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포인트(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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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PADDING-BOTTOM: 0px; LINE-HEIGHT: 1.5em;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COLOR: rgb(51,51,51); FONT-SIZE: 12px; VERTICAL-ALIGN: top;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0px" align=left><A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black; FONT-WEIGHT: normal; TEXT-DECORATION: none"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06430&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티핑 포인트</A> – <IMG style="PADDING-BOTTOM: 0px; BORDER-RIGHT-WIDTH: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BORDER-TOP-WIDTH: 0px; BORDER-BOTTOM-WIDTH: 0px; BORDER-LEFT-WIDTH: 0px; PADDING-TOP: 0px" border=0 alt=10점 src="http://image.aladin.co.kr/img/common/star_s10.gif">
말콤 글래드웰 지음, 임옥희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TD>
<IMG style="PADDING-BOTTOM: 0px; BORDER-RIGHT-WIDTH: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BORDER-TOP-WIDTH: 0px; BORDER-BOTTOM-WIDTH: 0px; BORDER-LEFT-WIDTH: 0px; PADDING-TOP: 0px" border=0 alt="" src="http://image.aladin.co.kr/cover/cover/8950906430_1.jpg">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제가 읽은 책은 2000년판이라 인용된 부분의 쪽 수가 틀릴 수 있습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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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좌파 사회과학을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구조 결정론’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마르크스의 ‘최종심급’에는 언제나 계급 투쟁이라는 말이 걸려들어가면서도 동시에 ‘경제적 심급’이라는 말이 짝패처럼 나온다. 모든 것은 그래. 사회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다보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의 어떤 분파의 책을 읽다보면 세상은 결국 ‘가부장제’라는 구조에 의해서 만들어져있고 그 바깥도 잘 모르겠다는 비관주의에 빠질 수 있다. 모두 결국에는 여성해방 투쟁에 의해서 전복되거나 바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 구체적인 그림은 ‘구조’의 무지막지한 ‘다른 차원’의 문제와 엮어서 생각해보면 잘 그려질 수가 없다.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말은 늘 읽는 이들을 질리게 만든다.</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또 다른 결정론, 구조론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알고보면 최근에 나오는 ‘근본적인 변혁’에 대해 강조하는 이론들도 이러한 그림과 조응한다. (예컨대 Z 선생님) “부분의 합은 전체와 다르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아무리 집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열심히 해봐야 원전 핵폐기물이나, 대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쓰레기들 때문에 ‘근본적’으로 쓰레기 공화국은 피할 수 없을거라는 주장도 비슷한 종류의 주장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조는 바로 ‘관계’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명시되지만, 그는 그렇게 ‘답답한’ 구조결정론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 재해석을 하자면 그 관계는 굉장히 미시적인 차원까지도 내려갈 수가 있는 ‘탄력적’인 것들이다. </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사회과학을 크게 2개의 기준으로 이야기해볼 수가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인정하면 보통 ‘통시적’인 접근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어쩌구 하는 말들은 모두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한 편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있는 이야기들. 혹은 다른 계급에 있는 이야기들. 이건 모두 ‘공시적’인 접근이라고 한다.</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그런데 이런 차원의 이야기 말고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해볼 수가 있다. ‘장구한 시간’ 같이 장기간의 이야기 말고, 임팩트가 있게 파바박 하고 튀어나오는 ‘순간’ 혹은 ‘찰나’ 또는 ‘단기간’에 대한 시간성 말이다. 인류학에서는 빅터 터너가 ‘사회적 드라마social drama’라는 말로 그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예컨대 의례를 하면서 몸이 바뀌는 체험이 그런 것이다. 한국의 이야기로 해보자면, 촛불 집회를 하면서 물대포를 맞는 어떤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 시간에서는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는 것들이 완만하게 관철되지 않는다. 급격하게 몸으로 빨려들어가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분출’한다. 집회를 하다가 애들이 ‘또라이’가 되거나 ‘폭도’가 되는 순간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해방감’이라는 말도 그러한 요소들과 맞물려 있다. ‘일시적 자율공간’이라는 말도 같은

