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긍정의 힘’을 믿으시나요? – 『긍정의 배신』(바바라 에런라이크, 2011)

 

긍정의 배신 – 10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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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쯤으로 기억된다. 교회에서 아는 누나에게 『시크릿』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받고서 참 난감했었는데 나는 ‘긍정의 힘’ 같은 ‘시크릿’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순전히 ‘나의 것’만으로 바꾸는 것을 믿을리가 없었다. 『시크릿』이 히트하는 동안 덩달아 ‘오프라 윈프리 쇼’가 케이블 TV에서 나오곤 했었다. 책을 일 주일에 10권 넘게 읽는다는 오프라 윈프리는 도대체 무엇을 읽나 궁금했었든데 그녀가 집었던 책들이 죄다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 같은 책들이었다. 오프라 윈프리 쇼를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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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층은 어제나 저제나 자기계발서와 ‘긍정적 사고’에 대한 예찬을 하는 책들을 냉소한다. 이 지점이 아마 ‘대중서’와 ‘학술서’가 갈리는 분기점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야 말로 ‘엘리트주의’의 전형일 수도 있다. 쉽게 쓴 저널리즘 중 정곡을 찌르는 책들은 잘 팔린다. 더불어 어렵게 쓴 책이더라도 ‘하버드’와 같은 상징자본(문화자본/사회자본)이 걸리면 잘 팔리는 수도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바로 그렇다. 『긍정의 배신』의 저자 바바라 에런라이크(바바라 에렌라이히)는 전자에 속한다. 내가 볼 때 『쇼크 독트린』과 『노 로고』의 저자 캐나다의 나오미 클라인과 더불어 현대의 사회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지성’이 있다면 바로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를 꼽을 수 있을 것같다.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면서도 아무도 짚어내지 못하는 것들을 깊숙이 그리고 넓게 찔러낸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A급 선수다. 이런 책들이 100권만 등장하면 우석훈이 말했듯이 ‘사회과학의 시대’가 열릴 것만 같고, 한국사회에서 설치는 ‘극우파’의 시대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말해 ‘자기계발서’라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잘 팔리게 된 맥락. ‘긍정적 사고’를 예찬하는 책들이 잘 팔리게 된 맥락이 있다. 그걸 탐구하는 것이 에렌라이크의 목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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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열풍에는 후기 자본주의적 맥락이 걸린다. 일차적으로 ‘생산’에 포커스가 맞춰졌던 시대에서 ‘소비’에 포커스가 맞춰진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경제학자들이 잘 쓰는 표현으로 ‘축적양식’ 혹은 ‘생산양식’의 문제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대량생산/산업사회, 즉 포디즘 축적체제에서 다품종소량생산의 포스트-포디즘 축적체제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소비가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의 부문은 ‘마케팅’과 ‘영업’이 된다. 어떻게 팔아먹을까의 문제, 그리고 어떻게 ‘고객’을 만날 것인가의 문제.

고객을 만나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넋’을 빼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려야 하고, 그걸 위해 ‘긍정적 사고’, 그리고 ‘긍정적 행동’이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다 ‘노동’이라는 것이다. 엘리너 혹실드가 이야기하듯이(2010/09/22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스튜어디스와 감정 노동 ;2010/03/23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감정 노동, 비물질 노동, 젠더위계) ‘연극적 자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계속 자신의 ‘자연스러운 자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기업의 경영기법이 ‘자아’에 대한 통제로 진행되는 것은 당연하다. 기업의 경영기법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것으로 변형되었다고 에렌라이크는 주장하지만 이 부분은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듯 싶다. 전통적인 ‘생산’의 영역이 이렇게 재편되었을까? ‘산업자본’의 영역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쨌거나 ‘감정 자본주의’ 시대에 감정은 마케팅과 영업의 주된 목표가 되었고, 그걸 파는 노동자들은 ‘감정 노동’에 종사하게되는 완벽한 삼각고리가 완성되었다. 힘이 든 그(녀)들은 ‘치유’와 ‘긍정’과 ‘자기계발’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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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이 지목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 것이다. “긍정적 사고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 낙천성이 물질적 성공의 열쇠이고 긍정적 사고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 책임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것이 긍정의 이면이다. 당신이 경영한 기업이 도산하거나 당신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성공 필연성을 굳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p.28).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해야 한다는 점. 좀 더 악질인 것은 자신의 책임이면서도 ‘분석’하지 말고 그냥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자기계발서 중 ‘영악한’ 버전은 금융기법의 산술적 부문이라도 가르치지만 ‘영성’이 느껴지는 ‘긍정적 사고’를 예찬하는 책들은 인간을 ‘멍청한’ 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실패했을 때에도 ‘치유’ 산업의 소비자로 소환한다. 동시에 치유의 종결은 다시금 ‘긍정적 사고’를 회복하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슬펐던 이야기는 바로 ‘긍정적 사고’로 항암치료를 견디고 수기를 쓰고 그러한 치료를 ‘고통’이 아닌 ‘통과의례’인냥 기쁘게 표현했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때 유방암 환자들의 커뮤니티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야 한다는 잔인한 고립의 논리가 바로 ‘긍정적 사고’와 짝패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달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행복 전도사’ 최윤희가 떠올랐다. 바로 이런 것이다.

개인화되고, 분석도 아닌 ‘심리적’ 상태만을 만들려고 하는 이러한 현대 신자유주의 시대 후기 근대에 대한 이야기. 가장 구체적으로 샅샅이 집요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가진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세계가 좀 더 끔찍해진다.

긍정의 배신 – 10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