들이 어느 정도는 생겨났고 그 결과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러한 중산층의 와해가 곧 바로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날려버리는 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노무현의 ‘진정성’ 만으로 그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중산층의 와해는 ‘세계화의 결과’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신자유주의는 너무나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기 때문에 역진이 불가능한 정책 패키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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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여러가지가 있었고, 김대중의 ‘참여’, 그리고 지방자치에 대한 구상들은 하나의 길이기도 했다. 지역으로부터 시작되는 아래로부터의 흐름들, 그리고 김대중이 찬양했던 사회적 경제의 디자인은 분명 주요한 흐름이었고 지금 와서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그러한 아래로부터의 흐름 중 ‘창의 경제’를 도시-엘리트 중심의 IT 경제의 측면에 주로 읽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들을 다른 흐름으로 읽었다면 분명 다른 방식의 대안들이 제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기에는 그러한 ‘창의 경제’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고, 다시 우파 케인즈주의의 토건 정책이 횡횡했다. 중산층의 몰락은 아파트값 앙등과 함께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또한 다른 방면에서 질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겠다. 김대중의 ‘중산층’과 ‘대중’, ‘서민’에는 누가 들어가고 누가 못 들어가는가? 김대중 자서전을 읽다가 좀 당황스러운 것은 2001년 대우 자동차 사태에서의 ‘무력 진압’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시위를 합법화하고 충분히 시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완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01년 부평에서는 ‘백골단’이 등장하고 물대포가 등장했다. 이는 분명히 ‘자본’의 편을 들어준 정부의 선택이었다. 거기에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2002년 있었던 한국통신 비정규직들의 파업이 빠져있다.

“시위와 집회는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질서 정연하게 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파업도 법 절차에 따르면 전부 다 보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과거에는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에 초법적으로 저항할 권리가 있었지만, 합법적으로 보장하니까 노동자나 시위 · 집회를 하는 사람들도 합법적으로 해야 합니다.”“(p.201)

김대중 정부 하에서 정규직 노조와 양대 노총, 그리고 교사들은 분명하게 정치적인 주체로 활동할 수 있었던 측면이 있고 ‘양지’로 끌어올라왔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하에서 그 바깥의 ‘말할 수 없는 자’들은 여전히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의 눈에 그들은 ‘중산층’이 아니었고, ‘대중’이 아니었고, ‘서민’이 아니었다. 그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 지위를 누리던 그들은 기껏해야 ‘생계급여수급자’로 호명될 따름이었고, 집회가 벌어지면 여전히 공권력은 작동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 언급하는 김대중의 시선이 의아하다.

물론 처리 방식이 훨씬 더 ‘온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제를 폐지하고 교도 행정에 대해서 개선했던 김대중에 대해서,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냈던 김대중에 대해 평가할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오히려 이 쯤에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김대중의 ‘민주주의론’의 주체를 확장시키는 것은 어떠한지이다. 보편적인 민주주의의 구상은 김대중이 처음 구상했던 1970년대에 분명 ‘급진적’인 것이었지만, 1998년 이후의 한국에서 비교적 진보적이긴 했지만, 거기에는 많은 주체들이 누락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여전히 대한민국은 차가운 ‘그들만의 공화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전에 ‘중산층’의 지위를 누리다가 분해되어버린 이들에게 한국은 더욱 더 매몰찬 국가로 인지되었고, 김대중의 ‘민주주의’는 그들에게 별로 따뜻한 온기를 주지 못했다. “북한에 퍼줄 돈으로 차라리 우리에게”라고 외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인들이 점차 조직화되어 반북 시위를 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좌파는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의 주체의 확장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할 계기를 가졌던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도 비판이었지만, 가장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리는 권력의 원리에 대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포함되지 못한 자가 요구하는 것. 그리고 진보정당이 담론을 쥐고 갔었다면?? 가장 ‘민주적 방식’을 아래로부터 쥐고 있었다면? 여러 질문들이 쏟아진다.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기획이 떠오른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꺾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고, 어쩌면 디디고 넘어서야 할 언덕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