궤에 있다. </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이러한 ‘찰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어느 정도 공간적으로는 협소한 곳을 한정해야만 했었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소수’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 했다. 이전의 사회과학은. 특정한 공간에서의 ‘찰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전지구적으로는 완만한 현상들만 일어난다고 전제를 해왔다. 이는 나름 일리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통해서 정보 전달과 인간의 교류의 속도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러한 전제는 성립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급격한 교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한 편 이는 ‘개인’들 혹은 ‘소수’에 대한 이야기를 초월해 버렸다. ‘나비효과’라는 말처럼 급격한 전환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말콤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전염성’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낸다.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가 ‘티핑 포인트’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팩스를 구입하고, 갑자기 에어 워크 운동화를 신고, ‘~ 신드롬’이 폭주한다. 유행어가 돌고, 트렌드가 급격하게 변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이라는 거대한 것들이 선형적으로 적용되는 일은 별로 없다.</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티핑 포인트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FONT></SPAN><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 face=dotum>1)무엇보다도 전염되기 쉬운 행동들이라는 점이다. 2)모두 조그마한 변화가 커다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 3)변화가 급속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pp.22-23).</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 face=dotum>
</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face=dotum><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이런 세 가지 특징들 즉, 전염성이 있다는 점, 작은 것이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런 변화가 극적인 어느 순간에 발생한다는 특징들은, 홍역과 독감이 퍼져 나가는 세 가지 원칙과 동일하다. (……) 모든 것이 한꺼번에 갑자기 변화하고 전염되는 극적인 순간에 붙여진 이름이 다름 아닌 ‘티핑 포인트’이다</FONT><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333333>“(p.24).</FONT></FONT>

말콤 글래드웰은 비록 ‘좌파’는 아니지만 어떤 ‘변화’에 대해서 매번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흐 테제 13번을 들먹거리며 말하는 좌파들보다 훨씬 더 좋은 ‘촉’을 가지고 잡아낸다.</p>

이러한 티핑 포인트가 어떤 전염 요소들을 가지고 전달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구체적인 분석을 한다.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전염의 평형점을 깨뜨리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전염은 감염 인자를 옮기는 사람들과, 감염 인자 그 자체, 그리고 감염 인자가 작동하고 있는 환경의 기능에 의해 퍼진다. 전염이 절정에 이르러 평형 상태를 흔들어놓게 되면 전염은 그 극점에 도달한다. 무슨 일인가 발생하여 전염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세 요소 중 적어도 하나는 바꾸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법칙, 고착성 요소, 상황의 힘이라고 부른 법칙이 바로 이들 세 가지 변화의 인자들이다</FONT>“(p.34).

대중의 전면적인 ‘대자화된 계급화’를 좌파들은 매번 꿈꾸지만 그람시와 몇몇 일파들과 ‘문화연구 그룹cultural studies’을 제외하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접근했던 경우는 별로 없었다. 문화연구 그룹의 경우 이러한 ‘국면’은 잘 잡아내는데, 즉 글래드웰의 언어로는 ‘상황’까지는 잡아내는데 그것들을 ‘움직이는 것’에는 실패해왔던 것이다. 그건 바로 ‘상황’이라는 것 자체를 자꾸만 ‘거시적 구조’로 환원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문화연구 그룹의 경우 미시적인 것에 대한 촉이 좋은 편이기는 하다.) 구조와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상황의 힘은 환경론적인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행동은 사회적인 상황의 기능이다. 그러나 매우 색다른 환경론이다. 1960년대 자유주의자들은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환경의 중요성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 하지만 상황의 힘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말한다. (……) 상황의 힘은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거창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벽에 있는 낙서를 지우거나 무임 승차하는 사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들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pp.187-188).


