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사회의 탁월한 민주주의 감각 –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피에르 클라스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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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10점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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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회과학을 하는 이들, 그리고 정책을 만드는 이들, 정치를 하는 이들이 ‘국가’를 은연 중에 전제하면서 논의를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결국 중요한 것은 강력한 국가의 문제가 된다. 좌파는 강력한 국가를 예찬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그 복지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로 국가를 은연중에 설정하고, 우파는 강력한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해석에 따라서 국가를 예찬하지 않기 때문에 복지에 반대하곤 한다. 문제는 좌파들이 그렇게 말을 하면서 계속 ‘깨림함’이 남는다는 것이다. 분명 마르크스는 ‘자유인의 공동체’에 대해 말했지 ‘국가’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국가’를 좌파들(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이 투표든 혁명이든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통제 혹은 관리하면서 ‘평등’한 사회로 만들겠다는 기획은 전적으로 20세기의 사유이다.

1900년대 초반 영국의 블룸스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ow나 런던 정경대LSE를 만든 시드니 웹 같은 경우가 ‘사회민주주의적 길’을 위해 국가를 소환하는 사유를 했었다. 다른 한 편 ‘혁명’을 통한 길은 레닌이나 마오쩌둥에 의해 정초되었다. 이러한 인식들을 ‘현실주의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과연 이 너머에는 다른 방식이 없을까?

이쯤에서 ‘아나키즘’을 소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 한국어 번역의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처럼 ‘정부’가 없다는 말은 묘한 효과를 만든다. 끝없는 개인주의로 환원되는 ‘개체들’이 사는 공간에서 ‘무정부적’으로 다 내버려 두는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홉스가 그렸던 그림이나, 아무런 통제 없이 개별자본에 의해서 굴러가고 있는 상황들을 그려볼 때 ‘무정부적’이라는 단어는 분명 문제를 내포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떠한 방식이든 ‘관리’ 혹은 ‘정치’, ‘통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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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통해 풀어내는 논의는 라틴 아메리카의 구아야키족의 현지조사fieldwork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맛이라도 보게 해 준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그리고 미셸 푸코 등은 클라스트르의 책을 보면서 엄청난 영감을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클라스트르가 보았던 구아야키족을 비롯한 인디언 ‘원시 부족’들이 보여주었던 ‘국가 없는 사회’ 혹은 ‘국가 없는 공동체’의 자생성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지배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인디언 공동체(잉카, 마야 등은 제외한다)들의 추장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특징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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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시에는 전쟁의 지휘관으로, 평시에는 분쟁의 조정자의 특징을 지닌다.
2)관대함을 부족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즉 부족민이 원하면 재화를 무한정 나눠줘야 한다.
3)추장의 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즉 추장은 말솜씨를 지녀야 한다.
4)일부다처제를 수행한다.</p>

이러한 특징들 중 1항과 2~4항은 다른 구도이다. 즉 1항은 권력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2~4항은 각기 재화/말/여성이라는 ‘교환’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2~4항의 내용을 살펴보면 드러나지만 추장이 어디에서도 ‘군림’한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추장의 지휘가 격하되고 사람들은 추장의 ‘말’에 높은 가치를 두면서도 추장의 말을 ‘쌩’까는 것이 의무가 된다. 아무도 추장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동시에 일부다처제의 수행을 통해서 추장이 군림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추장에게 많은 수의 부인은 곧바로 자신이 ‘인질’이 되었다는 징표가 된다. 모든 부족민은 당장 자신의 ‘딸’ 혹은 ‘자매’를 추장으로부터 철수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게다가 관대함을 보이기 위해서 추장은 다른 부족민들보다 훨씬 더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해야한다. 뭔가를 나눠주려는 데 ‘부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계속 추장을 ‘협박’한다. 사람들은 배를 곯으면 추장을 추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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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말과 ‘권력’이라는 말은 크게 보아 두 차원의 용법으로 최근에 쓰인다. 하나는 대문자 정치(the Politic), 즉 우리가 TV 뉴스에서 보는 국회,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등의 사람들이 하는 행위, 거기에 국가라는 일상과 분리된 ‘거대한’ 단위에서의 행위가 된다. 예컨대 전쟁이나 외교, FTA 체결 등이 고도의 정치행위라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미시정치, 즉 소문자 정치(the politic)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때의 정치가 바로 그런 것이다. 권력의 경우도 대문자 권력(the Power)소문자 권력(the power)으로 읽을 수 있고 위의 양상에 대응한다. 클라스트르가 언급하는 정치와 권력은 바로 대문자 정치와 대문자 권력이다.

원시 사회는 대문자 정치와 대문자 권력에 대해 엄밀하게 견제했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읽어낸다.

정치적 기능이 효과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집단 안에 내재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인디언 사회에서는 정치적 기능이 집단으로부터 배제되고 심지어 집단을 배제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정치적 기능의 무력함은 집단과 유지되는 부정적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사회의 외부로 정치적 기능을 추방하는 것은 그것을 무력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수단이다“(p.55).