어쩌면 ‘좌파’의 말로 바꾸어 설명하자면, 중요한 것은 조직가/활동가들의 ‘상황’판단과 ‘전략’에 대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소수가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화를 해내고, 그것들을 대중에게 각인되는 말로 ‘전염’시킬지에 대한 문제가 된다. 물론 ‘구조’의 힘을 무시하면서 ‘상황’에서의 가장 명민한 대응만을,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임기응변’에 능한 모략가들만을 양산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패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개인주의적’으로 실현하면 어떤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의 전략과 동일한 차원이 된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개입의 정치학’의 필요성을 거세하는 것은 아니다. 우파들은 그러한 점을 명민하게 깨닫고 있었고, ‘마케팅의 전략’으로 승화시켰다. 지금 우리가 글래드웰을 통해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체적 전략’들이다.


인류학에서 한 10년 동안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문화번역’이다. 타자의 문화를 어떻게 우리에게 중계하고,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권력관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수평적’으로 타자들과 교감할까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글래드웰 역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촉’을 잘 잡고 있다.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이것이 바로 번역이다. 어떤 아이디어에 전염성을 부여하기 위해 메이븐이나 커넥터, 그리고 세일즈맨들이 하는 작업은, 주변적인 세부 사항들을 제거해버리고 다른 세부 사항들을 과장시킴으로써 그 아이디어를 변형시키고, 그래서 그 아이디어가 지닌 메시지가 더 많은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p.248).</FONT></DIV>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
</FON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5c7fb0>사람이건 어떤 수단이건, 혁신자들의 메시지를 우리와 같은 나머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해내는 매개체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FONT>“(p.248).</p>

그 ‘매개체’에 대한 고민을 좀 천박하지만 ‘좌파 마케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많이 쓰던 말로 하자면 ‘대중 운동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요즘 ‘담론’계에는 그러한 ‘운동론’에 대한 고민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가장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치열하게 떠드는 것 자체가 오히려 어떤 ‘혐의’를 뒤집어 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남들보기에 ‘거창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부적인 것들 때문에 매일매일, 기획하고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다. ‘글로컬Global+Local Glocal’이라는 말을 던질 때의 맥락에는 바로 그러한 구체적인 것들이 있다.

단순히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의 파열구를 내는 게 아니라, 막고 있다고 비판할 게 아니고 그 구멍을 벌리는 것을 어떻게 가장 일상의 경제에서 구현할 언어를 만들고 그것들을 ‘도약’하게끔 티핑 포인트를 만드는 실천들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닐까. 누구의 말마따나 거대한 노동운동이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을 ‘유령들’인 청소 노동자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나. 갑자기 도대체 왜, 대학생들은 이들에 대한 지지 서명을 하고, 왜 20년 만에 서강대에서는 전체 학생 총회가 생겨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불안정 노동’에 대해서 자각을 시작했다는 식으로 ‘거대한 해석’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인적 등록금’때문에 대학생이 각성했다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놓친다. 그것들을 벌여내는 어떤 ‘포인트’들을 잡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이론화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 그것이 지금 어떤 ‘이론’을 다루는 이들에게 필요한 작업은 아닐까?

언젠가 나는 ‘들뢰즈주의자’를 청산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 거대한 ‘레닌주의’가 나오는 이 마당에 나는 오히려 다시 ‘들뢰즈주의자’를 자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약간의 미세한 비틀어짐, 상황들의 재배치. 이것들의 의미는 다시금 따져볼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것들을 구체적 상황으로 환원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에 ‘자유주의’ 혐의를 씌우는 것을 나는 규탄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꾼다”라는 말에서 ‘몸뚱아리’ 세상을 한 큐에 바꾸려는 것 말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세세한 것들 모두가 ‘재배치’된 세상의 몸뚱아리는 이미 그 전의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구체적인 요구가 근본적인 변혁을 만들어낸다는 발리바르와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바들은 요즘에야 말로 가장 들어맞는 말이다.

경계들을 가로질러가면서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점. 그 지점에 대한 탐구에 대해 이미 오래되어버린 책인 <티핑 포인트="">는 묻는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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