이들 사회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놀랍도록 능숙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의 초월성이 집단에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외재적이고 스스로 정당성을 창출하는 권위라는 원리가 문화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협에 대한 직관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철학을 깊이 있게 만들었다. (……) 그들은 스스로 정치적 권위의 설립자가 되었고, 권력이 출현하면 그 즉시 억제하는 부정성을 견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권력은 (문화에 대한 부정이라는) 자신의 본질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런데 권력은 사회에 의해 모든 실질적인 힘을 박탈당한다. 이러한 권력은 이들 사회에서 그 권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행사된다. 정치영역을 구성하는 운동이 또한 정치영역의 전개를 막는다. 이렇게 해서 문화는 권력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자연의 계략 자체를 이용하는 것이다“(p.58).

국가가 없었기에, 강력한 정치적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원시사회가 미개했다는 ‘식민주의적’ 믿음을 이러한 방식으로 해체하는 것이 바로 클라스트르의 주장이다. 왜 그리스 사회 초기에 페리클레스가 ‘도편추방제’를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가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대표를 ‘제비뽑기’로 결정했는지를 생각해보면 클라스트르가 본 원시사회는 굉장히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에 있어서 ‘선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샬 살린스가 이미 『석기시대 경제학』에서 언급했다시피 원시사회는 지금의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현대의학의 발달이 인류의 수명을 늘려놓았지만, 성인병으로 대표되는 영양불균형은 ‘좋은 삶’ 혹은 ‘건강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대사회는 원시사회에 비해 낙제다. 클라스트르는 살린스의 도전과 더불어서 원시사회가 근근히 사는 ‘생계경제’를 운용한다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가 현지조사한 구아야키 족 등은 하루 평균 4시간만 노동하면서도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을 뒤따라갔던 인류학자들은 ‘미개한 원시사회’를 교정하려고 했으며 이들 사회를 공격했다. 인구가 훨씬 더 적었다고 하고, 이들이 가난하고 기근에 시달린다고 강조했다.

“</span>사실상 생계경제라는 관념은 서구의 근대적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결코 과학적 개념 도구가 아니다. 민족학이 이토록 터무니없는 기만에 희생됐다는 것은 역설적이며, 더군다나 산업국가들이 이른바 저발전 세계에 대한 전략의 방향을 잡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무섭기까지 하다“(p.19).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풍요로운 경제를 움직였던 축으로 대문자 정치와 대문자 권력에 대해 견제가 가능했던 원시사회의 힘을 꼽는다. 맑스가 언급했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p>

원시사회는 모든 탈출구가 막혀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자체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실질적인 어떤 것도 시간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영원히 자기 재생산하는 사회이다“(p.262).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유로운 공동체의 운용이라는 것은 인구가 ‘적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작은 ‘지역’의 차원에서의 정치는 수평적일 수 있고 소통을 통해서 작동할 수 있으며 거대한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들을 큰 카테고리의 층위의 정치적 단위로 보게 되면 점차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원시사회의 붕괴를 추장에게 ‘강력한 권위’를 임시적으로 부여했던 전쟁과 인구의 증가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계속 원시사회의 견제 메커니즘의 힘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시사회의 붕괴는 오롯이 ‘국가’를 가지고 있었던 서구 제국주의가 벌여놓은 죄인가? 그렇다면 이 서구 ‘국가’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이 부분을 클라스트르는 더 탐구해야 한다며 머뭇거린다. 이 머뭇거림은 사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도 이 부분은 명확하게 해명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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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클라스트르가 레비 스트로스의 사유인 ‘구조주의’를 이어받았다는 점을 참작해야 할 것 같다. ‘변동의 사유’와 ‘역동성dynamics’에 대해서 구조주의는 늘 문제를 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클라스트르 역시 그러한 담론 지형에서 사유했기 때문에 다른 양상을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만들어놓은 ‘역사적 유물론’과 클라스트르의 주장이 충돌한다. 생산양식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의 재편이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라면, 클라스트르는 오히려 ‘권력’의 문제가 이러한 생산양식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클라스트르의 이론 틀에서 ‘권력’의 문제는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인디안 부족들의 사례에서처럼 ‘공시적’이다. 즉 시간이 멈춰있고 사회적 공간/배열/배치의 차원의 문제가 된다. 어쩌면 권력 자체를 ‘입체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의 양상은 ‘진화’하지 않았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좀 더 생각을 밀어붙여볼 수 있겠다.

다른 한 편 왜 들뢰즈와 가타리 등이 열광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일자’로 환원되는 대문자 권력이 지속적으로 ‘구심력’을 작동시킬 때, 이에 빠져나가기 위해서 ‘사회’가 보여주었던 원심력을 강조하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주의 사유’, 그리고 ‘노마디즘’으로 가는 길을 정초한다. 해방적 사유를 떠올리기에도 적절하다.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라는 거대한 흐름과 클라스트르를 같이 붙여놓고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요새 ‘정치철학’보다 ‘정치인류학’이 더 좋은 아이디어들을 많이 주고 있는데, 바로 이 책 역시 그러하다. 그건 바로 ‘땅바닥’에서부터 사유하는 인류학의 문화기술지ethnography, 현지조사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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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10점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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